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가 목가할라 가자

[우리나무 함께쓰기 · 26개의 키워드: 옥수수밭]


동북도 이젠 여름 기온이 산산하게 35도(℃)를 넘어간다. 동북이 시원하다는 소문을 믿고 피서하러 온 사람들이 데비 더비를 먹을 판국이다. 한국에 계신 우리 어머니도 올해는 손녀딸을 더위 고생을 시키지 않는다면서 쿵툘(空調)을 설치하라고 전용자금까지 보내왔다. 작년 여름에 애엄마가 아파서 상해의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나도 병원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같이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돐도 안된 손녀딸을 혼자 돌보게 되었다. 하필 그때가 제일 더운 때라… 집안에 가만히 있어도 땀이 좔좔 흐를 정도였다. 훈춘의 여름이 덥기야 이렇게 더울 줄을 어찌 알았으랴. 애를 돌보랴, 집을 걷을랴, 또 자란과 애 먹을 것도 장만하랴… 게다가 기 딱 매키게 덥기까지 하니 지금 생각해도 정신이 아득하다. 

지난 여름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겠건만, 그래도 더워서 축 늘어진 손녀딸이 더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 당시에도 쿵툘을 당장 사놓고는 싶었지만, 업체에서 폭주한 쿵툘 주문을 미처 재재기하지 못하여 주문해도 한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한달이면 여름도 다 지나갈 판국이라, 쿵툘을 설치해봤자 먼지만 먹일 노릇이였다. 그래서 작년에는 쿵툘 설치를 그만 두게 되었지만, 올해는 기필코 영 덥기 전에 쿵툘을 설치하라면서 어머니께서 신신당부를 한다. 친히 돈까지 보내 주시는 데, 그 말씀에 따를 수 밖에야 더 도리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올해 여름부터 우리집도 “랭방 가능”한 집이 되었다.

옛날의 여름은 이렇게 까지 덥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어릴적 우리 집은 큰강 여갈의 마을에 있었다. 큰강의 공식적인 이름은 훈춘하이지만, 마을에서는 모두 큰강이라고 불렀다. 실제 발음은 “큰가”에 가까운 큰강은 마을의 남쪽에 있었고, 거기까지 가려면 넓은 옥시밭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큰강 너머는 바로 훈춘 시내였다. 

내 기억에 그때(2000년대)의 여름은 30도가 넘는 날이 별로 있은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덥다면서 쩔쩔 맸다. 아직 집집이 선풍기도 변변하게 갖추지 못한 세월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여름방학이면 우리 어린애들은, 물론 죄다 선선아들임, 더비를 잊고자 날이면 날마다 무리지어서 큰강으로 향했다. 누군가 “큰가목가할라가자”고말하면너나할것없이큰강으로갔다. 우리는 오전에도 가고 오후에도 갔고, 어떤 날은 심지어 저녁에도 갔다. 큰강은 우리에게 더위를 날려 보내는 물놀이터 그 자체였다. 요즘에는 정말 어쩌다 한번씩 작정해야 물놀이터에 가지만, 문표가 비싸서일 수 있다, 그때의 우리는 정말 큰강이라는 물놀이터에서 살다 싶이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덥지도 않은 세월인데 말이다. 낮물은 정말 시원하고 밤물은 정말 따뜻했다. 초중에 다니니 물리에서 비열이란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했다. “물의 비열이 높기에 같은 열량을 흡수할 때는온도가천천히 올라가고 방출할 때는 온도가 천천히 내려간다”. 초중 물리 시험지의 간답 문제 답안을 이렇게 작성해 본 생각이 난다. 그런데 갑자기 웬 물리 얘기?

