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옛날 지주 집 딸이다. 그 시절 고중까지 다녔고, 독서를 유난히 좋아하셨다. 그러다 우리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였고, 아이 여섯을 키우셨다.
나의 기억이 일그러지거나 왜곡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들을 하나씩 파헤쳐 보겠다.
1
그 많은 손주 손녀들 중에 단 한 명도 할머니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란 아이는 없다. 할머니의 막내딸의 첫째 딸인 나마저 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유치원에서 나오는 길가에 장마당이 있었다. 나는 늘 돼지 생고기를 가리키면서 할머니를 그쪽으로 “끌고” 가려고 애썼다. 세, 네 살 때 나는 유독 돼지고기 흰살을 좋아했다. 어릴 때 너무 많이 먹은 후유증으로, 일곱 살 때부터인가 흰살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났다.
사촌 언니들은 말한다.
할머니가 나를 가장 예뻐하셨다고.
언니 오빠들에게는 보여준 적도 없었던 과자를 내가 오면 꺼내주셨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희귀한 과자를 구경도 못 해봤어.”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에 대해 언니 오빠들에게 조금은 미안했다. 이모와 큰삼촌네에서 할머니를 모셨기에, 나는 늘 놀러 가는 경우였고 외할머니는 사촌언니 오빠들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편애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손주 손녀들은 왜 항상 시기하고 질투하면서까지 할머니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 할까.
2
한때 연길에 ‘온천’이라는 목욕탕이 있었다. 나는 엄마와 자주 갔었지만, 아주 어릴 때 할머니와 갔던 그 한 번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나는 물놀이를 하다가 온탕의 밑바닥을 헛디뎠다. 얕은 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아주 커다란 손이 나를 건져 올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손이 나에게 주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나 힘있고 든든하면서도 부드럽고 안전했다.
마치 여래불의 큰 손처럼.
그것은 할머니의 손이었다.
3
나는 늘 할머니의 손에 관심이 많았다.
매번 할머니 집에 놀러 갈 때면 꼭 잊지 않고 실행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등을 관찰하고 만져보는 일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등을 매번 신기하게 만지면서 보고 또 보았다.
할머니의 손등을 감싸고 있는 것은 ‘피부’라기보다 살짝 종이 같은 촉감의 얇은 ‘껍질’이었다. 어릴 때 나는 그 껍질을 꼬집어 쭉 올렸다가 놓았다. 피부가 천천히 펴지는 현상이 그저 재미있기만 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말했다.
“이젠 다 늙어서 손이 밉다. 지니 손 보자.”
그러면 나는 너무나 자신 있게 나의 탱글탱글한 손등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아이고, 손도 고와라.” 하면서 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살피셨다. 요리 보고 저리 보며 뭔가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손은 여전히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할머니의 손이다.
슬쩍 꼬집어 올린 할머니의 손등 ‘껍질’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을 기다리는 시간 속에, 나의 그리움이 가득 채워져 있다.
4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지니가 당원이 됐담다.”
이 말을 들은 할머니는 놀라워하시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할머니의 표정에서 기쁨보다 불안의 해소를 읽었다.
어느 지주 집 귀한 아씨가 대학의 꿈을 포기하고 일본 유학파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이 땅에서 무엇을 겪으셨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오셨을지 아무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간병하신 친지들은 보통 할머니의 기억을 환기시키려고 형제자매나 후손들이 찾아오면 일단 이렇게 물었다.
“누군지 이름 불러보세요.”
한참 뜸을 들이는 할머니를 보면서 서운함인지, 죄송함인지, 슬픔인지, 놀라움인지 만감이 교차했다.
몇 번이나 잘못 부르시고 나서야 드디어 나를 알아보셨다.
그리고 ‘지니’라는 이름을 부르셨다.
순간 나는 가장 ‘예쁨 받는 아이’에서 ‘가장 하찮은 아이’가 되고 말았다.
내가 그동안 할머니의 사랑을 입고만 있었구나.
할머니는 평생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입혀주셨다. 먹여주셨고, 씻겨주셨고, 건져 올려주셨고, 손을 잡아주셨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의 옷이 되어드릴 차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할머니의 옷이 되어드릴 수 있는 날은 끝내 오지 않았다.
0
이렇게 할머니와 이별하고 나서야,
그녀를 향한 나의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섬세하고 재치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편집도 센스있게!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