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휴일이다. 주말이 아닌 노는 날. 그말인즉 하루종일 아이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은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의 시간을 등한시했다. 할 일이 다방면으로 쌓여 마음의 짐이 바위 짓누르듯 하지만 오늘 만은 옹근 하루를 '올고사게' 아이한테 쓰고 아이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아침에는 엄마가 아이랑 조깅을 나가고 낮에는 인형놀이, 독서시간을 마치고 나서는 시내돌이를 나가 밀크티를 사들고 느릿느릿 구경을 한다. 그걸 보면 영낙없는 여자다.
점심은 집에서 간단히 해결. 하기 바쁘게 강변으로 가서 물놀이를 하겠다고 한다. 채비를 마치고 나갔는데 해님이 없어 쌀쌀하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연히 같은 학년 친구까지 만나니 열정이란 것이 끓어 오른다. 신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뛰어든다. 어떤 남자애가 강가에 작은 웅뎅이를 파고 물을 끌어들여 그것을 댐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일제히 바게쯔나 비닐봉투로 물을 퍼다가 그 댐에 들이붓기 시작한다. 근데 문제의 그 댐은 강이랑 연결되어 있다. 막히지 않았다. 물은 들이붓는 대로 바로 누런 흙탕과 함께 강으로 흘러나간다. 도대체 저 행위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저게 댐이고 왜 땀을 쏟으며 저 물을 퍼나르는 것일까?
딸아이를 불러다 왜 그러고 있냐고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 표정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말이다. 다 흘러나갈 물을 부으면 또 어떠리.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물의 효용성을 따지는 나는 또 뭔가. 저 아이들이 즐거운 것은 같이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생각 때문일까. 물이 흘러나가는 게 재미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몸에 스치는 저 물결과 손에 들리는 저 무게와 콸콸 쏟아지는 저 소리 때문인 걸까.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행위의 의미를 때묻은 이 어른의 머리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닌게 분명하다. 요즘 들어 부쩍 딸아이가 내게 하는 말이 있다. "어른들은 뇌가 다 굳어져 있어." 이 시간에도 저녁에 무슨 일을 얼마 만큼 해야 할까, 내일은 시간을 어떻게 또 배분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나의 이 대뇌, 그리고 아이들의 행위를 평가하고 가치매김을 하려는 나의 이 대뇌가, 의미 운운할 자격이 없음은 자명한 듯.
그러고나서 다시 지금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노라니, 조금 색다르다. 시야의 120도 정도를 꽉 채운 강물의 저 낮은 폭포, 투명한 물을 흰색 줄기들로 바꾸며 쏴쏴 소리를 내는 저것들은, 흰 물보라가 강물을 거스르는 것인지 드리워 내려오는 것인지 순간 헷갈린다. 상류에서는 청둥오리 한 마리가 동동 떠내려오다 작은 폭포에서 떨어지나 싶더니 다시 동동 떠올라가고, 폭포를 지난 물결이 무수히 작은 원추형 파도 머리들을 이루며 행진하는 환영이 언뜰거린다. 저것들은 무의미한 걸까?
타자화된 우리 집 가방과 나의 신짝들
대학교 때 캠퍼스에는 작은 호수가 있었다.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는 호수가 벤치에 앉아서 초점 없이 수면 위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멈춘듯 심플한듯 있던 경물들이 미세한 움직임과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어쩌다 그랬는지 수면 위에 떨어져 버린 파리 한 마리, 물의 부착을 거슬러 다시 날아오르려 안깐힘을 쓰는 그 파리를, 어느샌가 소금쟁이 한 마리가 긴 다리를 휘저으며 다가와 한 번 싞 물고는 도망치고, 물고는 도망치고, 결국에는 파리를 잡아 포식을 하는 광경… 잔물결에 알른거리는 탑의 그림자를 어느새 와서는 물갈퀴로 부시고 가는 물오리 한 쌍…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났던 한 컷 속에는 그들만의 이야기와 그들만의 리그가 진행중이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 싶겠지만은, 거기서 경이를 느낀 나에게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이 걱정해야할 게 아닐 수도 있다.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의미 충천한 것일 수도 있다. 아이처럼 즐겨야 될 것인데도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 어딘가 잘못된 것이리라. 그래서 어린 왕자도 그렇게 말했나. "자라이들이느 정마 벨랗슴다에". 그래, '의미'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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