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아론'(信达雅论)이라고 있다. 근대 엄복(严复) 선생이 한것으로 유명한 번역에 대한 얘기다. 얼핏 봐서는 신들렸단 건지 덩달아 안달이 났다는 건지 모를 애매모호한 이 용어를, 나는 참(信), 결(达), 멋(雅)으로 나름 풀이해서 이해한다. 

严复

아래에 '우리'라고 부를 조선족 글과 문학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번역 얘기로 말머리를 뗀 것은, 조선족이라는 언어배경과 입장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최근 들어 드는 한 생각 때문이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에 가득찬 생각들을 문장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만큼 머리안의 뭉치들과 마음속의 이미지들이 문장으로 옮겨졌을 때 어딘가 낯설어져있고 달라져있는 즉 “번역되어있는” 경험들을 누구나 다소 했으리니 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이러한 번역이라고 한다면, 그건 역시 참과 결과 멋을 좇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여 참, 결, 멋의 세계를 말꼬로, 한 80후 조선족 청년의 눈에 비친 우리 글의 오늘의 모습과 그가 앞으로 따르고자 하는 모습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번역에서 참(信)은 원문에 충실해야 함이다. 그러면 글쓰기의 참은 무엇일까. 우리의 마음과 머리의 생각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원천이자 토양인 현실의 삶, 그것이 '원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글은 조선족사회의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을까. 개인적으로 여러 조선족매체의 글들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편이다. “야~ 역시” 하고 속이 후련한 글이 많았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오, 이런 일도 있나보다” 라고 스치거나 지어는 아무 생각없이 건너뛰는 글들이 훨 많다. 내 얘기를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몰랐던 이야기를 재미있거나 깊이있게 해주고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내가 이상한 놈인가. 허나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가끔 이런 얘기를 꺼내도 반응들은 비슷하다. SNS의 세계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뚜렷하다. 왜냐하면 공감이나 정보나 반짝임이 없는 글들은 아예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삶에 뿌리를 두고 쓴 글들은 그 자체로 참한 글이다. 그러한 글은 완성도를 떠나서 소중하다. 하지만 개개의 글들이 모인 글의 세계 역시 참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의 세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공간으로서의 매체가 그러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시사, 유명인, 이벤트, 광고 글이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 많은 감이 있다. 서민의 삶을 그린 소설, 수필이나 취재기사도 조선족 집거지역이나 한국생활에 너무 집중되어있지는 않은가. 

오늘날 조선족의 삶의 양상은 다양하다. 국내 집거지와 한국을 제외하고도 관내 대도시와 미국, 일본, 유럽, 동남아 등 없는 곳이 없으며, 진출형태도 단순한 노무수출만이 아니라 해외파견, 다국적기업, 이민, 진학 등으로 다양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 글의 세계에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집거지와 한국의 모습이라도 여러 분야로 다양할텐데 고향의 해체와 한국사회와의 모순과 같은 이야기만 두드러지지는 않은가. 천편일률이라 하면 과한가. 그래도 이 표현에 가닿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010년 전국인구조사 수치를 기준으로 관내 경제중심지역의 조선족인구는 14.5만을 넘어섰다. 한국이외의 해외 집중지인 일본에는 6-7만명, 미국에는 2-3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니, 이 세 지역만 해도 22.5-24.5만명을 넘어선다. 전체 인구의 12% 이상이다. 조사후 열번째 해를 넘기고있는 지금은 더 늘어났을것이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과연 우리 글의 세계는 참한가. 

