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계된 미래
나는 철도 공무원으로 한 생을 바친 부친과, 병원 간호사로 삶을 불태운 모친 사이에서 연길에서 태어났다. 친가와 외가, 그러니까 조부와 외조부를 비롯하여 양친의 형제자매 대부분은 음악관련 종사자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때로부터 거의 매일 ‘연습’이라는 못마땅한 시간을 버텨야 했다. 인고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 날들을 끝낼 수 있었던 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첫번째 중간시험에서 반 4등이라는 예상치 못한 쾌거를 거둔 사건에서 모든 게 바뀐다. 그 이전까지 나 본인은 물론 부모 또한 나를 공부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학급 60명 중 56명을 재낀 거다. 사건이였다.
그때로부터 내 삶의 노선은 부모에 의해 새롭게 세팅된다. 어릴 때부터 지속해왔던 음악레슨은 이로써 끝난다. 레슨선생은 가정학습교사로 대체된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가정방문교사한테서 공부를 지도받는 것이 예전 주1,2회 음악레슨을 받으러 가는 것과 시간면에서는 변함이 없었지만 난 그래도 방문학습이 더 좋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습이 싫어서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중점고중이 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공부의 길?로 전향한다. 당시는 부모의 목표가 곧 나의 길이였기에 ‘우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소위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해 학기말에는 3등, 그 이후에는 전학년 석차 ‘30위권 내’라는 안정권에 진입하면서 3년을 보내다가 중점고중?에 진학한다.
2) 자발적으로 음악을, 성적은 최하위로
고중에 입학하여 1년은 그럭저럭 지냈다. 바야흐로 변화가 찾아온 건 2학년이 되면서였던걸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친구의 설교로 롹이란 걸 알게 되었고, 그 교리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헤비메탈이라는 장르다.) 그 친구는 자주 나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나는 비디오를 통해 그들이 뿜어내는 소리에 매료된다. 그리고 장발로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그들을 닮고싶다는 욕망이 싹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매료된 그 소리가 일렉기타 음색이라는 걸 알게 된다. 헤비메탈밴드의 기타리스트! 그렇게 ‘나’의 목표가 정해졌다. 이번엔 ‘우리’가 아닌, ‘나’의 목표였다. 그리고 강압적이 아닌 자발적으로 가져본 생의 첫 꿈이였다.
그때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은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기대를 잔뜩 품었던 부모의 절망 장면을 나는 목격했고, 모의고사 시즌에는 담임선생의 호출에 학교를 찾아온 부모와 복도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암울하기도 했지만 나는 정신승리로 넘길 수 있었다. 나는 롹커가 될 거니깐.
훗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내가 또래 남학생들처럼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지 않았다고 회상하곤 했다. 대부분의 남자애들이 반항적이라는 중2, 3시절에 당신의 아들은 자기주도적으로 공부를 찾아 하는 모범생이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몰랐을까? 잊었을까? 나의 사춘기는 고2, 3에 찾아왔다는 것을… 그때 어머니는 자주 눈시울을 적셨고 아버지는 자주 분노에 차있었다는 것을… 늦바람이 무섭다. 내 사춘기는 중2가 아니라 고2였다고 어머니 아버지 두 사람께 알려주고 싶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가 없다. 이제 그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나갔다.

