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녀석이 나에게 ‘레전드’라는 별명을 붙혀주었다. 누구에게나 반짝이던 화려한 과거가 있듯이 나에게도 그런 한 때가 있었다. 그때 탄생한 별명이 바로 ‘레전드’였다. 후배들이 ‘레전드’라고 부를 때마다 흑역사가 떠올라 부끄럽지만 남몰래 맘속에 애장하고 있는 별명이다.

레전드=술꾼(?).

‘레전드’가 ‘술꾼’이었다니 놀랐을까나?

나에게 ‘레전드’라는 별명을 지어준 건 후배녀석이지만, 내가 ‘레전드’로 모시는 술선생은 외삼촌이다. 외삼촌에게서 처음으로 술을 배웠다. 외삼촌은 나름 의무감이 막중했다고 한다. 술이라면 질색팔색하던 조카에게 ‘술은 뭐’라고 말해줘야 좋은 기억으로 남을까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외삼촌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술을 곧잘 받아 마셨다. 맥주 한 병이면 고꾸라질거라 예상했는데 너무 말짱해서 외삼촌도 당황해 하셨다. “그래! 대학에 가서 실수하기보다는 너의 주량을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 오늘 정신 똑띠 차리고 끝까지 마셔바라.” 

처음에는 긴장해서 똑바로 있다가, 나중에는 흐트러진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 승부욕(?)에 정신줄을 부여 잡았던 것 같다. 외삼촌은 자기가 조카의 재능을 발굴했다며 명절만 되면 빠지지 않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나는 외삼촌의 인정을 받은 ‘술꾼’에서, 후배녀석들의 ‘레전드’가 된 것이다.

술에 대한 생각도 나이를 한살한살 먹어가면서 많이 바뀌었다.

1학년 때는 술이 싫었다.

술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마셔야 해서 싫었다. 더 정확히는 술자리가 싫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마시고 싶지 않아도 마셔야 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회식은 싫지 않았지만, 술이 빠지지 않는 회식은 싫었다. 그나마, 술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선후배들을 만난 건 행운이 아닐 수가 없다.

2학년 때는 술이 썼다.

마시더라도 꼭 달달한 맛을 찾았다. 바나나맛 막걸리나 블루베리맛 소주, 체리맛 맥주를 좋아했다. 회식 말고는 ‘술마시러 가자’는 말을 내뱉는 일은 없었다. 2학년이 되니 마음은 훨씬 홀가분했다. 술에 너무 큰 거부감은 없었지만, 왜 회식에서 술이 빠지면 안되는지 늘 의문이었다. 술없이도 대화하고, 술없이도 어색함을 극복할 수는 없을까 늘 생각했다. 취중진담이란 말은 왜 나온걸까? 술 깨면 기억도 못하면서 진심이라 말하면 그 말을 믿어도 되는걸까,  맨정신에 할 수 없는 말도 술이 들어가니 용기가 생긴다는 말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만나면 술만 마시는, 술마시기 위한 안주거리처럼 씹는 대화들에 어느 순간부터 질리기 시작했다.

3학년 때는 술 생각이 났다.

잠은 오지 않고, 머리 속이 복잡한 날이면 룸메이트랑 맥주 한 캔 사들고 새벽 그림자 사이를 뜀박질했다. 한캔 한캔 마시는 날이 늘어나다보니 어느새 편의점에 진열된 맥주 브랜드는 다 마셔봤다. 기분에 따라 이런 맛, 저런 맛 고르는 재미까지 놓지지 않고 소박하게 즐겼다. 가슴에 맺힌 딱딱한 답답함을 맥주가 쑥 쓸어내려주는 기분이랄까? 맥주를 마신다고 해결될 고민은 아니지만, 맥주 한캔의 마법이 날더러 버텨내게 했다. 가끔은 취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때 알았다. 취하고 싶을 때 취할 수 있는 것도 여유가 있는 자만이 누를 수 있는 호사라는 사실을. 

그리고, ‘레전드’라는 별명의 비화도 3학년 때 만들어졌다. (왕징에 있는 오두막집이었고, 콘치즈와 불닭발이 기막히게 맛있었고, 처음으로 소주와 동동주를 섞어마셨다. 나를 취하게 한 진범이 동동주는 아니었다. 소주가 복병이었다.) 만남이 즐거운 사람들과의 모임이었고,  그날따라 술이 술술 넘어갔고, 오래 함께 하고 싶었고, 내일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한번쯤은 취할 때까지 마셔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먼저 ‘야 마셔”를 호기롭게 외치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다음날은 뻔한 이야기다. 숙취의 괴로움과 반성과 함께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남겼다. 처음이자 마지막 흑역사다. (술주정은 없었다.)

4학년 때는 술을 멀리했다.

1학년과 4학년은 불과 3년밖에 차이 없지만, 몸에서는 그 차이가 확연히 나타났다. 어르신들은 화를 내실지도 모를 말이지만,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말이 툭하면 나왔다. 후배녀석들에게도 한 소리 했다. “4학년이 되어봐라, 다르다니까…” 밤샘이 잦았고, 운동할 시간은 없고, 잘 챙겨 먹지 않다보니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졌다. 몸에 나쁜건 최소화하려고 노력했고, 그 첫번째로 술을 멀리했다. 술은 자연히 멀어졌다. 4학년은 너무 바쁜 나날들이었고 치열하게 보내야만 하는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술은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있다. 우리가 술에 너무 관대한 건 아닌지,  나 역시도 그런 술문화에 젖어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술을 멀리하고 낯설게 대하려고 애쓰지만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면 한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 어쩔수 없이 생겨날 때가 있다. 대신 요즘은 무알콜 맥주를 먼저 찾는다. 컵에 따르면 거품이 몽글몽글하고 포슬포슬한 무알콜 맥주. 취하지도 않고 대화도 오래오래 할 수 있는 무알콜 맥주.

(*왕년의 레전드는 이젠 잊어주시길. 그럼 이만 안녕!)


썸네일 by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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