번역에서 결(达)은 번역문으로서 순해야 함이다. 글쓰기의 결은 한마디로 잘 읽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글의 결이 바르지 않으면 읽는이의 마음에 가닿는 과정에 삐끄덕댄다. 여기에는 문장력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글의 문체와 화법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참하냐는 기준에서 조금 기우뚱한 듯 보이는 우리 글의 세계에는 결이 바르지 않은 글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전형적인 경우가 전문가들의 글이다. 가끔은 칼럼이라는 이름을 하고있는 이런 글들이, 전문가들이 자신의 비전문분야에 대한 논평일 때도 많다. 그건 그래도 괜찮다. 그 자리에서 그러한 발언권을 부여받았다고 납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대중의 시야에 드러난 글의 내용은 둘째치더라도, 글의 화법은 거칠다. 연륜과 경력을 쌓은 이들로서, 수직적인 계획경제시대에 청장년을 보낸 이들로서, 여러가지 구호를 웨치는데 귀가 익은 이들로서는 어쩌면 그러한 표현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읽는이로서는 그 훈시조(调)의 정보가 소통을 거부하는 거부기 등껍질처럼 딱딱하기만 하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읽는이에게 와닿는 도중에 글의 굽은 결을 따라 빗나가기만 하는 듯싶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글쓴이와 읽는이가 대등하다. 아니, 읽는이가 주도권을 가지고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엘리트의 글쓰기라고 해서 개인의 틀을 벗어나 민족이나 사회 운운할 때에 신중성을 제쳐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번역에서 멋(雅)은 번역된 문장이 아름다워야 함이다. 글쓰기의 멋도 이에서 많이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실생활에 넘쳐흐르는 여러가지 생각과 움직임들, 그것들을 다루고 글로 써냄으로써 더 나아보이는 방향을 여럿 제시하는 것, 우리 사회의 건전한 토론문화를 일구어나가고 더 아름다운 내일을 꿈꿔볼 수 있게 하는데 글쓰기가 빠질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글의 내실을 다지는 건 쉽지만은 않다. 때문에 낯선 이론이나 용어를 남발하는 겉멋과 남의 것을 자기 것인양 옮기거나 따라하는 뱁새멋은 글의 세계에 항상 있어왔을 법한 것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글들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자극적인 묘사들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간 글이라든가, 대사들이 어중간한 문체에서 질주하고 있는 글이나, 첫째 둘째 셋째를 당당하게 나열하고 있음에도 읽고나면 무얼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글이라든가… 

이렇게 혓바닥을 놀리기는 쉬워도, 글쓰기에서 참과 결과 멋을 좇는다는 것은 어렵다. 다만 이런 얘기를 서로 주고받지 않는다면 점점 더 여려워질 것만은 분명하니, 참에서 출발하고자 애쓰면서도 결이 뒤틀리고 멋적은 이런 글을 지금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최근에 기쁜 움직임들이 보인다. 위챗 공식계정이라는 플랫폼의 출현으로 같은 방향으로 달음박질하고 있는 이들도 만났다. <지행자>, <몽실이, <글밤> 같이 아직 적지만 참된 벗다운 계정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더 다양하면서도 진실한 우리의 삶의 현장을 발신하고 있다. 또한 '팔구쟁이'와 같은 위챗그룹도 생겨서 여러 지역에 흩어져 각자 글쓰기를 하던 8090 세대들, 그리고 작가협회와 조선족매체들까지 함께 소통할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우리 말 글쟁이들의 참이 어떠한지, 어떤 가능성들이 열려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아직 목적지와는 멀 수도 있다. 중국어로 된 1000만개 이상의 위챗 공식계정, 백만 단위의 온라인열독물 작가인구, 석박사와 업계 경력자가 함께 팀으로 창업하여 양질의 글들을 생산해내는 유명 계정(大象工会, 咩咩说, 一条 등)들의 시스템에 비하면 거리가 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힘을 얻는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고프다. 참과 결과 멋을 겸비한 글에 고프다. 지구 방방곡곡에 널려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부딪치고 부대끼고 그러면서도 부러움없이 '나'의 존엄있는 삶을 지켜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고프다. 그리고 결맞춰 아름다운 글을 공유하는 '우리'들의 대오에 고프다. 

<도라지> 2019년 제5호 '80후'시선’에 게재

(맞춤법과 극소수 표현은 발표원문과 약간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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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떠돌면서 듣고 모으고 배우는, 이야기 "꾼"이 되고싶은. 연변, 북경을 거쳐 교토에서 고전과 씨름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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