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와 내려놓지 않기의 줄다리기

어쩌면 삶이란 쥐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다. 그 줄을 매 순간 다시 조율하는 일,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때는 미련이 남더라도 자책하지 않고 너무 아파하지 않으며 놓아 주는 것까지가 그 줄다리기에 들어 있을 것이다.


한국의 여성 연구인력 비율은 23.7%. OECD 30개국 중 29위로, 한국보다 낮은 나라는 일본뿐이다. 이공계를 떠난 여성 연구자들이 꼽은 이유는 육아(42.4%)와 임신·출산(24.2%)이 압도적이었다(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공계 통계지만, 인문학 연구실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숫자는 건조하지만, 그 뒤에는 매일 아침 강의 준비와 아이 아침밥, 준비물을 동시에 챙기는 얼굴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하나다.

최근 후배들과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다. 20년쯤 아득히 먼 후배들 몇 명과 선배 한 분이 참여하는 과제인데, 후배들 중에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박사과정 대학원생도 있었다. 한 차례 과제 회의를 마치고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자리였다. 문득 그 '공주' 후배가 물었다. 공부하는 주부를 우리끼리는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 실은 밥도 하고 애도 키우고 밤잠 줄여 공부하는, 공주보다 무수리에 가까운 현실에 대한 자조인 것이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육아도 하고 강의도 하고 연구도 꾸준히 하세요? 시간 관리 비결이 뭐예요?"

사실 나는 해 줄 얘기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많은 일을 가정 뒤로 미루어 왔고, 일과 가정 사이에서 둘 다 잘하는 것도, 둘 다 놓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20년 가까이 버텨 왔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의 60퍼센트쯤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정도다. 그래서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후배가 두 번, 세 번 다시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모나리자의 미소만 짓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요즘의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아이 키우는 것도, 공부와 연구도 모든 게 때가 있다는 말이 맞아요. 그러나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는 정해져 있고… 부득이하다면 미련 없이 내려놓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자 그때까지 조용히 계시던 선배가 다급히 한 말씀을 하셨다. 내 주변에서 연구 실적이 가장 많은 분이었다.

"그래도 너무 놓으면 안 돼. 연구자는 가늘게라도 학문적 관심을 이어가야 돼. 아이는 언젠가 커서 더는 엄마를 찾지 않을 때가 와. 그때 다시 공부하려면, 덜 하더라도 꾸준히 하는 게 필요해."

그것도 맞는 얘기였다. 그 순간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후배는 육아도 연구도 어느 것 하나 내려놓기 아쉬워서 물었을 텐데, 나는 그 아쉬움에 답이 되지 못한 말을 해 버린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그때의 내 진심이었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한 10년 전쯤,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를 40대 초반에 오랜만에 만났다. 둘째까지 낳아 키우며 겨우 일의 끈만 붙들고 있던 때라 나는 "나 이제 많이 내려놨어. 정말 많이 내려놨어." 하고 말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할 말을 고르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친구들이, 너희 여자사람친구들이 내려놓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나도 내려놓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 말이 그때, 그리고 오랫동안 내게 큰 위로가 되었고, 공부와 일을 꾸역꾸역 해 나가는 당위가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는 내게 참 좋은 벗으로 남아 있다.

내려놓아라, 내려놓지 마라. 언뜻 반대되는 말 같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셋은 다 틀리지 않았다. 친구는 포기하지 말라는 응원이 필요했던 순간에 그 말을 해 주었고, 선배는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말라며 아득한 후배들을 다잡아 주었으며, 내가 후배에게 한 말은 도저히 힘들 때는 어느 하나쯤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허락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방향은 달라도 모두 듣는 이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일 얘기만 한 것 같다. 사실 한 생명을 품어 낳고, 아팠다 회복하며 소년을 지나 청소년이 되고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말과 글로 다 담을 수 없는 장엄한 일이다. 그 곁에서 아이와 같이 웃고 울며 나도 자랐다. 그러나 엄마라는 이름 이전에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가진 한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는 하고 싶은 공부와 일과 활동이 있다. 한식이 먹고 싶은데 아이 입맛에 맞춰 주구장창 돈가스와 아이스크림만 먹는 것은, 내가 읽고 싶은 책 대신 아이들의 책만 같이 읽는 것은, 좋은 엄마일지는 몰라도 좋은 인생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의 이 구절을 언제부터인가 자주 떠올린다. '헛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hebel'은 한낱 숨결처럼 순간적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한다. 삶이 이토록 순간적일진대, 우리가 부여잡으려 애쓰는 많은 것들이 헛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삶이란 쥐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다. 그 줄을 매 순간 다시 조율하는 일,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때는 미련이 남더라도 자책하지 않고 너무 아파하지 않으며 놓아 주는 것까지가 그 줄다리기에 들어 있을 것이다.

요즘 정말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혼잣말로도 한다.

"의미 없어. 다 의미 없어. 그거 중요하지 않아."

여기서 '다'란 세상이 말하는 거창한 성공이나 명예, 인정, 혹은 내가 쥐지 못해 안달하던 어떤 욕망일 테고, 작게는 그저 하고 싶은 일일 테다. 그것이 정말 지금 이 순간을 바쳐서까지 쥐고 있어야 할 삶의 본질인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부득이할 때 예전보다 덜 아프고 덜 억울하게 내려놓는 걸 두고 타협이라 부르는 사람도, 지혜라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요즘의 내 삶이 꽤 괜찮다. 설령 그 내려놓은 것들 중에 내가 받아 마땅했을 인정과 보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인생이 한낱 숨결처럼 짧아서 많은 것이 의미 없다는 걸 머리로, 몸으로, 가슴으로 깨닫고 나니, 나는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그 짧은 순간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고 싶어서, 한밤중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을 때도, "엄마"라는 아이의 부름에 감사한 마음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도 한다.

다만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지는 일, 그 자체가 어쩌면 삶에 꼭 필요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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