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지역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는 속보를 보았다. 보일하이츠의 한 대형 물류창고에서 시작된 불길이 나흘째 잡히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화면 가득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보다가 황급히 구글 지도를 켰다. 화면을 확대해 들어가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불길이 번지는 근처에, 내가 ‘형’이라 부르는 나의 은인이 운영하는 물류창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창고는 화를 면했다는 소식을 건너 들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참 동안 먹먹한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불길이 채 닿지 않은 태평양 너머의 그 땅으로, 내 안의 해묵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먼저 달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30년 전, 천진의 매캐한 공기 속에서 방황하던 내 인생의 궤도를 바꾸어 놓은 형이 거기 살고 있었다.
시작은 1994년, 내 나이 24살 때였다. 우리 때는 대학 문턱을 넘기가 참으로 험난했다. 한 반에서 겨우 3명이나 갈까 말까 할 정도로 대학 진학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런 와중에 3수라는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뒷바라지해 주시며 믿어주신 부모님의 지지가 있었기에 전문대 졸업장을 손에 쥐고 무작정 천진으로 건너와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변에서 평생 조선족 학교만 다녔던 탓에 중국어도, 한국 기업에서 원하는 세련된 한국어 표달 능력도 부족했다. 언어 장벽 속에서 몰려오던 외로움과 부서 간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1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다음 갈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던질 수 있었던 과감한 호기였다.

[1995년 천진 기차역]
그렇게 옮겨간 두 번째 직장은 삼성전자 하청업체 공장의 영업부서였다. 삼성전자에 납품 관리를 책임지는 사무직이었는데,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귀한 무기 하나와 평생의 사랑을 얻었다. 온 사무실에 컴퓨터가 딱 1대뿐이던 시절, 밤마다 홀로 파르스름한 윈도우 화면을 켜고 서점에서 산 엑셀 서적과 외로운 씨름을 시작했다. 수많은 도표와 수식을 깨부수며 독학한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었다. 같은 사무실의 여자친구도 내가 컴퓨터를 다루는 모습에 반해 연인으로 발전했고, 훗날 결혼까지 골인하여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사내연애 금지 사규 탓에 호기롭게 다시 사표를 던졌다.

[1995년 윈도우3.2/ 486 시절]
1996년, 당시 천진은 한국 기업들로 북적였고 기회를 찾아 모여든 조선족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심지어 현지 공장의 라인 작업자들 사이에 함께 끼어서 일하는 조선족 청년들도 많을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정작 나는 몇 달 동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백수 처지로 낙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새로 설립되는 대기업의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이 막막한 백수 생활을 끝내고 싶던 청춘의 길목에서, 인재를 파견하는 물류회사의 한국인 주재원이었던 형을 처음 만났다. 당시 형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부산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한 형은 중국어에는 능통했지만 컴퓨터는 잘 다루지 못했다.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으로 독수리 타법을 두드려가며 간신히 업무 보고서 정도를 작성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형이 면접관으로 마주 앉아 윈도우 95 환경이 깔린 컴퓨터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형은 여러 가지 도표 양식과 항구별 운임 산출 등 복잡한 수식이 들어간 서류들을 직접 만들어 보게 했다. 밤마다 홀로 갈고 닦았던 내 진짜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망설임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능숙하게 서식을 완성해 나가는 내 모습을 보며, 형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다. 면접이 끝날 무렵, 형은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붙잡았다.
“그리 큰 대기업 가봐야 부속품밖에 더 되겠습니까. 저랑 같이 일해봅시다.”
초면임에도 내 가치를 알아보고 존중해 주는 형의 제안과 소탈한 눈빛에 마음이 완전히 끌렸다. 나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그리하면, 저야 더 좋지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속으로는 ‘대기업 면접은 봐도 합격할지 말지 아직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는 이미 합격한 셈이니 훨씬 이득이다’ 하고 능청스럽게 주판알을 튕기며 던진 회답이었다. 형은 당장 입사할 자리가 마땅치 않음에도 나를 채용하기 위해 본사를 설득하며 무던히도 애를 써주셨고, 그렇게 나는 물류업계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1996년 천진시 랜드마크 국제빌딩]
당시 포워딩 물류업계는 대우가 파격적이었다. 당시 천진의 랜드마크인 32층 국제빌딩에 자리 잡은 사무실에서, 석 달마다 찾아오는 상여금 날이면 내 여자친구는 입이 네모칸이 되도록 활짝 웃곤 했다.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던, 우리 청춘의 가장 눈부신 기억이었다. 입사 후 형은 나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처음 업계에 들어와 모든 게 낯설었던 나를 위해 수많은 업무 지식과 무역 용어들을 직접 복사해서 챙겨주었다. 물류 용어 사전에 자주 쓰는 영어 단어들을 형광펜으로 일일이 줄을 그어주며 외우고 익히는 방법까지 가르쳐주었다. 학창 시절 일본어를 외국어로 배웠던 나에게 생소한 영어 무역 용어들은 참 높은 고비였지만, 형의 정확한 가르침과 세심한 방법 덕분에 물류업계에 무사히 발을 디디고 안착할 수 있었다.
