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라고 했지만 LA의 햇살은 이미 여름 같았다. 우리는 트렁크에 짐을 싣고 북쪽을 향해 핸들을 돌렸다. 목적지는 San Francisco. 그러나 진짜 여행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사이의 길 위에 있다는 걸, 이 여행을 마치고 나서야 몸으로 알게 되었다.
Day 1 · 4월 7일 — 바다가 처음 나타난 날
오전 열한 시쯤 LA를 빠져나왔다. 1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이 차창 밖으로 불쑥 나타났다. Ventura를 지날 무렵, 해변 가득 자란 갈대 너머로 Target 트럭 한 대가 바다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일상과 절경이 어이없이 공존하는 그 장면이 오히려 정직하게 느껴졌다.
Santa Barbara에 도착한 것은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선착장 끝에 서자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돛단배 서너 척이 한가롭게 떠 있었고, 그 뒤로 산타이네즈 산맥이 흰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Santa Barbara는 늘 그림 같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눈이 아닌 온몸으로 빛을 받는 기분이었다.
오후를 거슬러 올라가면 Solvang이 나온다. 덴마크 이민자들이 세운 이 작은 마을은 캘리포니아 한가운데에 북유럽 풍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풍차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목골조 건물들이 오후 햇살 아래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에클레어를 하나 사 들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해가 지고 나서의 Solvang은 낮보다 더 아름다웠다. Hamlet Square의 풍차에 파란 조명이 켜지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노란 전구 줄이 흔들렸다. 여행 첫 날 밤을 이곳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낯선 공간에서 마음이 처음으로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Day 2 · 4월 8일 — 1번 국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아침 일찍 차를 몰아 Pismo Beach 근처 Tesla Supercharger에 들렀다. 충전을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샀는데, 사고 보니 충전이 거의 완료되어 가고 있었다. 슈퍼차지라 그런지 한 15분?쯤 지났을거 같다. 전기차로 떠나는 해안 로드트립에서 이런 장면은 어쩐지 잘 어울렸다.
충전을 마치고 해안 절벽 위로 올라섰다. 라벤더빛 꽃이 무리지어 핀 절벽 아래로 바닷물이 바위를 부드럽게 핥고 있었다. 저 멀리 모래사장이 하얀 실처럼 이어지고, 그 위로 팜트리 몇 그루가 점처럼 서 있었다. 캘리포니아 해안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지만, 그 전형이 실제로 눈앞에 있을 때는 언제나 숨이 멎는다.
Morro Bay에 닿았을 때, Morro Rock이 바다 한가운데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해발 175미터짜리 화산암 덩어리가 수백만 년의 시간을 품고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잔잔한 물결이 그 아래를 쓸고, 갈매기 두어 마리가 그 옆을 맴돌았다. 거대함과 고요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이었다.
항구 쪽으로 내려오니 아이가 먼저 오렌지색 문어 조각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Morro Rock을 배경으로, 타일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어 등 위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모습이 그 어떤 풍경보다 생생하게 가슴에 박혔다. 여행은 결국 그런 순간들의 집합이다.
오후에 들른 곳은 San Simeon 근처 Elephant Seal 해변이었다. 수백 마리의 바다코끼리들이 모래사장을 가득 채우고 누워 있었다. 간간이 몸을 뒤채거나 서로 목을 맞대는 것들이 있을 뿐, 대부분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몸 흰 것들은 갓 탈피를 마친 새끼들이고, 짙은 갈색의 것들은 성체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완전히 달랐다.
Big Sur 구간에 들어서자 1번 국도는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Bixby Creek Bridge. 태평양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앉은 절벽 위를, 1932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아치교가 아슬아슬하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산 위로 구름이 낮게 깔리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되었다. 차를 세우고 한참을 서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Monterey에 도착한 것은 밤 여덟 시가 지나서였다. Cannery Row의 불빛들이 젖은 거리 위에 번졌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속 냄새 나는 통조림 공장들은 이제 식당과 기념품 가게로 바뀌었지만, 그 골목의 분위기는 여전히 뭔가 오래된 것들의 냄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Day 3 · 4월 9일 — 안개가 기다리던 도시로
Monterey에서의 아침은 Monterey Bay Aquarium으로 시작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회색고래 모형이 천장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시물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고래의 크기를 숫자로 아는 것과 눈앞에서 그 비율을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아이는 한참 동안 고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족관을 나와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Tesla 화면에는 Moss Landing 근처 농경지 위성 지도가 펼쳐져 있고, 다음 목적지인 Tesla Supercharger까지 21마일이 남아 있었다. 바다와 논밭이 교차하는 그 특이한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전기차 여행의 아슬아슬한 묘미를 다시 한번 느꼈다.
오후 네 시를 넘길 즈음, Golden Gate Bridge가 보이기 시작했다. Marin Headlands 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다리는 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빨간 탑 하나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나머지 하나는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회색빛 바다와 붉은 철골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그 장면은, 맑은 날의 금문교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쓸쓸했다.
SF 시내로 들어서자 Transamerica Pyramid가 저 멀리 보였다. North Beach 쪽 골목에서 잠깐 차를 멈추고 그 삼각형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풍경인데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로웠다. 며칠을 달려온 끝에 비로소 이 도시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몸 안에서 천천히 번졌다.
저녁 무렵 Embarcadero에 섰다. Ferry Building의 시계탑이 노란 조명을 받으며 흐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거리에는 퇴근하는 사람들과 여행자들이 뒤섞여 흘렀다. 매일 이 장면을 지나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일상이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도시의 저녁은 분명히 아름다웠다.
밤이 되어 부두 쪽으로 걸었다. Coit Tower 아래에서 초록색 F-Market 트램이 빠르게 지나쳤다. 흔들리는 불빛이 긴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도시에는 무언가 항상 움직이는 것이 있다는 느낌, 한 박자 빠른 에너지 같은 것이 거리에 깔려 있었다.
Pier 39에서 여행의 세 번째 밤을 맞았다. 파란 빛으로 빛나는 대관람차, 그 아래 출렁이는 부둣가의 물결, 멀리 SF 스카이라인의 불빛들. 발 아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바다사자들, 나는 그 모든 것을 눈에 넣으려고 오래 서 있었다.
Day 4 · 4월 10일 — 마지막 아침, 굴과 함께
마지막 날 아침 SF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을 들고 걷는 사람들, 빗속에 반들거리는 아스팔트, 그 위를 지나가는 "No More Noise" 광고가 붙은 버스. 비 오는 도시는 맑은 날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도 나쁘지 않았다.
Ferry Building안에 있는 유명한 굴집, Hog Island Oyster Co에서 여행의 마지막 식사를 했다. 갓 깐 굴들이 얼음 위에 두 층으로 쌓여 나왔고, 레몬와 핫소스가 곁들여졌다. 아이는 옆에서 식당에서 준 Coloring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화이트 와인을 홀짝이며 지난 나흘을 천천히 되새겼다. 창밖으로 빗속의 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3박 4일, LA에서 San Francisco까지. 고속도로를 버리고 1번 국도를 택한 덕분에 우리는 더 오래 달렸고, 더 많은 것을 보았다. Solvang의 풍차, Morro Rock의 고요함, Bixby Bridge의 절경, Elephant Seal들의 낮잠, Cannery Row의 밤, 안개 속 금문교. 그 모든 장면이 지금도 눈 안에 또렷이 살아 있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가장 좋은 길은 가장 빠른 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이가 문어 조각상 위에 올라서는 순간 같은, 계획하지 않은 장면이 가장 오래 남는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