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022는 어떤 의미일까 ?

2022년 10월의 마지막날에 쓰는 나의 블로그


   2022년 10월은 벌써 내가 한국에서 중국으로 발령받아 온지 어안간 6개월째 되는 달이다.

   올해 4월말 간난신고로 한국 김해공항에서 중국 청도로 입국하면서 14+7 시설격리를 진전하고 겨우내 천진에 있는 집에 가게 되었는데, 행정구내 확진자 발생으로 인한 아파트 단지의 갑작스러운 봉쇄조치로 또 2주간 집에 갖겨서 살아야 했다.  

   결국 중국입국부터 꼬박 한달간 격리생활을 하고 아파트 단지가 봉쇄가 풀리는 5월30일 … 나는 도망가듯 천진에서 이번 목적지인 광주 白云机场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광주에 도착하여 현장을 돌아보고, 본사에서 지시한 사업내용 진행가능 여부를 조사해 보니 부적합결론이 나와서 심천으로 움직이로 했다.  

   광주/심천에서 또 호텔에 꼬박 20여일 묵으면서 현지 현황파악하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상신하였는데 … 지루하고 숨막히는 기다림속에 본사의 회신은 또 부적합결론과 동시에 산동성 청도시로 움직여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래서 또 급기야 청도에 호텔을 예약하고 청도행에 올랐다!

   이번 중국발령은 빛갈은 좋았으나, 험난하고 쉬운 길은 아니였다. 

   “그래, 한국에서 일자리는 어떻나?"  아버지는 생전에 늘 나의 진로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1994년 중국천진의 한국기업에 직장을 구하고 천진에 안착하면서 천진과 북경의 물류업계 및 IT업계에서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얻갈아 반복하였다. 그러던 2014년 8월, 결국은 한국행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 한국행은 돈 벌러 갔다기보다 새로운 진로를 개척 해 보기 위한 심산이였다. 

   한국입국시 비자가 H2라는 비자여서 사무직은 할수없어, 경상남도에서 노가다(막일) 일당도 뛰어 보고, 공장에서 CNC 철가공 일도 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기술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사무직을 할수 있는 F4비자로 변경하면서 겨우내 한국입국 6개월만에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다.

   서울 서초구 IT 회사에 입사하였다가, 중국투자 택배회사로 갈아타고 15개월 일하다가 또 다시 한중간 무역업을 하는 무역유통회사에 스카웃 되면서 이번 한국행이 최상의 직위와 대우를 받게 되어 제법 잘나가는(?)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아버지, 지금 한국의 무역회사에서 잘 하고 있습니다. 직원이 30여명인데, 중국사람중에 제일 높은 자리에 있습니다." … "그래, 잘 됐구나!"  당뇨병 합병증으로 입원중인 아버지를 병호리하면서 아버지랑 대화중에서 제일 밝은 내용이였다. 

   5일 년차 휴가가 만료되어 나는 한국으로 복귀하였고, 아버지는 병환이 호전되어 퇴원하셨지만 … 3개월 뒤인 2018년 1월 11일, 집에서 조용히 귀천하셨다.

   잘 다니던 무역회사는 싸드로 인한 한중간 갈등으로 차츰 중국업무는 악운이 떨어졌다.  2018 중국상해 파트너사랑 함께 "제주도 200인 워크숍"을 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해 보려고 함께 "화이팅"을 외쳤지만, 형편은 좋아지지 않았고, "굿바이 워크숍"으로 되고 말았으며, 회사는 중국수출업무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부진재고 정리에 들어갔다. 2019년에는 중국업무를 위해 들어왔던 직원들 하나둘 짜르기 시작했고, 2020년초 코로나가 퍼지면서 회사는 중국 수출업무를 완전접고 유럽과 동남아쪽 업무로 물갈이 하면서 그 위기는 내가 직장을 스스로 떠날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왔다.

