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부모가 원망스럽다.
그런데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 하면 금세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집은 누가 보아도 그럭저럭 따뜻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부를 묻고, 아프면 걱정하고, 때로는 웃는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가 어렵다. 따뜻한 집에서도 사람은 오래 슬플 수 있다는 것을.
내 안에는 아주 오래 배배 꼬여온 슬픔이 있다. 너무 오래 삼켜서 이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이 막히는데, 막상 토해내려 하면 받아줄 곳이 없다. 부모에게 말하면 상처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배은망덕한 자식이 될 것만 같다. 그렇게 내 슬픔은 갈 곳을 잃고 다시 내 안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이럴 거였으면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까.
사람들은 태어나면 다 제 살길이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나는 그 말이 가끔 너무 폭력적으로 들린다.
살아진다는 것과 살고 싶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인데.
살아진다는 건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니까 눈을 뜨고,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몸을 일으키는 것. 오늘을 견디고 나면 내일이 제멋대로 도착하고, 그 내일을 또 견디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는 것. 죽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삶은 계속될 수 있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건 다른 일이다.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과 가보지 못한 곳을 궁금해하는 것. 오늘보다 조금 나은 내일을 은근히 기대하면서 잠드는 것. 살아 있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내가 있고 싶다고 마음먹는 것.
나는 그 둘 사이에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지 안다.
슬픔의 시작이 어디든, 끝을 내야 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라는 것도.
때로 삶은 내가 붙잡고 있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놓을 틈조차 주지 않고 나를 끌고 가기 때문에 이어지기도 한다.
먹고살기 위해 견디고, 견디기 위해 마음을 조금씩 깎아내는 일을 평생 반복해야 한다면, 그것을 정말 ‘살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살길이 있다는 말보다,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길도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미 태어난 사람에게는 자살이 아닌 이상 끝맺음에 대한 선택권조차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생각에는 답이 없다.
다만 어떤 밤에는 아주 조용히 생각한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슬픔을 견디는 법도 배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내일을 살아내야 하는 이 모순도 몰랐을 텐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가.
내 안에서 너무 오래 살아온 불안과 두려움들에게:
이제는 너희들도 나를 조금 덜 사랑했으면 좋겠다.
밤마다 나를 깨우고, 걱정하게 하던 마음들이
어느 날엔가는 제풀에 지쳐 조용해졌으면 좋겠다.
없어지지 않아도 좋다.
다만 더는 나를 흔들지 않는 곳으로 가서,
긴 잠에 들 듯 가만히 安息했으면 좋겠다.
나도 그 곁에서
한 번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잠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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