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란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이다. 지역적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언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방언'과 비슷한 의미이지만 '방언'에 비해서 표준어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더 강하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특정한 지위를 부여받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제도의 제약도 덜 받았으니 아마도 가장 자연발생적이면서도, 지역적인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언어일 것이다. 그래서 사투리는 한 사람의 출신, 지역 특징, 성격 등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때가 많다. 중국 광동성 차오산 지역의 사람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본 지역 사투리를 말하는 사람과 타 지역 언어를 하는 사람이 싸우고 있으면 무조건 달려가 고향 사람의 편을 들어 함께 싸웠다고 한다. 이렇듯 사투리는 강렬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연변말'이라는 어휘로 한데 뭉뚱그려지기는 하였지만, 사실 중국 연변에서 조선족들이 쓰는 언어는 조선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건너온 것이다.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등. 내가 살던 지역에는 함경도 출신이 많다 보니 자연히 함경도말이 표준어 비슷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추대받지 않은 맹주 같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여러 지역 조선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가 자기 지역 말이 표준어라고 우기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좀 낯설기는 했지만 나름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이미 연변지역을 벗어나기도 했고, 특정 지역의 강세가 사라진 지역에서의 논쟁이었기에 좀 더 자유롭고 비권위적인 느낌의 힘겨루기 같은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함경도 지역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함경도말을 쓰게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이 전라도인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가끔 작은할아버지, 작은할머니 혹은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지역에서 오래 살았던 사촌 고모들이 전라도말을 쓰는 것을 들으면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전라도말이 신기하게 느껴졌다는 것은 어쩌면 할아버지도 이미 함경도말에 많이 물들어 계셨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아버지와 정말 단짝이었는데도 이상하게 할아버지가 어느 지역 사투리를 구사하셨던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특별한 인상이 없었다는 것은 할아버지 말투가 나랑 그렇게 다르지 않았었다는 의미일까.
내가 들어본 전라도말은 백두산 아래 특정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한테서 들은 것 뿐이었다. 안도현 송강진 근처의 북도, 남도라는 곳에는 전라도 지역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다리 하나를 사이두고 북쪽 동네는 북도, 남쪽 동네는 남도라고 불렸다. 아마도 매우 궁벽한 동네였을 것이다. 그 동네 소학교는 1학년, 2학년밖에 반이 없었다. 그래서 3학년이 되면 아이들은 모두 송강으로 나와 그곳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송강의 조선족소학교에는 특별히 외지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곳 아이들은 3학년 때부터 송강진으로 나와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송강에서도 전라도 사투리는 매우 특이했던 모양이다. 애들 말에 따르면 어문 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은 일부러 북도, 남도에서 온 아이들에게 과문 읽기를 시켰다. 특이한 억양으로 과문을 읽는 소리를 들으면서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 모두가 신기해했다.
우리 동네는 그곳보다는 좀 나아서 6학년까지는 집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족 학교는 2년에 한 번씩 학생을 모집했으므로 항상 세 개 학년밖에 없었다. 나이가 맞지 않으면 한 해 앞당기거나 한 해 늦게 학교에 가야 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우리 역시 송강으로 가서 기숙사에 살면서 중학교를 다녀야 했다.
비슷한 처지의 시골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므로, 안도6중(송강진에 있었던 조선족중학교)은 다양한 지역의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남도, 북도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지만 가끔은 말을 못 알아들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일찍 교실에 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북도 애 한 명이 걸어오다가 나를 보더니 "문 땄어?"라고 물었다. 나는 어정쩡해서 "응" 하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걸어와 보더니 "안 땄구나."라고 말했다. "땄다"는 말이 열었다는 말인 걸 처음 알았다. 4년 동안의 송강 생활을 거치면서 함경도말에 많이 융합되기는 했지만, 그 아이들의 억양과 어휘에는 아마도 여전히 전라도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전라도말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 만나게 되는 할아버지쪽 형제와 자녀들을 빼고는 말이다. 분명 전라도에서도 사람들이 적지 않게 왔을 텐데. 얼마 전에 궁금해서 아버지한테 물어봤더니 흑룡강에도 전라도 사람들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안도현 지역에는 북도, 남도 외에도 무주, 요퇀 등 지에 전라도 사람들이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쨌든 전라도 지역에서 온 조선족 사람들은 주변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주와 북도, 남도 지역 사람들을 빼고는 전라도말을 쓰는 조선족 분들을 본 적이 없다. 전라도 사람들은 거의 다 돌아간 것일까.
할아버지 고향은 어떤 지역이었을까? 어릴 때 별 생각 없던 나에게 할아버지는 옛날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여기 살고 있지만 죽을 때는 고향에 가서 죽고 싶다고 하셨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어린 나는 죽을 때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고향 주소도 알려주셨다. 신기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주소를 할아버지 방 궤짝에 있던 <<모택동선집>> 안쪽 표지에다 적어 두었다. 그리고 그걸 외웠다. "전라북도 정읍면 낙양리 홍촌". 그곳에는 할아버지의 큰 여동생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분 이름도 외워 두었다.
나중에 한국 가서 남편과 함께 전라도 여행을 간 적 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살던 동네에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그곳으로 가 보자고 했다. 홍촌이라는 곳에 찾아가 동네 아저씨에게 고모할머니 이름을 댔다. 가르쳐 주는 대로 가 보니 대문에 고모할머니 이름이 쓰여 있었다.
