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사람이야. 

이십대 중반 감수성이 지나친 사람이지. 

나는 눈물병에 걸렸어. 하루 중 절반은 슬픈 감정을 갖고 살고 있어. 그 우울한 감정을 무마시키려 하루종일 유투브와 넷플릭스를 전전해. 

오늘은 “인간애를 상실했다”고 느낀 이야기를 하고 싶어. 

그럼 전에는 인간애가 있었냐구? 당연하지. 인간애가 넘쳤더랬어. 

근데 왜 이렇게 됐냐구? 지금부터 알려줄께. 

나는 부푼 희망과 꿈을 안고 한국으로 유학왔더랬어. 지금도 처음의 그 순수함과 열정이 매우 그리워… 

하지만 유학생활은 녹록치 않았어. 누구에게나 다 그렇겠지만 코로나가 힘듬의 구할을 차지했지.

내가 가장 힘들 때 쉴 수 있는 공간을 코로나가 빼앗아 버렸거든. 난 그 누구보다 집으로 갈 수 있길 바랬었어. 하지만 나의 모국이 그 길을 가로막고 있었어. 

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어. 그래서 유학 생활이 너무너무 힘들었지. 가끔 어린시절 역경을 이겨낸 아이들이 대견스럽게 보여. 그 애들은 무슨 힘이 나서 그 힘들고 어련운 상황을 이겨낸걸까. 

나한테 다들 힘들어라고 얘기해주는 말들은 하나도 도움이 안돼. ‘힘들어도 다 지나갈꺼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힘든게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것만 같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난 후자야. 매일 들려오는 사회의 부조리한 사건을 다룬 뉴스들, 자극적인 내용만 추구하는 유투브. 신물이 날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접하게 돼.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굉장히 사무적인 사람이였어. 예의는 바르지만 인성이 별로인 사람이였지. 그 사람한테 호되게 데인 이후로 나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 

인간애가 넘쳤었다고 했었지? 그때가 한창 인간애가 넘쳐서 자만이 하늘을 찌를 때였거든.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진심은 통할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 애도 언젠가는 나를 좋아하게 될거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 결과를 기다리기도 전에 내가 망가지기 시작했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일을 하려면, 나 자신을 속여야 했거든. ‘그 애도 언젠간 나를 좋아할거야, 이런 말은 다 내가 잘되어라고 하는 말일꺼야, 그 애는 부정적이긴해도 노력하잖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믿음들이 깨지기 시작했어. 과거에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으로부터 ‘ 왜 그러는거지?’로 바뀌더라고. 그리고 모든 것들이 다 꼴보기 싫어졌어. 

내가 나를 기만하고 있었다는 모순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실로 굉장했어.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왠지 내 인생을 부정당한 기분이었어. 나는 그 애가 싫었던거야. 그런데 상황 상 싫다고 팽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지. 나는 그가 필요했어. 그래서 좋아하는 척 나를 속였던거지. 무의식 속에서 “나는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아. 

웃기지 않아? 세상에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정상이 아닌데 말이야. 

어쨌든 모순에 부딪힌 이후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갈 길을 잃어버렸지 뭐야. 

그 뒤로는 학업을 그만두었어. 도저히 같이 있지 못하겠더라. 너무 혐오스러웠어. 

그리고 새로운 자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지금까지 끄집어내지 않았던 또 다른 내가 우위를 차지했어. 

인간에 대한 불신, 혐오, 멸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진 나야. 

물론 그 애 하나 때문에 그렇게 된건 아니야. 

이제 또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줄께. 

학업을 그만 둔 이후로 마라탕 집에서 서빙알바를 했었어. 

사장은 나와 같은 조선족이었지. 그래서 일하는데 정서적인 힘듬이 덜 할거라 생각했어. 

그건 나의 착오, 이 사건을 계기로 난 조선족도 싫어하게 되었어. 물론 싸잡아서 다 싫다는 건 아니야. 조선족은 선할거다 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워 진거지. 

