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장면들이 영화필림마냥 언뜻언뜻 나의 눈앞을 스쳐지나간다. 필림속 주인공들의 얼굴은 나의 이웃집오빠와 나의 친척언니, 고향친구의 얼굴이 되여있다. 공부를 잘했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금화는 고중2학년때 가난한 집사정때문에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며 나한테 놀러와서 울먹이던 고향친구-춘금의 얼굴이 되여 스쳐지나갔다. 철주오빠를 보면서 나는 이웃집오빠-순철이를 떠올렸다. 공부는 별로 못했지만 주먹손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일도 잘해 동네분들한테서 많은 찬사를 받았던 순철오빠. 청년이 된후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인물체격이 자기보다 많이 못한 마을처녀와 연애를 하다가 그 처녀가 한국으로 시집간후 풀이 죽어서 청도로 돈벌이를 떠난 순철오빠의 얼굴이 철주오빠랑 겹쳐진다.
송림촌과 송림림장에 장가못간 총각이 40명이 된다는 구절을 보면서 나는 우리마을 3대에만 장가를 못간 25살넘은 총각이 12명이 된다던 뒷집할머니의 한숨섞인 목소리를 떠올렸다.
송림소학교의 폐교 그 대목을 보면서 난 울컥했다. 송림소학교 폐교가 내가 다니던 하서소학교 폐교와 비슷한 시기였을가? 내가 다니던 소학교는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3년후에 폐교되였다. 폐교된 그 교사를 오래도록 방치해두다가 몇년전부터는 소를 키운다고 한다. 폐교되고 오래도록 방치되여있을적엔 풀이 무성한 학교운동장에 가서 산보한적도 있다만 소를 키운 다음에는 간혹 고향에 돌아가도 학교근처엔 얼씬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랑랑한 글소리와 즐거운 웃음소리 대신에 소들의 음메소리가 들려온다는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아픈 일이였으니까.
이 소설은 20세기초 우리의 조상들이 기아를 참지 못해 두만강을 건너 연변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다가 90년대초부터 불어오는 개혁개방의 바람에 뿔뿔이 고향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는 몇십년동안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주인공 금화와 금화가족과 그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동하게 보여줬다. 그 격변의 시대에 부동한 배경과 부동한 성격의 사람들의 대처방식을 실제 사실들을 통해 생동하게 보여줬다.
영금언니는 그 어떤 역경에서도 묵묵히 참으며 남을 위해 헌신하는 40후,50후 여성들의 순박하면서도 답답한 이미지였다. 후남언니는 허둥지둥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개혁개방의 급류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쉼없이 뛰기는 하지만 방향도 없이 무작정 뛰다보니 도대체 뭘 위해 뛰였는지, 어디까지 뛰여야 하는지 모르는 60후,70후의 일부 여성들을 대변하고 있다.
철주오빠는 개혁개방의 희생양으로 되여버린 60후,70후 농촌청년들을 대표학고 있다. 근면하게 성실하게 아버지세대처럼 참한 색시를 얻어 농촌에 뿌리박고 열심히 살아가려 했었는데 급변한 시대는 그런 농촌청년들의 소박한 희망을 송두리채 뽑아버렸다. 어쩔수없이 고향을 떠나서 돈벌이 길에 올랐지만 잃는것이 얻는것보다 많은 인생을 살아온 가슴아픈 세대이다.
대학에 가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살거라고 한마디로 개괄된 금화의 친구 춘화는 대도시에 정착한 80후,90후일거라고 나는 단정하고싶다. 50후,60후 부모들의 외지진출로 인해 자라는 동안 부모사랑은 결필했지만 그걸 경제적으로 보상받은 80후,90후는 그 경제덕분에 대학에서 지식과 기능을 무기로 더는 부모세대처럼 떠돌이생활이 아닌 정착을 하여가고 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 글에서는 별로 언급이 없었는데 내가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그리고 주인공 금화, 부모의 부주의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로 태여났자먼 금화는 이 집에서 기둥이였고, 이 소설의 핵심인물이였다. 영금언니의 응어리진 가슴을 어느정도 풀어주었고 후사를 책임졌으며 후남언니의 자식을 보살펴주었고 고향에 있으면서 부모도 보살펴드렸다. 그리고 금화는 농촌소학교의 폐고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였다. 점점 사람들이 적어지는 연변이지만 그래도 고향에 남아 양봉장을 하는 둘째형부나 나무심기를 하는 부모님처럼 금화도 고향을 지키고 선 한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금화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타향살이를 하는 우리에게는 고향이라는 언제 돌아가도 환영해줄수 있는 품이 기다리고 있다.
