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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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전쯤, 고려관이라는  조선식당에서  식사한적이  있다.  조선복무원이  어떻게  조선말을  잘하냐고  묻기에  내가  조선족이고  연변이라는  곳에서  살았다고   하니  연변을  잘  모르는  눈치다.  그래서 다시  우리집은  두만강변과  가깝고  우리집에서  왕재산이  보인다고  대답하니  대뜸  알겠다고  한다.  순간  뿌듯했다. 사실  왜  뿌듯했는지 리유를  알수  없다.  두만강의  존재감이  연변을 이겨버려서?  너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연변이든  두만강변이든  다  고향인데  두만강변이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연변이라는  큰  이름보다는  나한테  더  친근했나보다.  

    우리 마을은  두만강에서  동으로  1리쯤  떨어진  강변마을이다.  강건너로는  조선  온성군의  한  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두만강이  마을과  제일  가까운  수원(水源)이다보니  이  강과  강변은   자연히  우리 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  되였다.  적어도  내가  어릴때까지는……

   우리  마을이  두만강  중하류쪽이다보니  강폭이  넓고  강중간은  물이  깊어서   중간까지  가서  헤염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아이들은 강기슭에서 물장구를 치고 개발헤염을 쳤다. 우리마을과  두만강  사이엔  밭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매일이다싶이  강변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무더운  여름  하루일이  끝나면  사람들은  땀이  줄줄  흐르는  피곤한  몸을  끌고  강에  가서  목욕을  하고  개운한  몸으로  집에  돌아가군  했다.  아버지들은 이른 새벽이면 소를 끌고 강에 가서 물을 먹이고 강변에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소를 방목하군 했다. 

    봄이면  여자아이들은  마을친구  몇명이  짝을  무어  찌그러진  양철소래와  무우도  벨수  없을  정도로  무들어진  식칼을  가지고  강변에  달래와  민들레를  캐러  가곤  했다. 가만히 부엌에서  쓰는  좋은  식칼을  가지고  갔다가  손을  베가지고  집에  오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나도  한번 새 식칼을  가지고 달래 캐러 갔다가  엄마한테 눈물이 쏙 빠지게 욕을 먹었었다.  엄마가  손을  벨가봐  무딘  식칼을  줬다는걸  그때  나이에  잘  몰랐으며  그때의  엄마들은  애들한테  그런  해석같은걸  잘하지도  않았었다.  물론새  식칼을  잘못  만들가봐  아까워서  안  내준  엄마들도  적지는  않았을것이다.

    여름이면  낚시질을  잘  못하는  아버지는  통발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다. 저녁에  통발을  쳤다가  이튿날  아침에  가보면  꼭  여라문마리씩  손가락만한  물고기가  들어있었다. 그때는  두만강 상류에  개산툰  팔프공장과  석현  종이공장이  있었던  때라  오물이  그대로  두만강에  버려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만강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석유냄새가  난다고도  하였지만  나는  시종  석유냄새를  맡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사람들은  매일이다싶이  두만강에  출근하는  삶을  살았다.  그건  우리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강건너  마을의  조선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번  강에  나가면  우리는  어김없이  강  맞은편에서  소한테  물을  먹이거나  빨래하거나  물장구를  치는  조선의  아이들  혹은  어른들을  볼수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조선사람들과  말을  걸군  하였다.  강폭이  100메터  이상은  되다보니  보통  목소리로  말해서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내  소리  들리니?”

“지금  뭐하니?”

“우리  같이  노래하자.”

