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열매다,
공정이 결여된 땅에서 자란…
리은실
중국 국내의 한 관방매체에서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의 한국의 32강 탈락, 그리고 그 참패에 따른 격앙된 국민 정서, 험악해진 사회분위기 등등에 대해 쓴 논평을 읽었다.
한국 팬들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지만 경기의 패배를 다른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스포츠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고 이는 사회적 정서의 막무가내 분출에 가깝다, 경기에서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정서를 눅잦혀야 옳다, 한국 증시가 이렇게 좋은 상황에서 한국 남자 축구가 패배한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도 볼 수 있으니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받아들여라… 대체적으로 이런 내용이었다.
우선 경기의 패배를 한국 증시와 연결시켜 말한 것 자체가 저자가 지적한 ‘스포츠의 범주를 벗어난’ 문제이고 거기다 보태 꼬집자면 일단 저자는 한국의 근현대사, 그에 따른 국민성, 현재 한국 사회에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는 문제 등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글을 썼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똑똑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므로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다만 과정이 생략된 결과에 사람들이 얼마나 분노하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에 ‘공정성’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는 알 것 같다. 홍명보가 국가팀 감독으로 선발된 데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 이를테면 학연, 이권 카르텔 등등의 문제들이 있다고 기사에서 읽었다. 대중들은 경기 결과도 결과지만 그런 공정하지 못한 과정에 대해 더 분노를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축적된 분노, 그리고 그 분노의 이유나 맥락을 잘 헤아려 보지 않고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어딘가 섣부르다는 생각이다.
요즘 국내에 또 하나의 이슈가 있다.
풍소강(冯小刚) 감독의 새 영화 <특무를 잡다(抓特务)>의 상영 소식이다. 국내 유명가수 한홍(韩红)이 이번 영화의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한다. 영화 홍보 현장에서 한홍이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에게 호소했다.
번역을 해 본다면 이러하다.
“우리 북경 2천만 형제자매 여러분, 풍감독 체면 봐서 우리 힘 좀 실어 줍시다. 우리 영화 관객수 이끌어 봅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있게 되겠지요.(수익이? 영화 인기가? 아니면 주장하는 의리가?)”
이 한마디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스핀호, 틱톡, 쇼훙수 할 것 없이 이 홍보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문구의 앞에서 말한 ‘우리’와 뒤에 말하는 ‘우리’가 같은 ‘우리’인 것이냐? 우리가 왜 너희 같은 천만장자를 위해 그런 의리를 보여줘야 하는 것인가? 왜 너희끼리의 ‘정의’, ‘의리’(앞서 풍 감독이 한홍을 소개하기를 “한홍 선생은 특히 정이 많고 의리가 넘치는 분”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에 우리를 이용하며 우리에게 도덕적 올가미까지 씌우려 드는 것이냐. 서민들은 실업을 당했거나, 실업위기에 전전긍긍하며 채소 사는 돈도 쪼개 쓰는데 왜 너희끼리의 의리에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냐…
벌둥지를 쑤셔놓은 격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상상외로 강렬했다. 급기야 한홍이 최근년간 하고 있다는 자선사업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앞뒤 말이 맞지 않은데 조사해 봐야 하지 않는가? 등등의 의혹까지 불거져 나왔다.
급기야 인터넷의 ‘대통령’ 라영호(罗永浩)가 나섰다. 그는 대중을 비판하고 나섰다. 문제를 이렇게 부풀리는 것은 이지적이지 못한 표현이라고, 한홍 선생이 내뱉은 말 자체를 비판하기보다 외적인 문제까지 들먹이며 한 사람을 몰아가는 것은 ‘류망'스럽다(很流氓——옳지 못하다)고 했다.
이성을 잃은 분노는 파괴력이 크다. 그러나 둑을 허물고 밀려오는 홍수를 놓고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것은 창백하다. 그 분노의 이유와 맥락을 우선 짚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랫동안 중국의 영화계는 몇몇 거두들과 그 라인들이 장악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자칭 타칭 상류층들은 저들끼리 단단히 결속하여 견고한 성을 만들고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그 철옹성을 지켜왔다. 그로 인해 신인들의 설자리가 점점 줄어들어 열정과 능력이 있는 나젊은 영화인들이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그리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 할 빽과 인맥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서민들은 그 나젊은 영화인들에 자기를 대입시켰을 것이다. 점점 빈익빈 부익부가 가심화되고 있고 계층간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 그동안 믿어온 성실과 정직보다 더 강력한 “누구누구의 아들”, “누구누구의 조카”가 내 위에 군림할 때의 무기력함을 해소해줄 어떤 ‘영웅’의 출현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영웅’의 출현을 허락하지 않는 저 상아탑 속의 사람들이 나타나 ‘우리’라며 겉발린 말로 호소해올 때 무기력함은 재빠르게 분노로 변했을 것이다.
한국의 ‘홍명보’ 사태나 중국의 한홍 사태나 따지고보면 공정성의 문제이다. 기성세대의 가르침대로 성실과 노력을 믿었고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라는 격언을 믿었는데 어느 날 둘러보니 세상은 내 믿음과는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중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들의 분노에 옳고 그름을 논하고 훈계질을 하기에 앞서 제대로 된 공감과 이해가 우선되어야 했을 것이다.
습진에 걸려 고생했던 적이 있다. 못견디게 가려워서 참지 못해 긁고 나면 살점이 움푹 파여들어갔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연고 하나 처방해 주고 긁지 말고 양고기, 해산물 등을 먹지 말라는 말만 했다. 미친 듯이 가려운데 긁지 말라는 말은 너무 무기력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증상을 덮을 것이 아니라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을 제거했어야 했다. 다른 병원을 찾아서 중약을 한달간 먹고 다행히 습진은 나았다. 새 살이 돋아나 멀쩡해진 피부는 더 이상 가렵지가 않았고 긁을 일이 없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나올 때 “자, 이건 옳지 않아요. 다들 화를 참아보세요.”하는 비판이 꼭 마치“가려워도 긁지 마세요.”했던 그 의사의 당부 같다. 무기력하고 창백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분노를 불러오는 기폭제 같은 것이다.
나라 안팎으로 형세가 낙관적이지 않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고 실업인구가 대폭 늘고 있다. 그들이 정당하게 자기 정서를 터뜨릴 수 있는 통로는 많지 않다.
또한 유명하고 실력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인 추종을 받던 권위주의는 이제 끝났다. ‘진짜 권위’가 인정 받으려면 투명한 공정성 아래 대중에게 인정을 받아야 가능할 것이다.
‘이성을 잃은 분노’라는 ‘증상’의 이면에는 뿌리 깊은 질병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긁지 말라”는 제지나 단속이 능사가 아니다. 질병 자체의 뿌리를 파헤쳐볼 일이다.
한홍의 발언 소동으로 정작 주목받아야 할 풍 감독의 영화가 외면을 받고 있다. 시간을 내어 한번 성의있게 보려고 한다. 최근에 한국의 김민경이라는 한 유명 편집자가 그런 말을 했다. "대충 알고 좋아하고 잘 알고 싫어하자."
싫어하는 것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대충 알고 싫어할 게 아니라 싫어하기 위해서라면 일단 잘 알아야 한다. 싫어할지 좋아할지 다 알고난 뒤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