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오감은 어느 정도 무뎌져야만 일상이 가능해진다.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민감하게 반응 한다면 나 자신은 너무 빨리 소진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그토록 냉정 해질 수 있는지 의문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비이성적이고 잔혹한 현실들로부터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본능적인 자기 보호 기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비판이성>에서 세계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한 것일까?
"무뎌진 감수성" 에는 그 어떤 이상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욕구인 "생존"을 위한 결과다.
따라서 그 속엔 아무런 즐거움도 없으며 그 즐거움에 대한 의미 부여도 가능할 수 없다.
세계를 이상화하려는 욕구와 그러할 수 없는 세계의 민낯을 마주 할 때, 우리는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들 속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좌절을 경험한다.
이 과정을 관통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슬픔, 그것이 아마도 벤야민의 멜랑콜리 개념의 참된 접근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학술보다 예술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유는 "나"라는 구성체가 예술로 규정되고 있는 유기적인 신체와 더욱 닮아 있기 때문이다.
순수 예술적 삶을 추구하는 자의 세계는 겉보기에 아름답고 빛날지라도 그 세계의 운행 방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와는 많이 다르다. 따라서 순수성을 고집하는 사람(예술가에게만 해당 되는 것은 아니니까)일 수록 세속의 이치를 따라가는 것이 더욱 어렵다.
그래서일까?
나는 몇 년 동안 세상의 이치를 무척이나 잘 따르려고 애를 써왔던 나 자신을 보며, 내가 왜 예술인으로서의 영혼을 되찾지 못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이유는 너무 명백하다.
예술의 삶과 세속의 삶을 통합하려는 나의 야심 찬 의지가 되려 나를 이도 저도 아니게 만들었던 것이다.
예술인으로 자칭 해 온 나에게 그 "현실"이라는 것은 매 순간 강력하게 덮쳐 오는 것만 같았고 나의 몸과 마음은 제 아무리 잘 조율해보려고 해도 본능적인 거부 반응과 의도치 않은 경련만 일으키고 말았다.
통합될 수 없는 양자를 화해 시키려고 했던 나의 오만한 시도 속에서 결국 내가 쪼개지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기력과 기억 모두를 소진해 버렸다. 겁도 없이 덤볐던 것이지…
나는 예술의 삶과 세속의 삶의 밸런스를 조율하는 일이 나를 소진할 만큼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그 결과로 나는 대다수 중국 청년들이 앓고 있는 고질병인 의욕 상실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성은 나의 생계 유지를 위하여 여전히 작동한다. 그렇다고 마음마저 설복된 것은 아니다. 일으킬 수 없는 마음 상태는 나를 쇠약 시키며 삶의 의욕마저 없애는 방법으로 "불쾌"를 표출한다.
자신이 늘 유쾌하다고 찰떡 같이 믿고 있었던 나에게 사실 나는 단지 유쾌해지려고 온갖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이라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나의 생각들을 기록하면서 거의 두 시간이나 병원에서 대기했다. 드디어 나의 차례다.)
나: 의사님 저는 도대체 왜 기분이 다운되어 있을까요? 저는 기뻐지려고 엄청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통 기뻐지지 않아요.
중의원 의사님: 네, 뭐 요즘 기뻐질 일이 정말 별로 없죠.
나: 의사님 저는 도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건가요? 이러한 증상들을 통틀어 뭐라고 부르나요?
중의원 의사님: 气郁。
하… 실은 비난이 아니라 달래줘야 했던 거였구나…
그것도 모르고 의욕이 없는 나를, 예술인의 영혼을 상실한 나를 원망하기에 급급했었네!
여태까지 자신과 싸우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았고,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해왔어. 언제 어디서든 진리 추구에 대한 사색을 끊임없이 해온 것이 자랑스럽고 어둠 속에서 산산조각이 되어버리고 에너지를 탕진하여도 여전히 희망을 희망하는 너가 참으로 대견스럽고 감사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