[2018년 "굿바이 워크숍"]

   꼬박 4년넘게 한 직장에서 진전 해 보기는 처음이였던 회사였고, 또 그만큼 맘이 편하고 성과도 있는 회사였다.  그런 모순속에서 … 퇴근해서는 배달음식 시키고, 편의점에 들려서 술 사 들어고와서 자취방에서 혼술하면서 TV 보는게 일상이 되었고, 주말에는 골프연습장에서 시간을 에때우거나 바다낚시에 몰두 하면서 앞으로 나갈길을 고민했다. 배낚시하면서 하늘을 날으는 기러기떼가 부러웠고, 하늘상공에 높히 떠서 중국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어졌다.

   그러던 2020년 9월16일, 아내랑 상의하고 정식으로 사표를 내고, 10월 25일 중국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무역회사에서 4년 6개월을 근무하고 떠나려니 홀가분하다기보다, 아쉬움이 더 많았다. 이제 여기를 떠나서 재 취직을 할려면 여기까지 오기는 힘든 나이가 되었으니까 …

   그렇게 회사대표님과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박수 칠 때 떠나라"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 방역정책 때문에 중국행 비행기가 줄줄히 취소되면서 10월 25일예약했던 항공권이 펑크나는 탓에 2번이나 취소되어, 별수없이 사천성 成都로 가는 아시아나 항공권을 이틀 앞당긴 22일로 예매하였다. 출항당일 별탈없이 成都에 무사히 내려서 14일 호텔 시설격리 마치고 천진에 있는 집에 도착하였다.

   한국행을 선택하면서 내가 중국 천진을 떠날무렵 딸은 중학교에 금방 입학하였고, 아내는 마침 휴직하면서 딸 뒷바라지 하게 되었는데 … 나는 한국에 있다보니 그사이 나랑 장장 7년 별거중이였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별거 하지말기로 약속하고 우리부부는 중국 국내에서 함께 붙어다니듯 했다. 고향 왕청에 계시는 어머니와 누나네 가족도 여유롭게 만나고, 만나고 싶었던 친척들과 친구들도 만났으며 산동성 위해시에서 100일 살기 체험(실제 2개월)도 했었다.

[2021년 2월 왕청 모교인 왕청5중(초중)과 왕청2중(고중)]

[2021년 6월 위해 해변가]

[2021년 6월 위해에서 마당에 직접 심어서 가꿨던 채소밭]

   그동안 그리웠던 정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도 많이 하면서 더욱더 돈독해졌고, 아직은 마냥 이렇게 두손 부여잡고 즐기는것이 길이 아님을 서로 마음을 모았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제2의 한국향을 선택하고 이번에는 가서 사업아이템 하나 물고 오는걸로 PLAN 을 잡고 가기로 하였다.

   2021년 7월 6일, 딸과 친지들과 작별하고 우리는 무사히 다시 한국으로 입국을 하였다. 때는 한국도 입국하면 14일 자가격리 해야하는 시기라 … 또 경상남도 함안에 있는 장모님이 생전에 사시던 생가에 머물면서 지루한 날을 보냈다.

   14일 자가격리 끝내고, 정상적으로 움직일수가 있게되어 우리는 곧장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30평짜리 아파트 셋방 하나 임대하고 본격적으로 계획대로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아내는 큰 체제가 하는 가든식당에 도와주고, 나는 지방에서 할마한 일을 찾아 봤으나, 그 동네는 공장일 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중국관련 업무를 하는 일자리는 찾기 쉽지는 않았다. 그냥 놀기는 무엇해서 LG전자 하청업체인 도장공장에 주야간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7일간하고 투항하고 말았다. 육체노동은 도저히 적성에 맞지않고 몸이 고달팠다. 하지만 같은 공장에는 그렇게 몇년 끈질기게 일 하는 조선족분들이 많이 보여서 응근히 그분들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경상도 창원시에 있는 LG전자 하청업체]

   그러던 어느날, 전에 무역회사 다니면서 인연이 깊었던 IT회사의 대표에 연락하여, 내가 왔노라 하고 소식을 전하게 되었는데 … 나보다 8살 연하인 대표는 전에 무역회사 다닐때 회사의 사내 WMS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익히 친하게 보내던 사이였다.

