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언아, 오늘은 엄마의 고향 연변 있잖아, 연변의 ‘조선언어문자의 날’이래. 

– 그게 무슨 날인데요? 

– 어, 여기는 10월 9일이 한글날이잖아. 

– 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거 기념하는 날… 

– 맞아, 엄마 고향에서는 한글을 ‘조선글’, ‘조선언어문자’라고 하거든. 그리고 그 기념일을 오늘 9월 2일로 정했대.

  어제, 그러니까 9월 3일 연변 성립 기념일 전날 퇴근하여 아홉살 난 큰애와 나눈 대화다. 큰애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여기서 생활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고향인 연변에는 단 한번뿐이지만 3년 전의 한겨울에 눈으로 덮인 연길에 다녀온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을 달리면서 당시 여섯 살이던 아이가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 엄마, 여기가 남극이에요? 북극이에요?”라고 연신 물었었다. 

  어제 여러 매체와 위챗 모멘트를 이른바 도배(刷频)를 한 뉴스와 메시지가 바로 ‘아리랑꽃’ 투표에 관한 호소 내지는 독촉의 글과 “조선언어문자의 날” 경축 메시지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내 고향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정부에서 2014년 처음으로 9월 2일을 ‘조선언어문자의 날’로 정하기로 발표했다고 하니 올해 들어 3주년을 맞은 것이다. 

  우리의 문자를 기념하는 날이 있다는 것은 작년에 뉴스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작년에 온라인 매체 조글로를 통해 조선언어문자에 대한 여러 전문가들의 기고문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조선언어문자의 날’ 기념일 분위기를 느꼈던 것과 달리 올해 공식 매체는 조용하다. 작년에는 이 날을 기념하는 노래를 공모하고 다섯 곡을 엄선하여 CD를 만들어 발행하기도 했다는데, 바이두(baidu.com)에 검색을 해도 음원이 검색되지 않아 아쉽다. 

  다행히 1인 미디어인 위챗(wechat) 모멘트에는 개인들의 축하 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오고 리트윗(转载)되고 있으며, 필자가 속해 있는 여러 조선족 대화방(群)에서도 ‘조선언어문자의 날’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고 관련된 얘기를 잠깐씩 나누는 분위기이다. 우리의 문자를 기리는 날이 있다는 게 이미 일반에 많이 알려졌고 또 이 기회를 빌려 더 알려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 

◆ 연변 조선언어문자의 날 포스터

– 이렇게 문자를 기념하는 날이 있다는 건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야. 

– 그래요? 

– 우리 지구에 약 70억 인구가 살잖아.

– 네. 

– 그 70억 인구가 모두 한 가지 이상의 말을 할 줄 알아.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 맞아요, 우리 말도 있고요. 언어의 수가 천 가지 넘는다면서요?

– 응, 그런데, 그 언어들이 다 문자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야. 문자를, 그니까 글을 아예 쓰지 않는 민족도 있고, 또, 자기의 문자가 없어서 영어의 로마자나 다른 나라 문자를 빌려 쓰는 언어들도 있어. 

  오늘날 지구에는 약 7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청각장애가 있는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릇 사람이라면 모두 하나 이상의 언어로 말을 한다. 중국에서만 해도 조선어, 한어, 몽고어, 짱족어(티벳어) 등 수십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세계적으로는 언어의 가짓수가 6,000여 가지에 달한다. (언어와 언어의 경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적게는 3천여 가지, 많게는 약 만여 가지의 언어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전체 언어 중에 약 5천 가지의 언어는 그 사용자 수가 10만 명 이하라고 한다. 1999년 기준으로 사용자 수가 100명 미만이어서 소멸의 위기에 놓인 언어도 약 500가지라고 하니, 지난 몇 년간 소멸된 언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어(한국어)로 말하고 조선글(한글)로 글을 쓴다. 중국 조선족 180만 명, 조선에 약 2천만 명, 한국에 5천만 명, 구 소련 지역, 일본과 미국 지역의 조선인/한인까지 합치면 그 규모가 대략 8천만 명이니 실로 적지 않다. 이는 여러 언어 중에 열세 번째로 많은 사용자를 자랑하는 수치다. 또 바꾸어 말하면, 우리 말을 한다는 것은 세계 인구의 약 1/80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한편, 우리의 말과 말소리를 적는 우리 글은 익히기가 쉬워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대부분이 글도 쓸 줄 안다. 살아 계셨더라면 백세를 바라볼 우리 할머니께서도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으시지만 우리 글을 곧잘 쓰셨고, 이 글에 등장하는 우리 큰애도 많은 다른 또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학습의 과정이 없이 자연스레 글을 깨쳤다. 