그 사장은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16살부터 일을 했던 사람이야. 문화소양은 고사하고 社会毒打를 많이 당했던 사람이지. 어릴 때 일하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우습고 만만하게 보더래. 그래서 성격도 많이 거칠어. 

하루 12시간 육체노동이었어. 공부만 하고 자란 내가 감당하기 정말 벅찼던 시간이었어. 그와중에 가장 날 힘들게 했던 건 사장의 열등감을 감당해내야 했던 거였지. 내가 석사라는 걸 알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별거 볼거 없다는 식의 얘기들을 많이 했었어. 돈만 주면 학위 따는 거 아니냐, 자기도 대학 가려고 하는데 그런 건 어떻게 신청하는 거냐, 공사판에서 일할 때 박사가 와서 같이 일하면서 자기는 박사라고 어찌나 떠들던지 그러면 뭐하냐 박사면서 공사판에서 일하는 주제에. 

내가 했던 전공이 정신노동이었는지라, 사장이 나에게 했던 얘기들은 내가 돈 받고 들어줘야할 정도였었거든. 난 이런 생각도 했어. ‘ 저 사람이 지금 저런 말을 하는 게 일반인이라면 전혀 문제가 안될 얘기었겠지만, 전공자인 내가 듣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저 사람은 알까? 모르겠지…’ 그때가 한창 내 전공에 환멸을 느낄 때라 더 힘들었었는지도 몰라. 

그러다 어느날, 막노동하는 연변아저씨들이 밥먹으러 왔어. 늦은 시간이어서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또 고향사람이라 반갑기도 했어. 세명이었는데 아주 젠틀한 아저씨, 아주 무례한 아저씨, 중간 아저씨였어. 젠틀한 아저씨는 내가 자기 딸 벌이라서 친근하다는 얘기를 해줬어. 무례한 아저씨는 나한테 이거 가져오라 저거 가져오라 아주 상전이 따로 없더라고, 그 가게는 셀프인데 말이야. ㅎㅎ. 그리고 호통치더라. 손님이 왔는데 밑반찬이 단무지 밖에 없냐고,, 거기에서 터졌어. 너무 서럽고 눈물이 아무리 참아도 뚝뚝 떨어지더라.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대접을 받고 있지? 원래라면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인데. 같은 조선족인데 이렇게 갈궈야 하나?

웃긴건 그 아저씨, 술에 쩔은 상태여서 기억은 할런지 모르겠어.

사장이 왜그러냐고 놀라서 묻는데, 자초지종 알게 된후에는 그냥 웃고 말더라. 나도 이해는 가. 존중 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존중할줄 모르는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서 그만 둿어. 월급이 시급도 안되는 걸 알고 나니까 억울하더라고 ㅎㅎ

그리고 또 한번, 어이 없다고 느꼈어. 월급이 230만이었는데 중간에 그만두니 230/30*일한 날수로 계산해 준대. 외노자의 환경이 이렇게 열악할 줄이야… 

한국인은 알면서도 저렇게 계산해서 외국인 부려먹고, 중국인은 모르니까 원래 그런거다 하면서 문제있으면 노동부 찾아가라 그러고. 가관이야 아주.

이게 내 두번째 에피소드야. 

재미있었는지는 모르겠어. 이왕이면 재미있게 봤다면 좋겠어. 

이번엔 코로나 얘기를 할께. 

코로나로 안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중동 아랍 왕자가 아닐까?

거의 모든 지구인들이 힘들었던 몇 년이었어. 

음,, 

이 이야기는 내 가치관을 얘기하는 파트라서 

다음에 써야겠어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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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노

그 누구와도 맘놓고 얘기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여기에 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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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읽었나…출처가 기억이 잘 안나지만 이런 말이 떠오르네요.

    ‘내가 만나는 사람 10명 중에 7명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2명은 나를 싫어하고 1명이 나를 좋아한다.’