    "부장님! 지금 회사에 부장님 자리 하나  남겨두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오세요!"

   난 고맙다고 인사 올렸지만 고민이 많았다. 좋은 소식이긴 한데 … 워낙 허풍을 잘 치는 양반이라, 이번에 또 어떤 허풍을 치는지 가늠을 할수 없기때문이였다. 그리고 내가 서울에 올라가면 우리 부부는 또 별거해야 하고, 서울에 가면 또 셋방 맡아야 해서 이중으로 비용이 나가 된다.

    " 한번 속는셈 치고 그양반 한번 믿어 볼까 ?"  아내랑 상의하고 난 다음날 곧장 서울로 올라갔다. 코로나 때문에 회식이 안되어 대표는 나를 회사의 회의실에 배달식을 시켜서 간단한 환영식을 해주었는데 뻥은 아니였다. 나는 대표와 년봉,직급등을 개별 논의결정하고 입사날자를 약속하였다.

   이렇게 나는 작년 2021년 8월 30일 "낙하산"식 급습으로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내가 입사하기전에 이미 총책과 파트장이 있었지만 그 위로 없던 직위를 만들어서 비집고 들어간 자리인듯했다. 늘 그랬듯이 한국생활은 새로운 직장에 입사하면 눈치싸움부터 시작해서 빨리 간파하고 자기 자리를 찾는게 중요했다. 그리 하려면 맨 바닥부터 일을 배워야 했는데 정신적 부담이 컸다. 회사는 전에 5명구성인 Small 회사였는데 투자를 받아 지금은 50여명인 중소기업으로  급 부상하였고, 중국국적 직원으로는 나 한명뿐이였다. 

   외롭고 험난한 자리였는데, 난 나름 적응하느라 무진장 애를 썼다. 그래도 옛날 인연으로 끈끈했던 대표가 가끔씩 만나면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었지만 개인회사가 아닌 주식회사여서 대표가 나를 도울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전에랑 달리 뻥인지 진짠지 알수 없는 구두약속을 하기도 했는데 … 몇일 지나면 "제가 그랬던가요?" 이런식이라서 화뜰 놀랄때가 종종 있었다. 이젠 소속직원이니 전에랑 비교하면 안될거 알지만 모름지기 서운할때가 많았다.

   그동안 회사에 적응하면서 발생했던 이러저러한 일들을 글로 적을라면 10여편은 적어야 할것 같다. 오늘은 일기처럼 쓰는 블로그이니, 여기까지 …

   회사에서의 나의 자리는 그냥 말 그대로 붕 떠 있는 직급과 년봉이 높지만 실권이 없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엄청 위험한 자리였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겹게 걷던 어느날 …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사업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번 실패의 맛을 보았던 대표가 나한테 홀연 찾아와서 중국 지사장으로 발령하겠으니 준비해라고 하였다. 마침 회사의 자리가 부자연스러운데다가 나의 능력을 발휘해서 실적을 낼수 있는 기회가 있는 중국이라고 하니 기쁘지 않을수가 없다. 

   올해 2022년 4월 20일, 회사에서는 정식으로 인사 발령이 났고 나는 또 아내를 한국에 남겨 두고 중국행의 길에 올랐다.

   중국사업에 대해서는 지금도 진행형이며, 中美간 갈등과 中韩간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때문에 한국 본사에서는 중국투자에 대해 아직도 검토 또 검토중이다.

   이번 중국사업에 대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난 지금의 여기까지라도 만족하고 싶다.

   이 나이에 난 또 한번 인정받았고 또 한발 더 성장하였으니까 … 그리고 折腾도 이만하고 싶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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