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야흐로 하늘의 색 흐려지는 늦오후다. 멀리서 파도같이 강 흐르는 소리, 이끼냄새 가까워지면 발 밑을 괜시레 살피는 순이. 집은 말을 꺼낼때마다 외로워지게 만드는 글자였으나, 하늘은 결코 뜨겁지 못한 색에도 땅을 덥혔다. 그 애가 가방에 단 주황색 인형을 닮은 구름 사이로 듬성듬성 검은 구멍이 난다.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는건 오후 여섯시. 가로등이 다 켜지면 집에 가야지, 월요일은 지각하면 안되니까 교복을 얼른 빨래해놔야겠다. 그러나 찬물로 빨래 하면 금세 퉁퉁 발갛게 부어오를 손. 매미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위태롭게 깜빡이던 가로등 불빛 두어개가 툭하니 꺼지면 일어날 채비. 저녁을 먹기전에 어질러진 집도 치워야지, 저녁은 가볍게 먹는게 좋으리라. 코등을 손으로 훑은 순이의 등 뒤로 고장난 가로등이 스쳐지난다. 오른쪽이 더 무겁게 내려앉는 발걸음에 개 짖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아주 작고 빛나는 금색의 돼지저금통, 저금통을 깨부수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일가. 그렇다면 얼마나.



2.

갈색을 띠는 전등이 참담함을 가렸다. 대충 옷을 껴입은 순이가 대문밖으로 나서자 오래 기다린 새벽 밝아온다. 머리카락이 흩어지고 부어오른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는 순이. 순이는 운명을 믿었다. 적어도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어린이날 날자로 모르는데, 내심 답을 기대하던 순이에게 침묵을 지킨 그 애가 다음날 요구르트 네개를 내밀었을 때. 순이는 운명이 있다면 그 애는 궤적에서 벗어나있으리라 생각한다. 늘 타인에 의해 소란스러웠던 삶이 처음으로 고요해지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듣는 노랠 어쩌면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 어디에서도 아무도 봐주지 않을 울음. 순이는 그 애 앞에서만 마음 놓고 아닌척 운다. 그러면 그 애가 가만히 안아준다. 그건, 울음을 터뜨린 이의 흐느낌이 더 커지게 하는 그 애의 방식. 



3.

너한테서는 외로운 냄새가 나, 그 애가 순이의 겉옷을 돌려주며 건넨 말이였다. 어둠 속에서 등 뒤를 따라붙는 달처럼 떨어질리 없는 것이였으나 슬픔을 들킨다는건 동정이나 련민에 차분해진다는 것. 아니야. 낮에는 두 분 다 출근하시고 저녁에는 나 혼자. 잠들고나면 돌아오시지. 순이의 흰 얼굴에 붉은 빛이 피여오른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탁하다, 그 애는 혼자말처럼 조용히. 욕조를 닮은 구름 너머로 뿌연 주황색 피자국이 한줄씩 흐르고 흘러 온 하늘을 메꿔갔다. 납작한 알약들처럼 텅 빈 학교 너머로 쏟아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거짓말 아니야. 순이의 어딘가 병든 말. 삶을 늘 인문학적인 각도로 바라보던 이가 드디여 생리학적인 존재로 리해해버릴 때. 둘의 앞을 가로질러 뛰여가는 남자아이를 보는 그 애의 눈빛이 서정적이다. 달리는 거, 어떤 기분인지 알아? 알지는 못해도 느끼긴 해. 느껴진다고? 누군가가 달리는걸 보면. 아이가 지나는 곳마다 하나씩 발자국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그 애는 절름발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법을 모른다.    



4.

해가 떠오르고 달이 지거나 별이 사라지고 밤이 걷히는 이 흔해빠진 촌구석 풍경. 그속에서 유일하게 근사한 필름을 가진 그 애. 자꾸만 오른쪽으로 기우는 책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내 영화 속 주인공이 되여줘. 손전등을 마치 무대 위 조명장치라도 되는듯 순이에게 비추는 그 애. 이제 이 세상에, 그보다 뜨거운 것은 없다. 난 감성적인 이야기는 딱 질색이야. 미묘한 폭도로 움직이는 눈썹. 서서히 터오는 동. 기꺼이 뮤즈의 말을 들어줘야지. 반짝이는 눈 뒤로 파문처럼 번지는 빛과 빛과 빛. 뮤즈? 왜, 장예모 감독이랑 배우 공리처럼 말이야. 그건 너무 거창한데, 왜 하필이면 나야? 망설였을가. 살아있는 슬픔이 필요해. 순수한 무지 앞에서 더욱 몸집이 작아지는 의지는 깨지기 쉬운 잔에 불과했다. 살아서 움직이는, 그런 슬픔. 아아, 그토록이나 거창한.   



5.

비방울이 웅성이자 여름이였다. 이윽고, 모하가 들렀다 간 만추. 툭툭 잎이 다 떨어지면 푹푹 발이 파이는 겨울이다. 그 애가 학교를 가는 날에 눈이 오면 순이는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빠르게 움직이면 수업을 듣고. 그만 관둬. 나지막한 목소리 가라앉거나 눈이 번지는 속도가 더 빠르면 하루종일 지루한 영화를 봤다. 무채색화면이 창문 밖의 세상을 집어삼켜, 둘의 색이 구별이 안 갈 즈음 그 애의 무릎뼈. 아파, 그 애가 가져다주는 베개는 잠이 잘온다. 순이는 더이상 악몽이 아닌 꿈만 꿀 수 있게 되였다. 둘은 매일을 아침에 만나 저녁에 헤어졌다. 그러나, 순이는 그 애를 남앞에서는 그분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애는 부모님 앞에서 순이를 그분이라 소개했다. 떠오르지 않는 계절에 오신 그분. 그저 그뿐.       

(2021년 11번가 특집 온라인 공모전 투고한 적 있습니다… 혹여 보신적 있으시다면… ㅎㅎㅎ 같은 솨람이에여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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