3) 내면의 막연한 또 하나
그때그때 통과해야 하는 몇몇 의례적인 삶의 제도로부터 탈주하지 않은 것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비주류를 선망하는 듯 했으나, 결국 난 항상 주류에 편승해왔던 것 같다. 어찌 됐든 난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 한반 동창들은 거의 대부분이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양친은 만족해했다. 막바지에 그래도 정신 좀 차려서 본과는 갔다고 어머니는 남들과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난 명문대에 간 한반 친구들을 부러워하거나 대단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생각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부에 주력했더라면 나 역시 명문대에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였으니깐 말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일상생활은 지루할 새가 없었다. 그때쯤 나는 진작 기량이 꽤 훌륭한 맴버들을 만나 헤비메탈 밴드를 결속했고, 밴드 운영에 한창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다. 나만 학생이였고 다른 맴버들은 백밴드 출신들이었다. 백밴드(background band)는 나이트클럽에서 여러 가수들을 반주해주는 반주자들이다. 당시 밤무대 현직 반주자 대부분은 밤무대를 생업으로만 생각했고 자신의 음악적 가치실현으로는 간주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음악적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자기 밴드를 갖는 것이 꿈이였다. 그들은 백그라운드(배경)라는 자신의 역할에, 그리고 지시에 따라 온갖 장르를 꾸역꾸역 반주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헤비메탈이라는 나와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뜻이 잘 맞았다. 의기투합하여 낮에는 합주 연습을, 밤에는 밴드 운영경비를 위해 밤무대를 뛰었다. 그리고 늦은 밤 각자 집에 돌아가서는 동 틀 때까지 개인연습에 몰두하곤 했다. 주기적으로 상업공연도 나갔고 지방TV출연도 나갔다. 나는 매일이 바빴고 행복했다. 곧 앨범도 내고 콘서트도 하고 세계무대에 진출할 날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일상은 보람찼지만, 본업인 학업에 재미를 느껴본 적은 없다. 학교생활은 뒷전이었다. 대학 3학년이 끝날 때쯤이었을 것이다. 부득이 제출해야 할 과제 때문에 <세계사진사> 교과서를 무심하게 뒤적이던 나는 어지간히 놀랐던 적이 있다. 책 속 도판들은 여태 화보나 엽서에서 봐왔던 ‘아름다운’ 사진들과는 많이 다른, 정말로 ‘못 찍은’ '이상한' 사진들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못 찍은’ 이상한 도판들이 예술의 역사에서 빼놓고 거론될 수 없는 유명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혼란에 빠진다.
당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던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그리고 교수 이 교수가 내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들은 내 오랜 절친이 분명하다. 와의 집요한 대화를 통해서 관습적이고 협소했던 나의 미적 판단기준을 자각한다. 한편 정형화된 인식틀 밖의 새로운 예술세계에 대해서도 경이로움을 느낀다. 아울러 ‘그 분야’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그 분야’가 바로 미학이나 예술이론과 같은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때는 갑작스레 한꺼번에 궁금증들이 몰려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요했다. 그렇게 몇 년 만에 책을 들게 된 것이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은 기타를 들고 지냈다. 그렇게 독서를 통해 여러 가지 파편적인 상식들을 접하면서 사진뿐 아니라 헤비메탈 나아가 현대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본질상 철학, 미학 등 인접 학문과의 관계 안에서 엮어진 복합적인 세계라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된다.
4) 한계에 대한 자각
나의 취미는 ‘옛날 일 생각하기’다. 나는 과거를 좋아한다. 과거 속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욕망이 파묻혀있다. 한때는 나에게 전부였지만, 그러나 지금은 다른 것들로 대체돼버린, 그래서 폐기돼버린 욕망, 그리고 한때는 그것들을 위해 훈련된 능력들이 숨어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구원해달라고 속삭이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에, 이미 죽은 것이기에, 그래서 쓸모없다고 믿기에 우리는 과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도 종종 지난 시절을 회상해본다. 만일 내가 미학이나 예술론과의 인연이 이뤄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롹커 내지는 음악인의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프로의 세계는 냉혹하기도 하지만 신묘하다. 가령 동년배들 속에서, 혹은 한 지역에서 내노라는 탑으로 군림한다해도 그들은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무의식적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모두 잘 알고 있다. 자기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의 용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고수라고 칭송받는 사람들은 자기 그릇의 테두리를 남들이 알 수 없게끔 베일로 잘 덮어놓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한 마리 용 같다고나 할까, 용은 때로는 머리를, 때로는 꼬리를, 때로는 등허리를 우리한테 보여주지만 구름을 걷어내고 자기의 전체를 열어서 보여주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연습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취미생활의 세계에서나 통한다. 연습만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게 있다. 난 그걸 꽤 일찍 알아버렸다. 극복할 수 없는 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1년이 좀 넘어 팀은 해체되고 나는 상해의 한 주간지에 계약직 사진기자로 취직한다. 한편 나는 새로운 팀을 시작했지만 이때로부터 내면의 저울질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앞으로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나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을 능력도, 감출 수 있는 재주도 부족했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은폐할 줄 아는 것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기량이다. 그렇게 나는 항상 아마추어 반열에 머물러있었던 거다.
