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9도죠? 이상하네요…

체온계를 보며 혼자 말하고나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은행직원. 요즘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어디를 가든 입구에서 체온을  측정한다. 나도 그냥 은행직원을 바라보며 웃을 뿐.

다시 팔목을 내들라고 한다. 팔을 쑥 내밀어 주었더니 또 다시 29도란다. 들어가지 말고 잠시 기다려 보란다. 일 분쯤 지나 다시 측정하더니 30도도 안 된단다. 아무튼 제한 체온인 37.3도를 넘지 않았으니 나는 업무 창구로 갈 수 있었다. 그 뒤 몇몇 사람들이 더 들어왔는데 그들은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분명 체온계 문제였을 테니까. 절대로 내가  29도일 수는 없다.

내가 얼마나 뜨거운가. 그 뜨거움은 항상 날카로웠고 어딘가 뿜겨져나가려고 광기 같은 것을 부렸다. 나는 식혀야 했고 잠재워야 했고 가두어야 했다. 내 몸은 그걸 잘 알아서 흔히 입술도 바짝바짝 말라들며 껍질이 벗겨지고 터지고 한다. 가슴의 그 위험 온도에 몸이 스스로 곬을 터주어 열기를 흐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가 29도라니. 어쩌면 온몸의 온도가 가슴 안으로만 흘러들어서 피부의 온도가 낮아질 수도 있을까.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는 법이 아닐까. 훗훗 웃어버렸다. 내가 무슨 이 지구별의 인종이 아니고 다른 별의 생물종인가.

훗날 이 이야기를 들은 어떤 이들은 그 체온계가 몸의 온도가 아니고 어쩌면 내가 표현하는 감정의 온도일 수도 있겠다며 농담을 했다. 그만큼 늘 차가웠고 매정했다는  뜻이다.

내 가슴은  빨간 속살을 함빡 터뜨리는 석류인데.

우글우글 가지를 마구 뻗어나가고 짙푸른 잎사귀를 펼쳐내는 원시림인데.

이 세상을 흠씬 젖게 만들고 싶은 한 줄기 소나기이고 폭풍우인데.

내가 웅크리고 감추고 죽이고 살았나 본다. 그것이 세상 살기에 편하다고 느끼고 옳다고 여기며 어울린다고 생각했나 본다.

나 이제 웃고 싶으면 거침없이 화끈하게 웃음을 토하리. 화가 나면 지치도록 화를 내리. 울고프면 필사적으로 울어버리리. 사랑할 때면  몸을 다 열어 미친듯이 열락하리…

이 세상의 벽을 가슴으로 부딪치리. 뜨거움을 뿜어내리. 번쩍이는 불꽃을 튕겨내리. 누구에겐들 잘못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으리. 나도 그런 인간들 중의 하나였노라고 빡빡 소리 질러보리.

뭐 괜히 적당하지 않으리. 안그런 척 하지 않으리. 단정하지 않으리. 겁내지 않으리. 긴장하지 않으리.  조심하지 않으리. 주춤거리지 않으리.

하—그런데 언제나 기어이 그래야만 하는 걸까? 그것만이 간절히 나를 살아내는 일일까? 나는 외로우면 지독하게 외로워 했으나 아무도 몰랐다. 쓸쓸하면 잔인하도록 쓸쓸해졌으나 아무도 몰랐다.  아프면 피를 철철 흘려 아파했으나 아무도 몰랐다. 그리우면 혼절하도록 그리워했으나 아무도 몰랐다…

그런 것뿐이다. 기실 내 가슴속으로는 얼마나 절박했고 사나웠고 맹렬했는가. 얼마나 그윽했고 몰두했고 진실했는가. 얼마나 불가항력적이였고 끓어올랐고 넘쳤는가.

남들이 몰랐을 뿐이다. 체온 29도가 결코 내 문제가 아니였듯이 누군가 내 가슴의 뜨거움을 몰랐더라도 결코 내 문제는 아니다. 나는 충분히 진심을 다했으며 내 가슴을 온전히 내것으로 느끼었다. 나는 맨살에 번져가던 독하고 싱그러운 향기를 안다. 나를 송두리채 흔들던 자지러질 듯하던 떨림을 안다. 되돌아보아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 나는 잘 안다.

뜨거움은 불과 다르다. 불은 훨훨 타오르고 솟구치고 너울거린다. 뜨거움은 내면화되고 숨겨진 열기를 품을 뿐이다. 그 열기들의 은근한 집중이 바로 내 가슴의 뜨거움이다. 허투루 사용되지 않으며 소중하게 간직되고 보호된 것이다.  어쩌면 언제나 무한하며 한결같으며 오래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어둡고 차갑고 무서운 세상에서 가슴 뜨거운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환상은 내게 언제나 위안이며 행복이다. 그런 사람 하나쯤 갖고 내 뜨거움을 다 내어 주며 살다가고 싶다. 아무리 이 세상이 인간들을 냉각시키고 있을지라도 그런 사람은 존재할 것이다. 그 믿음은  가슴이 뜨거운 나여서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이다.

나 두팔 벌려 사무치도록 세상을 포옹하리라. 나의 감각기관은 주의력을 모아서 또 초월하여서 보이는 것 너머를 만지고 들리는 것 너머를 보며 만져지는 것 너머의  영혼에 감응할 것이다.

뜨거움은 은밀할 수도 있다.

뜨거움은  조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끔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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