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게의 달, 바쇼의 발걸음

연못을 돌고 돌아 밤새도록


歌川広重,  <石山の秋月>,  1835

연휴의 소란함이 한풀 꺽이고 나면 그제야 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명절의 안부와 북적임을 뒤로 하고 다시 혼자로 돌아온 밤, 문득 에도시대의 우키요에(浮世絵) 거장,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그림 한 점이 떠올랐습니다.

「석산추월(石山の秋月)」라는 그림입니다. 1834~35년경 제작된 「오미팔경(近江八景)」 연작 중 하나로, 오늘날 시가현(滋賀県)에 해당하는 이시야마(石山)에서 바라본 가을 밤풍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화면 아래로는 고요한 호수가 펼쳐지고, 어둠 속에 산과 사찰이 잠겨 있습니다. 위로는 보름달 하나가 떠 있습니다. 극적인 사건도, 서사를 이끄는 인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

묵직한 산의 실루엣과 잔물결 그리고 둥근 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임에도 보는 이를 붙잡아두는 힘이 있는 그림입니다. 

저는 이 그림에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俳句)가 얹혀질 때 비로소 그 고요함의 깊이가 제대로 열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名月や 池をめぐりて 夜もすがら

명월이여 

연못을 돌고 돌아 

밤새도록

차오른 달을 바라보다가 밤새 연못가를 거닐었다는 바쇼의 짧은 노랫말. 

제가 이 조합을 좋아하는 까닭은, 정작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흔들린 것은 달이 아니라 그 아래에 서있던 인간의 마음이었습니다. 

달은 누군가를 부르지도, 어디로 가라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떠 있을 뿐인데, 인간은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생각에 잠기다가 결국 밤을 통째로 내어주고 맙니다. 

히로시게의 그림과 바쇼의 하이쿠는 같은 달을 바라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층위를 보여줍니다. 히로시게의 화폭이 달 아래 고요히 숨죽인 정물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바쇼의 시는 그 고요함 앞에서 서성이는 한 사람의 서사를 일깨웁니다. 

추석은 지나갔지만 달은 여전히 떠 있습니다. 히로시게의 달을 마음에 담고, 바쇼처럼 그 아래를 천천히 거닐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면 달은 어느새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잔물결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아무 말 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이 글을 공유하기: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