"** 할머니 계세요?" 하고 인기척을 내면서 대문을 열자, 안쪽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걸어나오셨다. 처음 보는 할머니인데, 분명 우리 아버지 얼굴을 하고 계셨다. 고모할머니가 틀림없었다. 할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손녀라고 소개를 하자 할머니는 일단 들어오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할머니 이름, 사는 동네, 형제 등에 대해 물어보셨다. 할머니 이름까지는 대답하고, 작은할아버지 이름은 모르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으셨다.
고모할머니한테서 나는 "홍촌"이 할아버지 고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 고향은 "소주리"라는 곳이었다. "홍촌"은 고모할머니가 시집 간 곳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나중에 이곳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아셨을까? 내가 고모할머니를 찾아올 것을 바라서 본인 고향이 아닌 고모할머니 주소를 가르쳐 주셨던 걸까.
고모할머니와 작별하고, 나는 할아버지 살던 동네로 가서 동사무소를 찾았다. 할아버지 이름을 말하고 손녀라고 이야기했더니 주민등록등본을 뗄 수 있었다. 앞자리만 있고, 뒷자리는 없는 주민등록번호. 사망신고를 못 해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주민등록상에 생존하는 사람처럼 나와 있었다. 결 국 두분은 주민등록등본에 영생하게 된 것일까. 살아 있을 때 그토록 사무쳤던 고향의 서류 속에.
어쨌든 홍촌에 사는 고모할머니한테서 들은 것은 다시 익숙한 전라도 사투리였다. 나는 사실 전라도 사투리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아버지가 하는 말에는 가끔 전라도 어휘가 묻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시방"이라든지 그리고 어딘가 함경도말 같지 않은 억양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내 말에도 정말 아주 드물게 전라도 억양이 남아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한 번은 안도 친구들한테 "갈아입는다" 억양이 웃긴다고 놀림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갈"자를 4성처럼 발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지 말고 2성처럼 발음해야 자연스럽다고 했다.
전라도의 정서는 3대를 거치는 동안 거의 사라진 걸까. 전라도 진도에 가서 삼겹살 구이에 배추쌈이 나오는 것을 보고 친근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전라도식이 아니라 그냥 연변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 매우 좋아했던 "배추고기", 그것도 아마도 전라도 음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배추를 데쳐서 찢은 뒤 된장을 넣고 기름에 볶는 음식이다. 원래 그렇게 불렸는지 아니면 누군가 맛있다고 만들어낸 말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가족의 전라도 사투리는 3대에 걸쳐 희석되면서 나의 대에 와서는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이젠 나의 함경도 사투리도 이제는 약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중간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한국인을 많이 접하고 직업까지 한국어 교육으로 정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한국 문화가 물밀듯 밀려오면서 언제부턴가 우리 조선족들의 말도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안 쓰던 어휘를 쓰기 시작하고, 선후배 사이에 서로 사용하던 "하오체"가 거의 사라졌다. 일부는 반말로 바뀌었고, 적지 않은 경우에는 아예 서로 "합쇼체"를 사용한다. "옳소"가 아니라 "맞아" 혹은 "옳슴다"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에는 좋아 보이는 것도 있고, 가끔은 애잔한 향수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는 서운한 것도 있다.
한 한국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방언을 보존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언어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방언을 보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는 표준어를 보급하기 위해 애를 썼던 시기가 있었다. 2000년대에 광동성에 와서 중학교 어문을 가르치던 친구가 말했다. 이곳 지역은 방언이 하도 강력해서 표준어가 오히려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견고한 것처럼 보이던 방언의 보루는 급속도로 무너졌다. 전국에서 가장 방언 보존을 잘 하는 지역이라고 칭해짐에도 불구하고, 본 지역 사람들도 방언으로 학술회의 발표 같은 것을 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좋게 보면 표준어가 잘 보급된 것이고, 안 좋게 보면 방언이 급속도로 몰락해서 존속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1930-40년대 미국에 간 중국유학생들이 서로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서 영어로 소통을 했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신기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도 어릴 적에는 늘 바른 어휘를 쓰라고 교육받아왔다. “가새”가 아니라 “가위”를, “괴기”가 아니라 “고기”를 쓰라고 말이다. 하지만 주류 언어가 날로 강세를 보이고, 비주류 언어는 급속도로 몰락하는 지금, 사투리는 이젠 더 이상 버리라고 독촉해야 할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과거를, 우리의 향수와 문화를 담고 있는 진귀한 그릇일 수도 있다.
물론, 사투리만을 고집하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우리의 언어 자체를 잃어버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사투리가 되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무엇인가는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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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할아버지가 쓰시던 사투리
이젠 기억에 없다.
고현놈! 하며 포효하시던
단마디 외에는
아버지 말투에는
조금만 남았다.
‘시방’이라는 말을 대표주자로 하는
살아있는 전라도의 흔적
내 사투리는
함경도 사투리다.
가끔 친구들에게 놀림 받았던
‘갈아입는다’의 첫 글자 억양만 전라도다.
전라도에서도 많이 왔다던데
흑룡강에도 갔다던데
정읍툰이라는 곳에도 모여 살았다던데
무주라는 동네도 있는데
북도, 남도에서는 아직도 전라도말 쓰는데
다들 돌아간 걸까
돌아가서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린 나에게 받아적게 했던
할아버지 고향 주소는
고모할머니 주소랑 바뀌었다.
‘촌’ 앞에 ‘리’가 빠졌다.
병들어 빠져 버린 할아버지 치아처럼
과년한 여동생을 두고 와서
공석이 되어 버린 장녀의 자리처럼
죽을 때는 고향 가서 죽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말씀
그 염원 때문이었을까
사망신고를 못해서
전라북도 정읍면 소주리 홍촌에 있는
할아버지 호적은 아직 생존 중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의 서류 속으로 돌아가 영생을 얻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