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산이라는 곳에서 태여나서 자랐다. 청산은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막혀있는 동북의 한 평범한 산간벽촌이다. 수전은 없고 한전농사만 하는 곳이였는 데 산비탈 밭이 반이상이고 무상기가 짧다보니 소출이 시원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을이면 메돼지가 내려와서 다 된 곡식을 절단내는 일도 례사라서 청산사람들에게 농사는 별로 기댈것이 못되였다. 그나마 산을 끼고 살아서 산부업이 있으니 망정이지 농사만 해서는 죽도 못먹을 판이였다.
이렇듯 척박하고 농사도 안되는 고장이 다행스럽게 감자농사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되였다. 산비탈의 쑥이나 싸리나무를 걷어내고 가랑잎이 썩어 내려앉은 검은 부식토를 뚜져서 감자를 심으면 그야말로 아이들 머리통만한 감자들이 땅밑으로 길게 뻗어나가며 주렁주렁 열리군 했다. 산짐승피해만 막아내면 감자농사는 웃음이 나올만했다.

껍질 벗긴 통감자 (사진제공에 아바이)
감자농사가 잘돼서 청산은 감자골이라고도 불렸다. 청산사람들은 감자를 많이 심었고 그러다보니 감자를 이용해서 해먹는 음식도 참으로 다양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쪄먹는 거였고 겨울이면 노상 재불에 감자를 묻어서 구워 먹으며 긴긴 밤을 아무 때건 벌컥 하고 내 집처럼 뛰여드는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보내군 했다. 구운 감자는 반으로 자르면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터지군 했는데 먹는 동안 입가에 가루가 허옇게 묻고 손에도 부실부실 감자가루가 묻어나서 자주 손을 비벼 가루를 털어내야 했다.
내가 열서너살 되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청산사람들은 집집마다 먹을 쌀이 빠듯했다. 그래서 감자를 납작하게 저며서 가마에 펴고 한번 부르르 끓어오르면 거기에 입쌀이나 조쌀을 앉혀 밥을 했다. 큰 소래에 밥을 담아 중간에 놓고 먹던 때였는 데 새로 지은 밥에 놓은 감자는 그나마 먹을만 했지만 점심때가 되면 감자가 식어버려 아릿한 냄새와 이상한 군내가 나서 도로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아이들은 자연히 감자를 한쪽으로 밀어내며 쌀을 골라 숟가락질을 했는데 부모들한테 혼나기가 일수였다.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건 감자가마치였다. 마흔두살에 나를 낳은 늙은 엄마는 밥을 먹고 나면 늘 가마에서 잘 마른 가마치를 가마훝개로 벅벅 긁어서는 양푼에 담아서 가마목에 던져놓군 했다. 얇고 바삭하고 고소한 감자가마치는 언제 먹어도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감자가마치 ( 사진제공에 평강)
배고프던 그 시절에 청산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자는 참으로 효자같은 존재였다. 6월말쯤 되어 감자꽃이 피였다 지고 작은 록색의 열매가 맺힐때쯤이면 엄마는 이제 먹을만한게 있을거라고 하면서 광주리를 들고 감자밭으로 갔다. 엄마가 땅이 갈라진 곳을 호미로 살살 뚜지면 신기하게도 닭알만큼한 크기의 뽀얀 햇감자가 나오군 했다. 그렇게 캐온 햇감자는 고추를 섞어 볶아 먹기도 했고 장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풋옥수수와 함께 삶아 저녁 한끼는 그걸로 때우기도 했다.
가을이면 청산사람들은 집집마다 감자를 몇십마대씩 수확했다. 감자는 크기에 따라 몇등급으로 분류했는데 크기도 적당하고 속도 가지 않은 일등감자는 청산학교를 사이둔 림장마을의 사람들한테 팔아서 돈을 만들었다. 그 외의 감자는 장국을 해먹거나 볶아먹거나 간장에 졸여서 반찬으로 먹었고 더러는 갈아서 전분을 냈는 데 내가 어릴때는 손으로 한사람이 하루에 몇마대씩 감자를 갈았다니 농촌아줌마들의 고달픔을 알수 있다. 그나마 내가 열살쯤 되던 때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감자를 씻어서 쏟아넣으면 절로 갈아지는 기계가 있었다. 가을이면 강옆에 기계를 설치해놓고 집집마다 기계에 감자를 갈아서는 큰 채에 건더기를 퍼담고 앙금을 걸러냈다. 앙금이 바닥에 가라앉으면 물을 찌워내고 새로 물을 붓고 다시 앙금을 밥주걱으로 뜯어내서 가라앉히는 작업을 했다. 반복해서 우려내다보면 벌건 감자물이 점차 말갛게 되고 밑에 가라앉는 앙금도 점차 하얘졌다. 그걸 말려서 채로 치면 고운 전분가루가 얻어지는 것인데 누구네 집 감자전분이 더 희고 곱냐를 두고 아줌마들사이에서 은근한 경쟁이 일기도 했다.