    강 건너에  있는  사람이  아이인지  어른인지  관계치  않고  우리는  야자치기를  했으며  우리가  말을 걸면  강건너편  조선사람들도  대부분의  경우  호응해주었다. 그리고는 강  량안에서  몇사람이  목청을  합쳐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물론  노래도  있는  힘껏  소리지르며  불렀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대개  생활가요였다.  혁명가요와  수령을  찬송하는  노래는  우리도  싫어했지만  조선의  백성들도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어제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좋은  때  좋은  날  맺어진  사랑”

“여성은  꽃이라네, 생활의  꽃이라네”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외국사람들과  대화를  섞은  셈인데  우리는  그때  조선사람들을  외국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조선사람이였고  강건너  마을 사람들이였다. 다  같은 함경도  방언이여서  말이  잘  통했으니  더욱 그렇게  생각되였으리라. 물론  지금도  조선사람들이  외국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렇게  가을까지  강변에서  살다가  날씨가  추워지고  강변에  풀들이  다  누렇게  말라가고  두만강이  얼기  시작하면  강변에  나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뜸해진다.  10월말  11월이  되여서  눈이  날리기  시작하면  사람의  흔적이  없어진  강변은  온통  흰눈으로  새햐얗게  뒤덮인다.  이렇게  되면  이듬해  새봄이  오기까지  두만강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기억에서  잠깐  사라진다.

    초중  2학년쯤때  따뜻한  집안에서  기말복습을  하던  나는  졸려서  찬공기를  마시고  정신을  차리려고  혼자서  강변에  찾아갔다.  집에서  한 200메터쯤  걸어서  제방뚝에  올라섰다. 제방뚝에  올라서서  사위를  둘러보니   사람 하나  없는  제방뚝과  강변,  마을과  밭,  그리고  두만강,  모든게  다  눈에  뒤덮혀서  새하얗다.  그리고  그  백색세계에  나  혼자  조용히  서있었다.  분명  마을과  200메터밖에  안  떨어진  곳인데  나는  다른  세상에  온것  같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에는  처량함,  고독함보다는 이렇게  넓고  깨끗한  곳에  나  혼자  있다는  자유로움이  컸다.  또  뭐라  형용하기  힘든  원기  같은것도  얻었다고  하면  오버일가.  어쨌든  예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상한  감정을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것이다.  그  이름못할  감정이  마음을  설레이게  하여  나는  푸른  하늘 아래  눈이  시리도록  흰  눈을  묵묵히  바라보며  오래도록  제방뚝에  서있었다. 

   겨울의  두만강이  사람들의  기억에  등장하게  된것은  조선의  경제가  많이  어려워졌을  때부터였다. 아마  99년, 00년 쯤이였으리나.  조선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겨울의  두만강은  더는  기억에서  잠깐  사라진  곳이  아니였다.  11월말부터  2월초까지  배고픔을  참기  힘든  조선사람들은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  우리마을에  찾아왔다.  우리집은  마을  제일 서쪽  즉  강변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두만강을  넘으면  첫집이  우리집이였다.  그러다보니  한해  겨울에도  몇명씩  탈북자가  우리집에  찾아왔다.  낮이면  덜  춥고  길도  더  잘  보일테지만  변방군인들의  눈을  피해  강바람이  쌩쌩  부는  한밤중에  우리집  문을  두드렸다.  탈북자를  도와주면  벌금한다는  정부의  통보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번마다  문을  열어주었고  그들한테  밥을  주었다.  강변마을이  위험해서  오래  못  머무르고  밥만  먹고  다시  밤길을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눈물을  글썽이며  바래주었다.   그렇게  조선이  가장  힘들었던  몇년사이에  20명은  더  넘어  우리집에  찾아왔고  우리집에서도   번마다  도와줬지만  한번도  들키거나  벌금을  당한적이  없다.  마을사람들도  조선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때문에  고발을  안했고  변방소에서도  알면서도  어느  정도  눈을  감아줬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게  탈북자가  늘어나고  조선과  중국  다  국경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고  어느해부터인가  강변  일부 지역에  철조망이  생겼다. (PS:2022년, 조선에  코로나가  돌기  시작하면서  두만강  전역에  철조망이  생겨버렸다. 그것도  아주  높게.  새들도  코로나를  전파하기에  높게  세워야   조선의  참새랑  까마귀가  철조망을  날아넘지  못한다나?  웃긴  소리)우리는 더  이상  두만강에  접근할수가  없었다.  두만강에  가서  물장구를  치고  빨래하고  조선사람들과  같이  노래를  불렀던건  아득한  옛날 일로  되여버렸다. 

