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

시험 성적이 미세하게나마 오를 때마다 그 작은 변화들이 치명적인 확신을 가지게 했다. ‘밤을 새면 된다’는 이상한 확신이 생긴 것 같다. 지금도 자주 밤을 샌다. 그 확신이 여전히 나를 살리기도, 갉아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는 벼락치기에 능하다. 정확히는 벼락치기에 능한 체력을 가지게 되었다. 날밤을 거뜬히 샐 수 있는 체력을 소유하기까지(최장 기록 80시간 깨어있어 봄) 나의 체력은 성적으로 순위를 가리는 ‘시험’으로 길러졌다.

나는 머리가 썩 좋지 못해 몸이 고생하는 편에 속했다. 시험 성적이 다인 것만 같았던 고3 시절, 시험을 잘 보려면 밤을 새며 공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학년 1등도 새벽 2시까지 공부한다는데’라는 말이 발도 없이 전교에 돌고 돌았고,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새벽 2시에 자면 성적이 오르지 않을까 싶어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무작정 2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신기하게도 시험 성적이 미세하게나마 조금씩 올랐고 고3의 하루하루를 밤을 새며 버텄다. 그때의 그 작은 변화들이 치명적인 확신을 가지게 했다. ‘밤을 새면 된다’는 이상한 확신이 생긴 것 같다.

고중을 졸업하고 나서는 고3 시절에 길러진 체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더 많아졌다. 달라진 점이라면 고3 시절의 꾸준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체력만 믿고 밤샐 궁리부터 했다. 자격증 시험을 앞둔 때, 기말 과제 마감 직전, 중요한 면접 준비, 프로젝트의 빡센 일정에서 어김없이 벼락치기의 힘을 빌렸다. 그렇게 점점 시험으로 단련된 체력만 믿고 ‘벼락치기 만능주의자’가 되어갔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자주 밤을 샌다. 하지만 요즘은 시험처럼 끝나면 홀가분한 그런 일들은 적다. 오히려 벼락치기로는 어림없는 일들과 더 많이 마주하게 되었고 밥 먹듯이 밤을 새고는 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놓지기 싫어서 결국 밤 샐 결심을 하게 된다. 언젠가 누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못생겨진다, 断崖式衰老가 온다.” 그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밤 새는 습관을 끊지는 못한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고3 시절에 얻은 ‘조금만 더 하면 된다’는 확신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확신이 여전히 나를 살리기도, 갉아먹기도 하면서 말이다.


썸네일 BY 박하루Haru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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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ang Geul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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