감자전분은 더러 시내 장마당에 가서 팔기도 하고 익반죽해서 얇게 밀어서는 투명하고 파뜰거리는 " 감분밴새 "를 하기도 했지만 주로 하는 음식은 일명 " 감분국수 " 라고 불리는 감자전분으로 누른 국수였다. 백반을 넣고 익반죽을 해서 국수틀에 넣고 국수를 눌렀는 데 익반죽이 잘돼야 국수가 질기고 생전분냄새도 안나고 맛있게 되는거라서 아줌마들은 익반죽이 설지 않게 잘 하느라 손바닥이 델 지경이였다. " 감분국수"는 귀한 손님이 오거나 군일때면 빠질수 없는 음식중 하나였다. 내가 아홉 살즈음 한 동네에 사는 외사촌오빠가 겨울에 결혼식을 했는 데 버들로 엮은 커다란 광주리에 흰 " 감분국수 " 를 몇광주리나 눌러서는 강에 가지고 나가서 얼음물에 헹궈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강판에 간 감자 ( 사진제공에 아바이 )
앙금을 우려내다보면 마지막 부분은 찌꺼기가 많아서 우려낸 전분이 거무스레하고 손으로 만져도 뽀득거리지 않고 푸실푸실했다. 밴새나 국수를 하기에는 빛깔이 안 좋은터라 그런 전분은 콩기름을 달이다가 볶아서 먹었는 데 꼭 마치 파뜰거리는 회색의 묵 같았다. " 감분범벅 "이라고 부른는 음식이였는 데 양념간장을 해서 먹으면 참 맛있었다. 앙금을 뺀 건더기는 손으로 잡아보면 푸석푸석했는 데 둥글넙적하게 빚어서 돼지우리우에 올려놓고 말렸다가 겨울내내 돼지죽가마에 한덩이씩 넣어 끓여서 돼지를 먹였다.
감자를 강판에 갈아서 지짐도 많이 해먹었는 데 지금은 모양이 잘 잡히라고 감자를 간것에 밀가루를 섞고 달착지근한 맛을 내느라고 양파를 갈아넣기도 하지만 그때의 감자지짐은 순 감자를 간 것을 커다란 국자로 떠서 쇠가마나 평가마에 기름을 두르고 어른 손바닥보다도 더 큼지막하게 부쳐냈었다. 엄마는 감자지짐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고 애들 넷을 가마주위에 앉혀놓고 연신 구워내서 접시가 빌세라 놔주군 했다. 따끈한 감자지짐이 맛있다고 호호 불며 엄마가 부쳐주는 지짐이 접시에 놓이게 바쁘게 굽을 내던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크고 진한 엄마의 자식사랑인지를 미처 몰랐었다.

오그랑죽 하면 대개는 입쌀과 차입쌀가루를 섞어서 가루 낸 반죽으로 빚은 새알심을 떠올리겠지만 청산에서는 오그랑죽에 들어가는 " 오그래 "도 감자를 갈아서 빚었다. 감자를 갈아서 전분을 내듯이 물이 잘 빠지는 면주머니에 넣고 물을 추가해가며 여러번 짜면 앙금이 빠져나가고 주머니에 건더기만 남게 된다. 다라이에 앙금이 씻겨나간 물을 가라앉히면 앙금이 밑에 내려앉게 되는 데 그러면 조심스레 물을 찌워던지고 그 앙금에 주머니의 건더기를 섞어서 반죽해서 " 오그래 " 를 빚었다. 감자 " 오그래 " 는 동그랗게 빚은 뒤 한번 살짝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었는 데 이는 괜히 멋모르고 꽉 씹었다가 뜨거운 감자 " 오그래 " 에 입천장이 델가봐 그렇게 하는 거라고 했다. 팥을 삶아 으깨고 걸러낸 물에 입쌀을 조금 넣고 끓이다가 감자 " 오그래 " 를 떼넣고 만들었는 데 엄마는 거기에 넣는 입쌀마저 아껴서 조금 넣으려고 하고 나는 더 넣으라고 떼를 썼다. 나는 오그랑죽이 구미에 맞아서 오그랑죽만 하면 한사발을 다 굽내군 했다. 엄마는 내가 오그랑죽을 잘 먹는 다고 번거로움도 마다하고 사나흘이 멀다하게 감자를 갈아 죽을 쑤군 했다.