    그리고  시기를  같이하여  마을사람들도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일본으로  남방  연해도시로  뿔뿔이  다  떠나가고  마을엔  로인들만  남았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옥수수, 콩과  해바라기  깨잎 등등  경제작물도  심던  밭은  다  한족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한족들은  청일색으로  옥수수만  심어서  마을밭엔  한족들은  담아  껑충하게  키만  큰  퍼런  옥수수밖에  없었다.  콩  깨잎  등  조선족들을  닮은  아기자기한  작물은  마을 밭에  보이지  않아  마음이  서글퍼났다.  우리  아버지들이  소를  방목하던  강변초원도  한족남정네들이  다  차지하고  양을  방목한다고  한다.  강변밭에서  농사를  하고  방목을  하는  한족들한테는  열쇠를  주어  철조망안  강변으로  나갈수  있게  한다.  하지만  강변에  볼일이  없는  우리는  더 이상  강변쪽으로  향할수  없다.

   몇년전 겨울  오랜만에  집마을에  찾아간  나는  강변을  찾았다.  아버지가  제방뚝부터는  철조망이  있기에  두만강에  접근할수  없다고  했으나  난  두만강이  안보여도  괜찮으니  그저  동년을  보냈던  그곳을  느껴보겠다고  했다.  초중시절  찾아갔을  때처럼  제방뚝의  안팎은 다 백색세계였다.  하지만  가시가  돋친  철조망때문이였을가?  난  웬지  모를  불안을  느꼈고  모종의  무서움도  느꼈다.  십대  소녀시절의   다른  세상에  왔다는  설레임과는  달리  세상의  끝에  왔다는  불안감만  점점  커갔다.  그  상태로  잠깐  서있다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바라보니  신호가  없었다.  여긴  국경이였던것이다.  신호가  없다는  사실이  나한테  한층  불안감을  더해주어  난  부랴부랴  제방뚝에서  내려왔다.  두만강을  보면서  옛날을  추억하려  했는데  나는  철조망안에  있는  두만강을  보면서  달래를  캐던  친구를  떠올리지도,  아버지들이  방목하던  황소무리를  떠올리지도  못했다.  아마  삼엄한  분위기때문였이리라.  오히려  집에  돌아오니  이른봄에  강변에  피여나던  보라색  할미꽃과,  노오란  민들레꽃  등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후로  난  마을옆  두만강에  찾아간적이  없다. 

   어린  시절  마을사람들이  매일이다싶이  찾았던  두만강과  강변은  우리의  생생한  삶의  터전이였다.  초중때  내가  찾았던  백색의  두만강변은  상상력이  풍부했던  소녀시절  감수성을  키워준  곳이기도  했다.  강건너  조선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굼주린  배를  움켜쥐고  건넜던  겨울의  두만강은  가난의  아픔을  싣고있다.  그리고  지금  철조망안에  있는  두만강은  더는  우리의  생활과는  관계없는  국경일뿐이다.  

   두만강은  장백산과  더불어  연변의  상징이다.  또한  조선족들의  삶의  기반이고  생활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그건  80여만  조선족이  살고 있었던  연변  또한  마찬가지였다.  연변은  조선족의  삶의  터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터전으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연변의  존재감이  약해졌다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연변은  조선족이  많이  모여서  살던  80.90년대보다  더  유명해졌다.  민속촌,  왕훙벽  등으로  유명해졌지만  그런  연변은  지금  유람지로서만  의미가  있지  조선족들의  거주지로의  의미는  점점  옅어져  가고 있다.  조선족이  조선말을  마음대로  못 쓰는  또는  안 쓰는  연변,  한족들이  점점  늘어나는  연변은  더  이상  조선족들의  연변이  아니다.  두만강  또한  강  맞은 편으로  이웃나라가  보인다는  우세때문에  많은  유람객들이  모여들고  있지만  이미  조선족의  생활과는  관계없는  곳이  되여버렸다.  그저  국경일뿐이다. 

   이제  조선족의  상징의미밖에  없는  두만강,  이제  점점  상징의미밖에  없어질  연변,  추억의  강,  추억의  고향이  그립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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