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게이트

확실히, 봄은 확인의 계절이다.


지난 벚꽃과 이름 모를 뭇꽃들이 앞다투어 이쁨을 자랑하며 피어오르던 봄날이었다. 창밖으로 그 화사한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기엔 자차보다 버스 창가가 제격인 그런 계절이다.

인천으로 직장을 옮긴 뒤 직장과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내 차는 출퇴근용이 아닌 '주말 나들이용'으로 신분이 바뀌어 있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시동을 걸까 말까 할 정도로 대중교통의 느긋함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아내를 마중 나가는 길에도 자연스레 버스 시간표를 먼저 살피게 되었다.

중국에 있는 딸이 보고 싶어 현지에 다녀오는 아내를 마중 나가는 길. 톨게이트비에 주차비, 휘발유 값까지 따져보니 괜스레 아까운 마음이 들어서 아내와 상의 끝에 마중 갈 때는 가벼운 몸으로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가져오는 캐리어 짐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토요일 아침 일찍, 도로변 꽃구경하기 딱 좋은 공항행 330번 버스의 맨 오른쪽 좌석에 몸을 실었다.

집에서 인천공항 제1터미널까지는 약 30km 정도다. 내 차로 가면 25분이면 충분할 거리지만, 버스는 구비구비 정류장을 들러 가다 보니 한 시간은 넘게 걸린 것 같다. 그래도 덕분에 길가에 핀 꽃구경도 느긋하게 하고, 휴대폰으로 뉴스도 챙겨 보았으니 나름 풍요로운 여정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전광판을 보니 착륙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짐을 찾고 입국장까지 나오려면 또 한 시간은 더 걸릴 터였다. 우선 화장실에 들려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컵 얼음에 봉지 커피를 부어 넣고 빨대를 꽂으니,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공항표 냉커피'가 완성됐다.

그때 문득 아내의 잔소리가 생각났다. "길도 똑바로 못 찾으면서 마중은 왜 왔냐"며 내 뒤꽁무니에 대고 타박할 아내의 모습이 그려져 미리 택시 승강장 위치를 확인해두는 '정찰' 작업에 나섰다. E 게이트 출구에서 한참을 걸어가야 택시 타는 곳이 보였는데, 거기에 눈도장을 딱 찍어두고 나서야 개선장군처럼 여유롭게 입국장 쪽으로 되돌아왔다.

가는 길에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인형 같은 외국 여성이 마주 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슬쩍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입국장 E 게이트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기분이 묘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나를 보며 방긋 웃음을 짓는 게 아닌가.

"음, 역시 내가 동안이긴 한가 보네. 오늘따라 좀 매짜(?) 보였나?"
나는 손에 든 얼음 컵을 짤랑거리며 묘한 자아도취에 빠져 아내를 기다렸다.

드디어 커다란 캐리어를 밀며 아내가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드는데, 나를 본 아내의 첫마디는 환영 인사가 아니었다. 아내는 파안대소하며 내 아래쪽을 가리켰다.

"여보, 당신… 거기! 남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요! 아하하하!"

순간 세상이 멈추는 것 같았다. 황급히 내려다보니 지퍼가 그냥 열린 정도가 아니라, 아주 '대개방'이 되어 있었다. 젠장, 이게 웬일인가. 아까 화장실에서 일 보고 한 시간 넘게 이러고 다녔다는 거 아닌가. 인형 같던 외국 여성의 미소도, 행인들의 친절한 웃음도 모두 나를 향한 찬사가 아니라 '개방된 남대문'을 향한 실소였던 셈이다. 이른바 '국제적 망신'이 따로 없었다.

부끄러움도 잠시, 급히 뒤돌아 지퍼를 올리며 "아까 분명히 올린 것 같은데…"라고 혼잣말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나처럼 그 누군가를 마중나왔던 아저씨 한 분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인자한 위로의 미소를 건넸다.

"괜찮아요. 봄이라서 그래요…"

그 한마디에 민망함은 어느새 헛웃음으로 번졌다. 그래, 봄이 오긴 왔나 보다. 내 바지춤에도 봄바람이 드나들 만큼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화장실을 나설 때마다 마치 출격 전 점검을 하는 조종사처럼 엄숙하게 지퍼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확실히, 봄은 확인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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