지니(제10화: 변용을 허용해 나아가는 과정)

마치 여러 생을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끝나기만 바랐던 짝사랑의 기간도,

지독한 첫사랑의 감정도, 

예술을 자신의 신앙으로 의존했던 시기도,

날개를 잃고 피를 뚝뚝 흘리며 걷기를 배워 왔던 연옥도,

드디어 울음을 그치고 침묵의 허공에서 자신을 은둔하는 현재도, 

전부 끝나지 않을 것 만 같았었다.

한 단계의 시작과 끝의 순환을 무수히 경험하고나서 나는

이미 여러 생을 살아온 느낌이 든다.

어느 특정 시기의 "나"를 떠올릴 때면, 

내가 그러한 나와 동일인라는 것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아무리 나의 이야기라고 해도 

먼 옛날 타인의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이 같은 철저한 "타자화"는 그만큼 나의 인식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체의 변용을 점진적으로 진행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자신의 중요한 인생 터닝 포인트에서 몇 번이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갱신"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변용을 허용해 나아가는 과정

우리는 밀려오는 폭풍 속에서 과연 주체적으로 몸동작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이 시대의 폭풍은 바로 “기술”이다.

기술은 우리의 생활 패턴을 단숨에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지닌다.

 

그렇다면 기술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 도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이데거에게 도구는 인간의 실천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내며, 다른 도구와 사물, 행위와 목적을 잇는 연관망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구는 인간의 외부에 놓인 수단이라기보다,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깊이 관여해 온 존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도구는 인간이 자연의 무상함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함께 세계를 구성해 온 전우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맥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서 기술 매체가 인간의 확장을 가져왔다고 하였을 때, 

이는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오지만, 

인류의 발전사를 염두에 둘 때 그다지 생소한 주장은 아니다.

인간의 갱신과 변용과정

인간은 기술과의 협업 과정에서 자신의 갱신과 변용을 모면할 수 없다.

이러한 변용은 수동적인 소외와 박탈감의 단계를 넘어섰다. 

변용은 한 주체의 강렬한 진화 욕구에서 발아된다.

진보적인 인간은 이미 자신의 일부가 해체되거나 일그러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시급함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이미 시대에 앞선 신인류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의식의 영역에서)

이때 기술은 그것의 원초적인 존엄을 회복하고 "인간이라는 도구"(하이데거와는 다른 맥락에서)와 더 이상 구분될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게 된다.

기술이 인간을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드디어 기술로 인해 인간이 완성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보인다.

인간은 기술에 의해 온 세상을 입을 수 있다. 

이것이 사이보그의 종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때, 우리는 과연 일생 동안 몇 회차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지니: 변용>, AI협동작업, 2026

(연재중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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