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가 날린다. 예쁘게. 

겨울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겨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확실한  건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임) 눈이 오면, 치맥이 땡긴다거나  러브레터가 생각난다거나 눈사람을 만들려는 충동이 솟구치는것도 아니다. 근데, 눈송이가 날리거나 눈송이가 쌓이면 나에겐 늘 떠오르는 두가지 앞 뒤 맥락이 짤린 어설프고 / 웃픈 추억이 있다. 

그 추억들은 작고 작으며, 살면서 거의 다시 되뇌이게 되는 사건이 아닌데도, 나는 겨울내내 낭만적인 분위기에 젖어 살만도 한 이 곳에서, 눈송이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추억들이 떠오르면서 피식 웃고 만다. 

눈송이가 날리면: 

모범생(이건 어쩌면 핑게, 모범생이어도 연애 잘하는 애들 많았음.)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연애라는 걸 시작해봤다. (말이 연애지, 그저 같이 공부하고 맛있는 분식이나 먹고 집이나 바래다주는 사이?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지.) 그날도 눈송이가 오늘처럼 곱게 날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둘이 밥을 먹었던지 칭구들이랑 놀았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잊혀 안 지는 건 그날 이 친구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는 것. 

내가 살던 집은 좀 언덕위에 있었는데 (한국에 가보면 산 길 같은 언덕길에 집들이 많음을 알수 있는데 대충 비슷한 구도임) 걸어올라 가려면 숨이 차고 조금은 가파로워 조심해야 했었다. 눈송이가 날리는 추운 겨울날씨에는 더더욱. 왜 택시를 타고 집 문앞까지 바래다주지 않았는지도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무튼, 우리 둘은 눈송이가 온천지에 날리는 겨울에 손가락이 얼거 같은 시림을 감내하면서 얼굴이 빨갛게 얼어서 우리집까지 걸어갔었다. 

우리는 그때 아마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것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눈송이가 온몸에 날려 얹히면서, 살갗에 닿일때마다 순식간 녹아내리고, 얼른 얼어붙는데, 그 감각은 참 괴로웠다. 따끔따끔하고 축축하기까지 했다.  한송이 위에 두송이, 그 위에 세송이 이렇게 겹겹히 쌓이고 녹으면서, 옷이 보호하지 않는 얼굴이나, 말을 하고 있어 온도가 유난히 따뜻했던 입가, 그리고 목수건을 두른 목 사이 빈 틈, 장갑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밖에서 움직임이 빈번했던 손가락을 거침없이 공략했다.

우리는 언덕 길 내내 서로의 손을 녹여주는데 정신이 없었다. 처음 손을 잡으면 긴장되고 설레는 감정이 추억으로 남아야 맞겠지만 너무 추워서 그런지 솔직히 두근두근 같은 기억은 나지도 않는다. 다만, 그 친구가 날 바라보던 눈송이 같은 눈빛과 부단히 자기 손과 손을 내 손 위에서 비비며 입김까지 동원해 녹여줬던 기억만이 생생하다. 

집으로 가는 그 길은 길었고, 우리는 스킨십인듯 스킨십 아닌 스킨십 같은 스킨십을 했다. 눈송이가 날려서 그런지 서로 만져주는 손의 온도는 유난히 포근했고, 각자 옷 주머니에 넣고 갔어도 될법한 일이지만 왜 그 부수적인 행동을 무수히 했는지, 지금의 사고방식과 논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 나는 집에 도착해서, 옷도 벗지 않은 채 온몸을 이불속에 파묻혔었다. 오랫동안. 

첫 키스가 아닌 첫 이성과의 스킨십을 나는 눈송이랑 함께 했다. 스킨십이라 말하기에도 어줍잖은 어설픈 손 잡기는 긴장감보단 유치함이 더 가득한 거 같다.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풉 하고 웃게 만드는 걸 보면, 나는 그 순간 행복했던게 분명하다. 

그 친구가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눈 처럼 깨끗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 더 축복하고 싶은 맘이다. 

눈송이가 쌓이면: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자전거라는 교통수단을 늘 이용해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한번은 학교에서 하학을 해서 집으로 가려고 밖에 나왔는데, 그 사이 눈이 꽤 내려서 자전거에 눈송이가 엄청 쌓여있었다. 대충 툭툭 털고 자전거를 밀고 나왔더니, 큰 길에도 눈송이가 듬뿍 쌓여있었고 심지어 듬성듬성 눈송이가 연이어 날리기도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집에 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잊혀 안 지는 건, 나는 굳이 그 상황에서 자전거를 끌고 그 눈길에 집까지 갔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하고 우둔하고 돌대가리 라고 생각 될 일이지만, 그때는 무슨 군대가 명령은 받아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듯 나는 한치의 의심도 한번의 사고도 거치지 않고, 무작정 그 무모한 선택을 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보통 40분이면 끝나는 거리인데, 그날 나는 오롯이 2시간을 소요했다. 그 와중에 4번을 넘어졌고 2번은 심하게 다쳤다. 바르르 떠는 손과 얼굴이 사과처럼 얼어서 집으로 온 나를 보면서, 엄마는 자전거를 학교에 두고 왜 택시를 타고 오지 않았냐고 한심해 했다. 

모르겠다. 그 정도의 눈쌓임이라면 택시를 안 타도 된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그냥 아무생각이 없이 무조건 자전거는 타고 왔으니 타고 가야 한다고 융통성을 통채로 집어삼켜 버렸는지. 기억도 안나고 왜 그랬는지 지금으로썬 도무지 감이 안 잡힌다. 

그 뒤로 나는 빙판위에서도 자전거를 탈수 있는 스킬을 얻었다. 핸들에서 두손을 놓고 타는것도 빙판위를 자유롭게 달릴수 있는것도,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그 당시 능수능란하게 해냈다는게 놀랍스럽고 신기하다.  

눈송이가 쌓이면 차가 미끄러서 여기 사람들은 외출도 안한다고 하는데, 나는 사람이 올라타서 작동시키는 두발 자전거를 용감하게 타고 눈송이랑 격투하면서 두시간을 헤맸으니 생각할수록 웃프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를 가장 일차원적으로 연습했던 순간이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엄마의 믿을수 없단 표정과 아빠의 가슴아파하는 표정 사이로, 나는 효률이 없는 무쇠같은 두뇌로 해맑게 웃으며 지나갔었다. 

쌓인 눈송이를 폭폭 발로 밟아보며 발자국을 낼 때마다, 발자국이 아닌 삐뚤삐뚤한 자전거 바퀴 자국이 떠오른다. 가늘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했던 흔적. 

눈송이가 날리면, 눈송이가 쌓이면 세상은 고요해지고 아늑해진다. 

꺼내기조차 웃기고 챙피해서 말한적이 없었던 눈의 기억들..그 기억들을 택스트로 옮기는 잠깐의 순간임에도…

내 맘도 같이 잠시 고요해지고 아늑해지는 거 같아서 좋다. 

밖에는 여전히 눈송이가 날린다.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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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뺏은건 아닌데 자꾸 일층에 자리가 나서 오늘도 제가 차지합니다. 눈을 맞으며 손을 잡다니, 더운날 따뜻한 손잡기보다 차가운 손잡기가 참 좋네요. /자전거 밀고 간거 이해돼요. 걔를 어떻게 두고 가요. 이고지고라도 집에 데려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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