2000년대 중반은 超級女声을 비롯한 서바이벌 오디션들이 등륙하던 시대였다. 전국에는 크고 작은 서바이벌 오디션들이 펼쳐지고 있었고 스타지망생들은 그 속에서 각축장을 펼쳤다. 나는 새로운 밴드 구성원들과 세류에 휩쓸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 참가한다. 동상이몽으로 급조된 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대를 마지막으로 난 팀을 퇴출한다.
5) 그 이후
학부 시절부터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예술론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나로 하여금 또 다른 길을 결심하게 만든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구인모집을 통해 좀 거창한 표현으로 중국조선족 유일예술이론전문지에 기자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 해 뒤 언론출판계통의 미술부로 옮겨가면서 기자로서의 생활을 몇년간 이어갔다. 이 시절 나는 예술론에 관련된 글들을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가깝게 접할 수 있었고, 이런 기회는 나의 지식욕을 한층 더 자극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전문지식의 내부에 더 깊이 침잠하고 싶은 마음에서 2010년에는 공직을 버리고 서울로 떠났다…
이제 나는 이곳에 온지 만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예술이론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그동안 나는 결혼식을 치뤘으며 아이의 돌잔치를 치뤘고 양친의 장례식도 가졌다. 그렇게 인생의 의례를 통과해갔다. 20여년전 나는 무대에 서기 위해서 무더운 여름날 웃통을 까고 팀원들과 합주 연습를 했고, 지금 이 시각 또한 내일 서게 될 무대를 위해 수면양말을 신은채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대 위에 있다.
ps: 서울에서의 15년은 추후 구체적으로 써볼 생각이다.

재밌게 읽고 딴소리 한마디: 마포구 어느 순두부맛집에 가면 가게의 한 면을 씨디와 엘피로 가득 채우고 메탈리카 피규어도 좌우대칭으로 한개씩 진열한 진정한 아트월이 있더군요. 갈때마다 사장님이 선곡한 옛날 한국노래 외국노래가 흐르고. 그걸 들어야 매일 순두부를 만드는 일상을 견딜 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어느 사장님께서도 못 다 이룬 음악인의 꿈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아다먹끼의 자서전이라니 오랫만에 정말 반갑슴다. 항상 신비한 베일에 가려진 듯한 이 멋있는 “용龍”모를 이제야 시원하게 볼 수 있게 되어서 셀레네요. 이토록 여운이 남긴 “무대” 개념의 변천사는 또 처음입니다. 무대여 영원하라!
응원 고마워요~~^
아다먹끼님의 我的前半生 잘 읽었음다 , 혈기왕성했던 20대 아다먹끼의 용감한 도전에 박수를 👏👏👏 밴드로써 성공못했지만 , 그 추억은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페지로 남아있을듯요 ~후속작 “한국에서의 15년 ” 기대함다
내 여신은 앞날을 바라보며 삽데다 나도 옛날에 멈춰있기를 좋아하지만……아다먹끼의 미래의 무대를 기대해보겠음다.
다양한 경험을 했을것 같슴다. 지금도 충분히 여러가지 경험을 하고 있을거고, 응원 할게요~
아다먹끼가 아다먹끼했슴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