수영복이란 개념도 잘 모르던 세월이라 모든 사람은 빤즈바람에 헤염쳤다. 아직 물이 서툰 어린 패들은 포말(泡沫)상자 쪼각을 배에 대고 얕은 물에서 개발헤염이나 치면서 어스벴고, 좀 큰 좀패들은 물속헤염이나 배영을 치면서 재간을 피우기도 했다. 큰강 건너에는 해볕 쪼임을 할 수 있는 모새불이 있었다. 큰강을 건너야하다니 그곳은 실력자들만을 허락했다. 헤염이 서툴었던 나한테는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다. 언젠가 나도 큰강 건너의 모새불에 지써어 누워서 해볕쪼임을 즐겨보리라고 다짐도 해보았지만, 끝내는 그런 개팔자를 누려보지 못하고 여름방학은 끝나 버렸다. 

산량때문에 한전에는보통 메옥시를 많이 심는데, 큰강 가는 길가의 밭에도 메옥시가 심겨졌다. 자란들은 메옥시를 또 따마야라고도 불렀다. 어릴때는 똑똑히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후에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따마야(大馬牙)가 한자로 큰 대大, 말 마馬, 어금니 아牙로 되어 있었다. 옥시알이 말의 이빨처럼 굵어서 붙어진 이름인가 싶다. 메옥시는 옥시알 껍지가 어지간히 두꺼운 것이 아니여서, 사람이 먹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대부분은 사료로 사용한다. 물론 이건 배부른 세월인 지금의 얘기다. 량식이 없어 고생할 때에는 그런 메옥시도 없어서 못 먹었다고 한다. 메옥시 갈그로 한 옥시꿔테(鍋貼)가 어떻게나 깔깔하고 맛없는지를 먹어는 못 봐도 얘기는 들어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어릴때의 나에게는 옥시는 엄연하게 돼지 먹는 메옥시와 사람이 먹는 찰옥시로 나누어졌다.

그러던 어느해인가 큰가 가는 길가의 밭에 메옥시가 아닌 찰옥시를 심겨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찰옥시 장시로 푼돈이나 좀 벌어보려고 한 노릇인 것 같다. 지금도 삶은 찰옥시는 시장에서 인기 상품이 아닌가. 그러나 다소 외딴 길역에다 찰옥시를 심은 것이 실책이라면 큰 실책이였다. 변변한 간식거리도 없는 애들이 어찌 찰옥시를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큰강 기슭에는 물에 떠내려온 나무가지나 뿌리 같은 것이 많았다. 그걸 줏어서 모닥불을 피우면 옥시 구벅질을 하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그렇게 옥시가 하나둘씩 여물어 가면 우리한테 하나둘씩 뜯겨 나갔다. 그 다음해부터 다시 메옥시가 심겨진걸 봐서는 밭임재가 적잖이 애를 먹은 모양이다. 그러나 오해 마시길. 제집에도 있는 찰옥시를 애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었겠는가. 펀한 길역이라 진정한 옥시 도둑들이 많이 접어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젠 다 옛말이 되었다. 몇십년 동안 출렁인 도시화의 물결이 끝내는 이곳까지 덮쳐 버렸다. 개발구(開發區)를 앉히기 위해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불도저에 밀렸고, 누군가의 치적?(이 기간의 서기노릇 한 량반이 들갔더라)을 위해 큰강은 강변공원으로 대변신을 했다. 큰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세개나 세워졌고, 강변의 땅은 노른자 땅이 되어 고급아파트들이 쭉 들어 섰다. 큰강의 섬에는 심지에 놀이동산까지 생겼다. 더이상 옥시밭을 지나 “큰가 목가할라 가자”는 애들이 없다. 올해의 여름도 저물었다. 밤이면 제법 쌀쌀한 가슬바람이 불어댄다. 여름의 끝자락에 소시적의 추억을 그리며 몇자 적어 본다. 이제 딸애가 커서 큰가 가서 목가하고 옥시나 굽어먹던 얘기를 해주면 뭐라할지 궁금하다. “집에서 시원한 쿵툘바람이나 쐬지않고 어째 밖에서 놀러다녔슴까?”하고 묻지나 않을까? 딸녀석이 조선말로 물어온다면 정말 뿌듯할 것 같다. 

아무쪼록 딸덕분에 이번 여름은 쿵툘바람으로 시원한 여름을 났다.

이 글을 공유하기: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