    다음 이야기 기다릴께요~^^

  2. “힘든게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것만 같아”
    맞아, 왜냐면 밥을 먹어도 몇시간이 지나면 또 배고프거덩. 고통은 잠시 완화될뿐 사라지지는 않아. 우리가 할수 있는건 배가 고플 때 한공기의 밥을 먹는거야, 시간에 맞춰 량에 맞춰… 그리고말이야, 그 한공기 밥이 바로 사랑이래. 나에 대한 사랑…

  3. 촌놈인데 배운것도 별로 없고 사진 하는 사람입니다.
    어릴때 중학교 다니다가 연길로 기술학교 다니게 되었죠 .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 싫어서 길게 쉬어도 집을 안가고
    그냥 외지에서 부쳐주는 엄마돈 받으며 자기절로 알아서 생활했습니다.

    남들은 방학이면 집을가는데 저는 고2때부터 방학이면
    알바하며 사회형님들과 어울리는게 더 행복했습니다.
    그때는 일하다가 코피가나도 한달이 되니 중국돈 600원이였죠 .

    처음들어간 알바에서 손님끼리 상 엎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복무원!물을 한상자 올려 주세요 ! 이런 농담 하면 그냥 알았습니다 하면서 진짜 가지러
    가는 척을 해야 했습니다. 아니다 농담이다 이러면서 웃으니까 그때 나이 18 세에
    웃으면서 다못마시면 챙겨가셔도 좋습니다~ 했더니 술한잔 부어주며 같이 마시자던 적도 있고

    아침에 밥 먹으러 왔다가 갖다 준 밥이 누룽지 붙어있다구
    쌍년들이 묵은 밥 주냐 ?하면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죠
    두번째 다시 찾아오니까 더운 여름에 시원한 물을 갖다달라는데
    냉장고에 찬물이 없다고 그냥 미지근한 물 주었더니 다시 안오더군요 ,

    어느 조직이 였던 한무리 남녀들이 술마시다가 제가 일할때 신발을 신고 어디가려는데
    맨발 바람에 손님 이거 제 신발입니다. 하니까 그잘난 신발 가져라 하면서 던져주더군요.
    더 심한건 저랑 꽤 친한 같은 복무원 여자가 나보고 개놈들 너의 구역에다 오바이트까지
    해놨네 했는데 그중에 한사람이 듣고는 너 뭐라고 했어 하니까 그냥 무서워 할 사이도 없이
    얘가 저를 욕한거에요 하고 나섰던 적이 있어요 …

    지금 20대면 옛날보다 사회가 그래도 많이 문명해졌어요 .
    그리구 학교때 저도 너무 힘들었는데 사회나와 돈 벌어 보니
    공부하는 만큼 행복하고 쉬운일 없었어요 .

    나중에 느끼게 될이야기지만 참고는 하길 바래요 .
    그리고 세상이 더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성격이 팩해지고 무선운 환경만 만나게되더군요 .

    어느순간에 고마운 사람을 떠올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 갔더니
    맨날 무섭고 악해 보이던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고 즐거웠어요 .
    코로나 그리고 외국생활 힘든 시기 즐거운 마음으로 전환하고 잼있는 유학생활 하다가
    귀국하여 멋있는 사회인으로 돌아 오길 바람니다.

    힘내요 .

    1. 어차피 한 번 사는 세상 (종교가 없다면 말입니다) 최대한 선한 것만 보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결국 항상 발편잠을 잘 수 있고 마지막까지 웃게 되는 승자라고 생각합니다.
      청춘 님, 그 과정이 많이 힘들었던 만큼 지금은 그 누구보다 더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웃음을 담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신 마지노 님도 우울함을 여기에서 풀면서 함께 스트레스를 해소합시다. 시국이 어지러우니 공감 가는 글이든 위로가 되는 글이든 다 더욱더 반갑기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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