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사랑은 소중하다. 몸으로비비고 손으로 만지고 입맞춤을 하고마주 바라보고…그렇게 온 몸의 매 하나하나의 세포마다를 활짝 열어 상대를 느껴가는 것은 참되고 행복한 일이다. 살갗과 살갗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내밀한 교감을 우리는 론리적으로  자세하게 분석해낼 수 없다. 다만 충만하는 세계에로 몸과 마음이 들어설 따름이다. 혹 엑스레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온 몸에 새겨진 사랑의 무늬를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 과학적인 기계가 발명되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그러나 생은 사랑에 의해 살아지며 몸에 의지해 사랑은 깊어지고 커진다.
        우리는 늘 50대에 40대를 아쉬워하고 60대에 50대를 안타까워하다가 70대나 80대쯤 되여 겨우 숨을 몰아쉬며 휘청일 때 자신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음을 한탄한다. 기어이 몸에 대해서 바른 건강을 지켜오지 못했음에 대한 후회와 원망일가? 아니다. 그것은 제 몸 하나의 갈망과 욕망을 몰랐거나 이 악물고 외면해온 것에 대한 자조와 비애이다.
         달아오른 몸을 핥아줄 사랑이 그리운거다. 그런 사랑과 질주하고 싶은거다. 온몸을 열어 타오르며 연소하고 싶은거다. 정신이나 영혼이 아닌 맨몸으로 그리고 길고긴 죽음이 아닌 짧은 한순간이라도 살아있음으로 말이다.
        맑고 높은 정신이나 영혼적인 사랑을 나누거나 죽음을 함께 하며 영원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그럴 듯한 위로이고 유혹이겠지만 육신을 떠난 영혼이나 정신은 없으며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엔 아무것도 없다. 시간도 없고 시간속을 흐르는 숨결도 없고 꿈도 행복도 모두 없다.
         인간은 다만 풀떡이는 심장으로 번개같이 번쩍이며 온 몸으로 전률해야 한다. 땀 흘려 사랑할 일이다.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서지도록 전력을 다해 거침없이 사랑할 일이다. 정신적인 사랑을 한 이들이 부러울 것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천하고무식하고 저속하고 경박한 사랑을 하는 몹쓸 녀자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싱싱한 몸의 자유로운 사랑을 믿는다. 그것은 삶을 랑비해도 괜찮은 시간이다. 그것이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것이라고 비하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몸짓이 가장 자연스럽고순수한 자연자체이다. 굳이 정신적인 사랑을 미화시킬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럴 겨를이 없다. 사랑에 몸을 던져가고 싶은 것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은 언어만으로 정신만으로영혼만으로 사랑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헛것의 사람을 가슴에 담고 오직 상상만으로 사랑할 수 없다. 진정 그럴 수 있는 이는 한없이 용감하거나 자기기만일 것이다. 그런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위로를 받는지 정말 행복한지 따져묻고 싶다. “난 지금 마음으로 너를 안고 있어. 난 지금 마음으로 너를 포옹하고 있는 중이야. 난 지금 마음으로 너랑 섹스를 하고 있어.”라고 말로 사랑하는 관계는 온몸에 소름이 돋게 만든다.  
        보고싶은 사람을 향해 튼튼한 두다리를 움직여 달려가 그리운 얼굴을 부드러운 두손으로 감싸쥐고그의 날숨이 나의 들숨이 되여 고르롭게 숨을 쉬며 따뜻이 마주바라보거나 두팔 벌려 와락 끌어안아주며 서로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뺨에 뺨을 부벼주거나 잠든 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잔등을 토닥여주며 누군가의 시구처럼 곁에 있으니까 그냥 자라고 속삭여주거나 위대한 동경을 담은 종족 번식이나 모두가철저히 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의진실인가…이 다가 행복하지 않는가. 이 다가 싱그럽지 않은가.육체가 없이 육체의 감각이 없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순순히 육체의 힘에 따르며온전히즐겁게 누리는 것 역시 육체의 엄연한 론리이며 숙명이다.
       그걸 행하지 못할 때 우리는 생이 지옥이 된다. 몸뚱이로 피부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은 형벌이다. 그속에서 조용히 미쳐갈 것이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감정이였다면 말이다. 몸은 생명의 규률이다. 그 옛날 남편이 죽으면 자신의 한몸을 초개같이 여겨 따라 죽어가거나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독하게 가두며 살아온 녀자들에게 바쳐진 렬녀비속에서 이제는 자신의 몸을 살려달라는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녀들은 어쩌면 그 사회의 관습하에서 자신의 몸의 반란을 다스리기가 죽기보다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닐가. 혹여 죽지 못한 그들이 살아있은 많은 날들은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시간들이였을지도 모른다. 고금중외의 그 많은 시인들이 읊은 그 많은 시구들의 그리움 또한 살갗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였을가. 살결을 맞댈 때의 친밀함을 갈망한 것이 아니였을가. 몸의 감각에 묻고 몸에 굴종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관습이나 규범이나 윤리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어 날것의 몸짓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본연의 깊고 건강한 삶이다. 몸을 버린 사랑은 피와 살을 버린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풍자이며 생에 대한 비난이다. 그것은 대단한 용기이지만 부당한 오만이고 거짓일 뿐이며 인간의 속성을 부정하고 허영심에 의해 정신에 안주하려는 가련한 짓일 뿐이다. 뜨거운 몸짓 그 뒤에 혹여 허무나 쓸쓸함이 남더라도 몸은 결코 별게 아닌 것이 될 수 없다. 몸을 버리는 자는 결국 비참하고 가엾고 우스꽝스럽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과 육체적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육체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그것이 살아있음이다.
