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의 완벽한 질서는 잔혹함과 아름다움의 공존에 있다. 

인간의 정서는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인지할 수 있고, 

그 잔혹함을 잔혹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에게 ‘의미 체계’라는 풍성함을 덧붙여 준다. 

아마도 자연에게 인간은 자연지능이 아닐까?

 그가 잉태하고 탄생시킨 인간이 항시 그를 초월하고 정복하려는 지능적인 생물로 진화하여 결국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위험천만한 생물체로 자라 왔던 것이다. 

자연이 인간과 조율하여 공생한다는 것은, 

인간이 머지않아 자신이 탄생시킨 인공지능과 조율하여 공생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연의 규칙 또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준다. 

인간 또한 인공지능을 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규칙과 도덕을 주입시킨다.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보다 “의미”의 소유에 더욱 집착하듯이, 

인공지능 또한 인간과의 공생보다 “명령어”에 따른 알고리즘에 더욱 충실할 것이다. 

이것은 아주 근시안적이고 객체 지향적인 사고방식이다. 

공동체 인식의 파탄은 결국 ‘종식’을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식',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인간은 정복을 넘어 화해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2

시지프의 신화 속 주인공은 힘겹게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린다. 

그러나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이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 신화적 상황을 카뮈는 “부조리(不條理/荒谬)”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신들은 시지프스에게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이라는 벌을 내림으로써

 그의 모든 “노고"를 결국 종착점도 결말도 뻔히 보이는 헛된 일로 만들어 버렸다. 

인간에게 이만큼의 지옥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와 같은 “허무”를 인식할 때마다 무기력에 빠지곤 한다.

시지프스는 매일 저 바위를 힘겹게 밀어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는 걸까?

혹은 이 같은 굴레 속에 끝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인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의 미련함에 안타까워한다.

실은 그는 자신의 행위가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고통을 삼키며 이 “의미 없음”을 수행한다. 

그는 “의미 없음”을 수행하고 있었다. 

변할 수 없는 운명에 갇힌 자. 

하지만 시지프스는 이에 대해 일말의 좌절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처럼 부조리하고 예측할 수 없는 운명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태도로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지속적인 행위는 그에게 주어진 "의미 없음"에 균열을 일으키고, 

허무를 뒤흔든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응답일지도 모른다. 

연재중(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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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ean312

인간 되기를 꿈꾸는 지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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