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론(博弈论) 입문서에 빠져 있을 즈음 업무회의중  누군가 죄수의 딜레마(囚徒困境) 얘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 경제학을 전공한 작가가 맬서스의 인구법칙을 언급하는 동영상을 봤는데 마침 그날 저녁 읽은 책에도 맬서스의 인구론이 거론될 때, 40여년전에 씌여진 서구의 력사책과 수년전 출판된 한국의 동양고전강의에서 일맥상통한 내용을 읽을 때, 나는 희열을 느낀다.

요즘 영국의 력사학자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한국의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같은 시간대에 읽으면서 그런 기쁨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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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카는 력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력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탐구하고 설명한다. 그는 력사란, ‘력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그 과정에 이런저런 론술을 펼친다.

“인간은,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으며 무조건 그것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그런 반면, 인간은 결코 그의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그것의 무조건적인 지배자일 수도 없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에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된다. “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 없는 존재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모든 사실이 그대로 기록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력사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실들만 력사로 기록되고 전해지며, 력사가가 어떤 기준으로 사실을 고르고 해석하는지는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사회의 력사’가 너무 거창해서 잘 모르겠다 하면, ‘개인의 경력’으로 축소해서 조명해보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하던 말씀을 하고 또 하시지 않던가. 이야기를 곱씹다보면 이야기속 그들이 조금씩 미화되기도 하고. 

우리는 수십년을 산다고 하여 살아온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건 당시 또는 아직 인상 깊다고 생각되는 사건이나 순간이다. 인상 깊은건 그때의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게 중요했던건 당시 그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이 모여 나자신에 대한 인식이 된다. 재미나게도 시간이 흐르면 기억의 조각들은 내가 원하는대로 각색된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이기보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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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은 <강의>에서 관계론을 주제로 동양고전을 설명해주시는데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고 하셨다.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물(物) 자체라는 생각은 순전히 관념의 산물이며 그러한 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고도 한다. 

“우리의 관계론에 의하면 삼라만상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a becoming)입니다.” 

력사가와 사실을 대입해본다면, 력사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력사를 발견해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고르고 해석하여 력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개인의 기억으로 본다면, 꿈 같은 과거에서 기억 조각들을 골라 각색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란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의 극히 일부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들의 극소수만이, 그 극소수의 극히 작은 부분들만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력사가는 그가 살아온 경력과 주변 환경으로 형성된 가치관을 기준으로 소수의 사실들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나 감각을 무의식의 세계로 보내고 소수의 사실들만 기억하고 엮는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의문시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의식에 들어온 조각들 덕분에 세상을 조금 알게 되지만 그 조각들을 세상과 동일시하지 말고 ‘작은 우물’에서 벗어나 전반을 볼 수 있도록 통찰력을 키우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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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를 만든 환경과 관념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H.카의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론술에서 ‘세뇌하는 사람의 머리 자체가 세뇌되어 있으며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적의 인간의 관념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개인이 사회로부터 분리된다면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은 달걀 없이 암탉을 얻을 수 없듯이, 암탉 없이 달걀을 얻을 수 없다”

이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벗어나나. E.H.카는 ‘역사가들의 사유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장소라는 환경에 의하여 형성된다’는 진리를 충분히 깨달았던 액턴은 그 환경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력사 그 자체에서 찾았다고 기술한다: 

“역사는 다른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 우리를 구제해주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대의 부당한 영향에서도, 환경의 억압과 우리가 숨쉬는 대기의 압력에서도 우리를 구제해주어야 한다.” 

“역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속에서 찾아내는 주목할 만한 것에 관한 기록’이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 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위대한 역사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야를 밝혀주는 바로 그때 쓰여진다.”

과거와 현재를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현재를 과거에 비추어 보고, 과거를 현재에 비추어 보아야, 과거를 리해하고 현재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증대시킨다고 한다. 

내가 지금 이 곳에 이렇게 지내고 있는 것은, 내가 태여난 시대와 타고난 성별, 민족, 국적에서 시작하여 부모님의 가치관, 자란 환경, 소꿉시절 친구들, 동학들, 선생님들, 동료들과 어울러진 결과이다.    

또한 지금의 나는 20대의 내가 보지 못했던 사회의 장벽이나 인식의 부족함을 볼 수 있어 그때 왜 방황했는지,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납득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부닥친 문제들은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아야 답이 나오고, 그 답이 나오면 지난 세월에 의미가 부여됨을 안다.

***

E.H.카의 글과 유사한 의미의 문구가 부드러운 동양식 표현으로 <강의>에도 나온다.

창신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산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나간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고스란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의 모든 실천은 무인지경에서 새집을 짓는 것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창신은 결과적으로 온고창신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곡선의 형태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조와 우상을 과감히 타파하는 동시에 현실과 전통을 발견하고 계승하는 부단한 자기 성찰의 자세와 상생의 정서를 요구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만든 모든 것을 뒤집으면 나까지 사라지게 되니, 현실에 발을 담그고 유연하게 곡선의 형태로 수정하라고 하신다. 

뜬구름 잡지 말고 내가 자라온 환경에 뿌리 박기. 그러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 말고 천정쪽 얇은 곳을 뚫고 올라가밖을 내다보기. 그리고 유연하게 곡선으로 원하는데로 뻗기.

시대의 부름에 응하여 창신을 잘해낸 사람은 자신의 시대를 실현하는 위인이겠지. E.H.카는 위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다음과 같은 헤겔의 고전적인 정의에 더 고칠만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위인이란 자기 시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고, 그 의지가 무엇인지를 그 시대에 전달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행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실현한다.”

시대를 실현하는 과제는 위인들이 맡으면 되고, 일반인으로서 스스로 부여하는 내 삶의 의미를 실현하기. 책을 읽으면서 희열을 느끼고 그 기쁨을 전하는 것 역시 의미 중 하나이다.

신영복의 <강의>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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