  게다가 말과 글이 있다 하더라도 날짜까지 정해서 말과 글을 기리는 일은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다. 우리의 글처럼 창제한 시기와 사람이 명확한 문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문자는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기록이 불가능하다. 먼저 어느 시점부터 말로 의사소통을 해 오다가 그 말을 기록할 필요가 생겨서 돌이나 천 같은 데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다가, 그것이 차츰 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자의 발생 형태이다. 

◆ 일상에서 만나는 세종대왕님 – 한화 만원권

– 엄마, 근데 왜요? 왜 한글이 아니고 ‘조선글’, 그리고 ‘조선언어문자’ 그렇게 불러요?

– 그게 말이야… 

  같은 문자인데도 우리가 쓰는 글은 ‘한글’, ‘조선글’, ‘조선언어문자’로 달리 불린다. 표기의 방법도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같은 말을 적는 하나의 문자이고, 솔직히 필자는 이를 구분해서 달리 부르는 게 무척 거북하다. 필자는 연변에서 조선족으로 태어나고 자라다가 한국에 유학을 와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의 대학교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관련한 과목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수업에서도 한국인이 아닌 다른 나라 유학생이 있거나 또는 외국어와 구분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말’, ‘우리 글’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집한다.

  억양이 다르다고, 사용하는 어휘가 조금 다르다고 남한의 한국어와 북조선의 조선어, 중국 조선족의 조선어가 별개의 언어일 수는 없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주요 수단이고, 이른바 ‘조선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만나도 큰 문제 없이 의사소통을 하고 있으니 하나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언어학적으로 언어와 언어를 구분 짓는 일은 엄밀한 검증 방법을 요하지만,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문화적 뿌리가 같은지의 여부라고 하는 두 가지 기준을 사용한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볼 때 가끔 서로 못 알아들어 되물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또 남북이 분단된 지 60여년, 중국 조선족이라는 이름이 불리기 시작한 게 약 60여년 이전까지는 엄연히 하나의 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문화의 뿌리에서 나온 우리 말이라고 하는 나무가 ‘조선어’와 ‘한국어’라고 하는 가지를 뻗어 잎을 무성히 키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중국의 표준어인 보통화(普通话)의 근간이 되는 북방방언은 광동지역의 광동어와는 말로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한데도 다른 언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고중 다니던 시절 목 터져라 불렀던 ‘一生何求’, 보통화에서는 ‘이 썽 허 츄’인데, 광동어로는 ‘약 쌍 하 코우’가 아니던가. 

  우리의 글은 1443년에 세종대왕이 처음 창제했을 때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불렸고 한문과 구분하여 ‘언문’(諺文, 선비 ‘諺’)으로 주로 불렸다. 그 밖에도 "일제강점기까지 ‘반절, 암글, 중글, 본문, 상말글, 국문, 조선문, 조선글, 한국글, 가갸글, 배달글, 한자(韓字), 우리글, 한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김하수 외, "한국의 문자"에서) 그러다 1913년에 독립운동가이자 유명한 1세대 한국어 학자인 주시경 선생이 ‘크고 넓음’을 뜻하는 고유어 ‘한’을 ‘글’ 앞에 붙여 ‘한글’로 부르면서, 남한에서는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해 오고 있다. 

