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에는 이럴 것이다.”
이 말은 생각을 거친 문장처럼 들리지만, 이런 추정에는 사고과정이 필요하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익숙한 경험만으로 결론부터 말한다. 사람은 생각 대신 자기에게 말이 되는 설명을 고른다. 그 설명이 맞는지 틀린지보다 내 경험으로 말이 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추정은 깊어서가 아니라 빨라서 기본적 사고가 된다. 빠르다는 것은 편리하다는 뜻이지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다. 서운함은 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린 말투에서 온다.
내가 학교폭력을 말하면 누군가는 곧바로 묻는다. “니가 뭘 잘못해서 맞은 것 아니야?” 폭력의 사실보다 먼저 피해의 자격이 심문 된다. 맞은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면, 때린 사람의 선택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 말은 조언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앞으로 조심하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고, 상황을 균형 있게 보려는 태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듣는 이에게 그 문장은 다른 뜻으로 도착한다. 네가 맞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가해의 문제는 태도의 문제로 바뀌고, 고통은 해명이 된다. 나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변명을 준비해야 한다.
내가 차별에 대해 얘기하면 누군가는 곧바로 묻는다. “네 행동이랑 네 모습 때문에 차별을 받은 것 아니야?”라고 들었다. 차별의 구조는 지워지고 개인의 인상과 태도가 원인으로 남는다. 네가 조금 달랐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다. 그 말은 원인을 찾는 분석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문장은 다른 뜻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 너라는 뜻이다. 돌아오는 첫 반응이 네 모습 때문이면, 그 서운함은 단순한 오해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해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각이 남는다.
말 한마디의 서운함은 그 간격에서 생긴다. 나는 사실을 말하러 왔는데, 상대는 나의 원인을 찾아준다. 나는 이해를 구하러 왔는데, 상대는 나의 책임을 정리해 준다. 그 말 한마디는 차갑게 들리도록 설계되지 않았을 수 있다. 다만 결론이 너무 빨리 도착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