형은 가끔 내게 자신의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심부름을 부탁하곤 했다.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내 손에 두툼한 현금봉투를 쥐여주었다. 타향에서 동생 자존심 다치지 않게 주머니를 채워주고 싶었던 서른 살 청년의 방식이었다.
어느 퇴근 무렵, 형이 툭 던지듯 물었다. “퇴근후에 니 뭐 하노?” 내가 “여자친구랑 데이트합니다”라고 베시시 웃자, 형은 무뚝뚝하게 핀잔을 주었다. “여자 만나는 거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 니 나이 때는 노는 게 아이라 무조건 배워야 된다, 알겠나?”
당시는 컴퓨터 한 대 값이 인민폐로 1만 원을 훌쩍 넘어가던 시절이라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형은 선뜻 자신의 개인 생활비에서 매달 400원씩 떼어내어, 나를 위해 컴퓨터 한 대를 덜컥 임대해 주었다. 다른 한국인 주재원 친구분까지 소개해 주며 운영체제 설치부터 시스템 에러를 해결하는 법까지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1998년 회사 모범사원 상패 ]
특히 전 세계 화물과 서류를 다루는 포워딩 물류업계의 특성상 사무실에서는 인터넷 통신을 남들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곤 했다.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아주 일찍 인터넷 세상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퇴근 후 집에서 독학을 거듭한 끝에, 내 손으로 직접 순수 HTML 코드를 짜서 ‘네띠앙’에 개인 웹사이트를 구축했다. 작가이신 아버님의 작품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정성껏 연재하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1997년 당시 ‘야후 코리아’에서 ‘조선족’을 검색하면 내 사이트가 당당히 걸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전 세계 조선족 유학생들과 이메일 펜팔을 시작했고, 인터넷 오픈 대화방을 운영하며 무한한 세상을 거침없이 활보했다. 그때 사귄 인터넷 친구들과는 30년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내친김에 프로그래밍 영역까지 독학으로 파고들어 직접 개발한 소규모 사내 관리 프로그램들이 회사 시스템의 효율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한국 본사로부터 모범사원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2000년, IMF의 여파 속에서 형이 미국으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나 역시 형의 곁을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천진에서 컴퓨터 조립 및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비록 첫 사업은 3년 뒤 접어야 했지만 이후 다시 물류 대기업에 재취업하여 현장을 누볐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은 한국에서 물류 IT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하고 개발하는 엔지니어로 현업을 지키고 있다.
지금의 나를 보며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 인생 진짜 최고의 운은, 내가 천진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 끌어 올린 서른 살의 형을 만난 것이다. 형이 내 가슴에 피워 준 작은 불씨가 지금 수많은 화물과 데이터를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쉽게 오지 않는 인생의 진정한 멘토를 만나 삶의 궤도는 완전히 바뀌었지만, 나는 형편상 태평양 건너의 형에게 제대로 된 보답 한번, 의젓한 인사 한 번 올리지 못했다. 받은 은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내 고마움은 늘 말 주변에 막혀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그 미안함이 깊은 빚으로 걸려 있어, 가끔 술잔을 기울이다 취기가 오르면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어 눈물이 흐르곤 했다.
세월은 흘러 내 머리에도 어느덧 희끗희끗 서리가 내린 오십 대 중반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1996년 천진의 그 정갈하게 정리된 자그마한 고층빌딩 사무실 문 앞에 서 있다.
“형,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평생 다 갚지 못해 참 미안합니다.”
그날 “저야 더 좋지요”라고 대답하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던 스물여섯 청년의 자리에서 오늘도 형의 안녕을 고요히 기도한다.
2026년 7월 3일 公众号·朝鲜族-蒲公英乘风而飞 에 실렸던 내용을 다시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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