감자오그랑죽 ( 사진제공에 아바이)
감자는 또 떡을 쳐먹기도 했다. 감자를 삶아서 매우매우 으깬 뒤에 떡메로 쳐주면 탄력이 생겨서 쫄깃하니 맛있었다. 그 떡을 수제비를 뜨듯이 조금씩 떼서 또 감자를 볶은 감자국에 넣어서 끓여먹기도 했는 데 별미였다. 겨울이 되여 한가해지면 사람들은 감자밭에 가서 가을에 흘린 감자가 언 것을 주어오기도 했고 알이 잘아서 깍아먹기가 힘든 감자는 일부러 얼려서 언감자를 만들기도 했다. 꽁꽁 언 감자는 집에 들여다가 물에 담가서 녹인 뒤에 껍질을 벗겨서 감분물을 입힌뒤 쪄먹기도 했고 말려서 가루를 내기도 했다. 언감자가루는 반죽해서 소를 넣고 " 언감자밴새 "를 해먹기도 했고 납작한 모양으로 빚어서 콩을 박은뒤 쪄먹기도 했다.
근 30년 가까이 되는 세월이 흘렀다. 감자골의 아이들은 오로지 땅에 의지해 살던 부모세대와는 달리 지구촌 여러곳에 뿔뿔이 흩어져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나도 고향을 떠난지가 20년이 훌쩍 넘었다. 몇년전, 친구들과 함께 청산에 갔었다. 20여년만에 찾아갔지만 청산의 산과 강은 시간이 정지된 듯 기억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감개무량하게 고향산천을 둘러보며 자연스럽게 감자에 대한 추억을 들춰냈다. 지금이라도 저 산자락의 묵은 덤불을 걷어내고 감자를 심는다면 틀림없이 어릴적 먹었던 그 흰가루가 푸슬푸슬 날리던 감자가 수북히 열릴거라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이제 청산에 남아있는 고향사람들도 생활이 유족해져 쌀걱정을 안하는 건 물론이고 랭장고에 고기도 넣어놓고 있다. 그러니 굳이 감자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느라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고 우리도 추억일뿐 고향의 산자락에 감자를 심어 음식을 해먹을 일은 없을것이다.
살면서 유난히 힘이 들고 축축 처질때가 있다. 그런 날들에 나는 척박한 땅을 뚜지고 감자를 심고 가꾸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던 아버지들과 뜨거운 감자에 데여 늘 손바닥이 벌겋던 청산의 엄마들을 떠올려 본다. 그러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들이 별것 아닌것처럼 느껴지군 한다.
현실은 고단하고 많은 것들은 우리의 힘으로 바꿀수 다. 감자 하나외에는 잘되는 게 없던 고장에서 환경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감자농사를 짓고 감자를 활용하여 각종 먹거리를 만들어 먹으며 살아가던 청산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어진 내 삶의 테두리안에서 옥을 발견할줄 아는 사람들이였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 외에는 다 별것 아니라고 늘 버릇처럼 말하며 크고 작은 곡절들을 겪고 나서도 언제나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힘을 내서 의연하게 살아가던 사람들, 삶이 고달픈 시간들이 오면 나는 그 씩씩한 사람들을 떠올리군 한다. 그러면 내 앞에 밝은 빛 하나가 보이는 듯 하고 나는 다시 일어설수 있는 힘을 얻는다.
글쓴이 하몽

우와!!!!
감자의 향연임다에!! 곱돌에 갑제장이 볼롱볼롱, 입안에서 갈기 나는 장감제… 생각남다.
옛날 외가마을에 가면 큰맏아매네 집에 쨈배가매다가 감제지지미 해줬음다. 글에서 나온 것처럼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크게. 놀다 먹다가 놀다 먹다가 해서 그때 기록이 여덟개 반까지 먹은게 아직두 깨지지 않고 있슴다.
내 감제떡 치므 그 사진도 올레보깁소. ㅋㅋ
오늘에야 보는군요. 우리 할머니가 그러셨다더군요 . 감자는 썩어두 먹구, 얼어두 먹구 . 다 먹는다고 . 청산은 척박한 고장이었다고 하나 순박한 사람들에 의해 감자 같이 건실하고 말분(?) 아이들이 자라났나봐요. 이를 테면 하몽서껀. ㅋㅋ
청산의 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