       몸을 넘어선 영성만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말자. 몸으로 경험한 세상이 거짓없는 진실이다.  이 세상 온갖것의 차거움과 뜨거움을,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밝음과 어둠을, 건조함과 촉촉함을, 정지와 움직임을,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을… 그 모두를 우리의 몸은 얼마나 정직하게 감지해내고 있는가. 살 속에 뼈속에 있는 갈망을 부끄러워 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생생하게 살아내야 한다. 몸의 가치를 기어이 따지라면 나는 그 구체적인 수치를 답할 수 없다. 몸은 몸일 뿐이다. 그래서 쉽게 부려도 될 일이며 그 평범성때문에 또한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있으므로 지극히 중요하고 중요할 뿐이다. 몸만의 중요함을 강조함이 아니라 몸 역시나 정신이나 령혼과 같이 중요함을 말함이다.  몸의 매 하나하나의 행동 또한 정신의 변화에 의한 것이며 몸의 변화에 의해 정신 또한 살오르거나 황페해져가니 마음의 문제 또한 몸의 문제이므로 서로의 무게를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 역시 육체이며  살아있음은 결국 육체의 살아있음인데 고개 돌릴 수 있는가?몸을  거스르지 말 일이다. 서투른 초연함을 가장하여 생의 절박함과 강렬함을 대체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 몸의 무한한 가능성을 누리며 좀 더 풍성한 삶을 보내야 한다. 이 험한 세상속에서 생존하느라고 이런저런 하많은 일들에 지치여서,혹은 당금 어쩔 수 없는 먼 거리때문에 몸의 시간을 미루거나 가끔은 잊거나 하며 살 일이 아니다. 몸의 시간을 앗기며 살지 말아야 한다.  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제 늙으면 뼈마디가 삐걱일 것이다. 이제 머리카락도 희여가고 빠질 것이다. 이제 단단한 가슴도 풀려갈 것이다. 한번뿐인 육체이다. 우리의 희미해진 체온과 희멀건 눈빛속으로 여전히 세상속의 모두는 섞여들고 받아들이며 저들만의 눈부신 몸짓을 할 것이고 그 몸짓들의 소리로 넘쳐날 것이다.
        그러므로 더 시간이 흐르기전에 나는 몸을 미친듯이 아끼고 아낌없이 랑비하고 싶다. 그것이 결국 내 몸을 가장 간절히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므로. 그것만이 나를 랑비하지 않는 진실된 삶이므로.
       아직 살아있는 내 따스한 몸뚱이가 사랑스럽고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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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전에 써오신 시부터 에세이까지 쭉 잘 읽어왔는데 이 글에서 생각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더 확 오네요 ㅋㅋㅋ 저는 쭉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게 버는거다, 라고 말했는데 그 뜻을 가장 잘 이해하실분일거 같아요. 글을 읽으면서 밀란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올랐어요. 우리 삶에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에 염두를 둔다는것은 거짓속에 사는것이지만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관랄자들의 눈에 자신을 맞추죠;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것을 잃은 사람이고 그걸 기꺼이 포기하는자 역시 괴물이나 다름없지요. 그래서 제몸 하나의 갈망과 욕망을 몰랏거나 이 악물고 외면해온 것에 대한 지조와 비애이다 라는 구절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군요 ..

  2. 그 사람과 내 손가락이 처음 맞닿았던 순간, 그 사람과 식탁 밑에서 슬쩍 발끝이 부딪쳤던 순간, 그 사람의 스커트 자락이 바람에 날려 내 손등을 스쳤던 순간… 의도한 것이 아닌데 이미 발생해버린 그러한 순간들…
    그러다가 숨결이 느껴지던 어느 순간, 입술이 맞물리던 순간, 허벅지가 실타래처럼 꼬이던 순간,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은 이토록 매혹적일까 라는 고민은 잠든 그 사람을 탐색하게 만들었었습니다. 파리하게 떨리던 긴 속눈썹, 코, 입술, 하나씩 뜯어볼수록 나는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매혹적인지는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탐색할 수 없었고, 탐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소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를 랑비해야 했습니다. 나는 랑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소비했고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바랐습니다. 소비는 투자이기에 보상을 원하게 되고 결국 실망과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나는 ‘랑비’를 몰랐습니다.
    ‘랑비’….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랑비’… 그냥 주는 것…그냥 버리는 것… 그냥 바치는 것…지금은 자신을 랑비만 하던 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새벽 2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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