선악의 대립이 별로 없고 크게 기록할만한 대사건이 없는 이 소설이 이토록 내마음을 끌었던건 이 소설을 보면서 동년을 회억하고 동네사람들을 회억할수 있어서뿐이 아니다. 이 소설의 인물부각이 입체적인 면 역시 나를 끌었던 중요한 원인이였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수 있는 선과 악이 섞인 모순투성이 진실한 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후남언니, 둘째형부의 시선에서 드라마를 찍는다면 가히 악녀역을 맡을만한 괘씸한 인물이지만 그런 후남언니가 밉지만은 않은것은 후남언니가 가지고있는 여러가지 면때문이였다. 빨리 도시로 가서 떵떵거리며 살아보자고 맨날 남편을 졸라대다가 결국은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가서 순박한 남편을 내팽개치는 후남언니는 한국드라마에 나오는 허영심이 많고 물질만 따지는 전형적인 된장녀의 모습이였다. 하지만 그런 후남언니가 심장이 약한 아들을 위해 연약한 여자의 손으로 뱀을 잡아 뱀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낼수 있다. 아마 후남언니도 결혼전에는 쥐만 봐도 꺅 소리를 치는 연약한 여자였것이다. 그런 후남언니의 아들을 향한 모성애는 후남언니를 미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후남언니는 한국에 가서 남자의 등이나 쳐먹고 호의호식하면서 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 하루빨리 뭔가를 이루어보자고 어리석게 한국남자들을 이용해보려 하다가 도리여 사기를 몇번 당했는데 그런 사실들로 인해 후남언니가 더욱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 눈부신 날들이였기에 나는 주인공들이 처음에는 고생을 하지만 결말에는 다들 웃으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들이 담겨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이 다 끝나가는 시점까지 주인공들은 평범하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하지만 다시 각도를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주인공들은 분명 눈부신 날들을 살아왔었다. 가족이 일년가도 한번 못만나는 인심이 퍽퍽해지고 그리운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들한테 있어서 가족들이 단란히 모여 글자찾기 유희, 윷놀이를 하던 옛날의 즐거운 순간들은 가히 눈부신 날들이라 일컬을수 있을것이다. 한수 더 뜨면 어릴때 얼음과자 하나도 사먹기 힘들고, 보고싶던 참고서도 마음대로 못사며 돈에 쫓겨 살던 그때와 비하면 지금 우리의 경제조건은 가히 풍족하다고 할수 있다. 입장만 바꿔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눈부신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눈부신것은 어려운 나날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내내 희망을 잃지 않기때문이다. 역경속에서 희망을 가진다는건 곧 해비가 내리는거랑 같은 상황이라 짐작된다. 해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특히 애들은 기꺼이 밖에서 해비를 맞고 해비를 맞으면 키가 큰다고 하니 어찌 눈부신 날들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몇시간만에 책을 다 보고 아쉬운 심정으로 책을 덮었다. 눈앞에 금화와 내친구 춘금이, 철주오빠와 우리 옆집 순철오빠가 엇갈아 나타난다. 춘금이와 순철오빠가 어딘가에서 희망을 잃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며 이 소설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희망안고 밝게 살아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한단락을 여기에 옮기려 한다.
“허공중에 솟아오른 태양이 갓 심은 나무들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나는 작은 나무들이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가고 새로이 잎이 돋아나면서 키가 커져 한해,두해 자라나는 상상을 했다. 혹여 나무가지가 꺽어지거나 도끼에 몸통 어덴가가 찍히는 불상사가 일어나더라도 나무는 한동안 아프다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자라날것이다.”
독후감 읽는 내내 울컥 또 울컥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작업이 저한테는 외롭고 힘든 외줄타기같은 일이였다면, 서리꽃님의 독후감은 마침내 누군가가 그래 나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것 같아, 수고했어. 하면서 꼭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였습니다.
서리꽃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현재의 저는 생활인과 창작자, 어느 하나도 놓을수 없기에 조금 고달프긴 합니다만 이런 사랑과 위로가 있다면 아마도 계속해서 쓸수 있을것 같습니다.
하몽 올림.
나무는 겨울이면 겨우 견디고 봄이면 잎사귀를 터뜨리고 여름이면 활짝 열고 가을이면 갈 준비를 하면서, 그러면서 한해 한해 겪는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