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에서 김이나는 방송중에서 자신이 20대 초반에 형편없는 사람들한테 끌렸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그것은 자신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왜 20년가까이 이토록 형편없는 연애를 해왔던 것일까?
나는 왜 그렇게 형편없었을까?
피해자는 항상 당당한 가해자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한다.
가해자는 언제나 자신의 심정에 충실하며 이토록 진실한 자신이 가해자로 몰린 것에 대해 억울해한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오가며
나는 구원을 지향했던 것일까?
아니면 추락을 욕망하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왜 이토록 형편없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삶이 형편있게 사는 삶인가?
과연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형편있는 삶이 그만큼 형편 있었던 것인가?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삶의 근간이 뒤흔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여전히 ‘도덕’이라는 결속이 유효한 것이고
‘양심’이라는 것이 가치를 지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자기자신의 마음에 충실하면서도 연인(타인)에 대한 배려(의리)와 도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간단하다.
애초에 그 추한 자신의 면모를 ‘착함’이라는 명의하에 감추지도 미화하지도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를 일찌감치 인식하였다면 나를 잃을 일도, 믿음이 깨지는 일도 없게 되지 않을까?
진정으로 진실한 사람은 자기기분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기만을 간파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맞섬은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자기기만과 맞선다는 것은 이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타인을 향한 자신의 이기심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걸출한 비판에 의해 상쇄된다.
따라서 ‘이기적인 자’는 절때로 당당해질 수도 당당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연애에서의 피해자와 가해자.
나는 언제나 피해자에 더욱 많은 동정을 줄 수 밖에 없지만
스스로 피해자로 자칭한 사람들 또한 자신의 상처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신이 가해자의 이기심을 동조해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동조의 욕망 또한 피해자 자신에 대한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은 형편없는 존재라고 해도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로부터 자기이해에 이르는 과정속에서
‘양심’을 보존하고, ‘도덕’을 비판적으로 지켜가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타인을 사랑하는 법임을 배워간다.

‘스스로 피해자로 자칭한 사람들 또한 자신의 상처에만 머무르지 말고 자신이 가해자의 이기심을 동조해온 것은 아닌지에 대해 반문해볼 필요가 있다.’ 깊이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