  북쪽은 남북이 분단되는 역사 사건과 더불어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쓰면서 ‘조선글’로 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 조선족이 ‘조선언어문자’로 부른 것은 중국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불린 1950년대 초반 이후의 일일 것이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조선사람이 조선글을 알아야지.’라며 어린 필자의 손을 잡고 룡정중심소학교에 입학을 시키셨었다. 

◆ 일상에서 만나는 세종대왕: 서울 광화문 앞에 있는 세종대왕님 동상)

– 그래도 있잖아, 엄마 고향에서나 여기 한국에서나 하는 말은 같은 거야. 너도 가서 이모들하고 얘기를 나눌 때 막힘이 없었잖아. 그리고 한글, 조선글, 조선언어문자는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우리의 말을 적는 같은 문자야. 

– 네~ 맞아요. 

– 그런데 우리 글을 기념하는 날이 또 있어. 

– 정말요? 

– 어, 북녘에서는 1월 15일을 기념일로 한대. 

– 왜요? 

  우리 글의 초기 형태인 ‘훈민정음’은 지금부터 570년 전인 1443년, 조선조의 세종 때 창제되었다. 조선 왕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글의 창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되어 있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때만 해도 우리의 말을 적을 글이 없어서 한자를 빌려 썼던 것이다. 위의 내용을 현대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1443년 12월 30일날, 그러니 음력 섣달 그믐날에 적힌 기록이다. 이를 양력으로 바꾸면 1월 15일이고, 조선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하여 1월 15일을 조선글을 기념하는 날로 정한 것이다. 

  1443년에 제정된 훈민정음은 당시 한문을 고수하던 보수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리하여 3년 뒤인 1446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다. 한국의 한글날 10월 9일은 바로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어림잡아 양력 날짜로 환산한 날이다.

◆ 조선왕조실록의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기록(어둡게 표시된 부분)

  같은 언어에 같은 문자인데 기념하는 날도 다르고 불리는 이름도 다르고 표기법도 다른 현실에 서글퍼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서로 달리 불리고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당면한 언어 문제도 다른 점을 감안하면 꼭 서글퍼할 만한 일은 아니다.

  조선과 한국은 세계에 우리의 말과 글을 더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 내 소수자로서 문화 보호의 측면에서 말과 글을 후세에 계승시키고 지켜내는 것이 당면한 가장 큰 과제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실정에 맞게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설립일 전날을 기념하는 날로 정한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다만, 행정적으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기념일로 되어 있지만, 중국 내 180만명의 조선족 모두가 함께 기리는 날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정보시대의 장점을 살려 온라인으로 글짓기, 웅변, 글씨 뽐내기 등등 여러 가지 문화 행사를 개최한다면 조선족 누구나 어디에서든 함께 기억하고 즐기는 조선족의 명절이 되지 않을까 한다.

  조선언어문자, 조선글, 한글, 비록 글의 이름도 기념하는 날도 다르고, 맞춤법도 조금 다르지만, 엄연히 같은 글로서 우리의 말과 말소리를 적는 우리 모두의 글임에 틀림없다. 조선언어문자, 조선글, 한글 모두 어우러져 우리의 말과 이야기를 살찌우면서 오래오래 지켜지면 좋겠다. 그리고 바라건대, 우리가 하는 말과 글이 너무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로, 글로 점점 더 거침없는 소통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이 글은 wechat 공중호 '지행자(ID: zhixingzhe512)' 2016년 9월 3일자에 실린 필자의 글을 조금 깁고 고친 것이다. 올해는 조선언어문자 기념일 7주년인데 조선족 위챗 공중호나 개인 계정이나 4년 전과는 달리 침묵을 하거나, 잔치 대신 초상 치르는 분위기였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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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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