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슬라이드화면처럼 소리없이 출발하였다. 유원은 가방을 좌석위로 올리려다 말고 품에 안은 채 머릿속으로 하나씩 헤아리기 시작했다. 나는 출장을 간다. 내겐 이틀의 조건적 자유가 주어지게 된다. 열차에서의 두 시간은 완전한 자유다. 진영으로부터의 자유. 무선인터넷을 연결하고 음악을 고르던 유원은 나가기 버튼을 누르고 스크린을 아래로 내려 인터넷 연결을 껐다. 그게 뭐라고 마음이 쿵쾅거렸다. 진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기에는 “와이파이 연결이 잘 안되더라”는 말은 너무 긴 문장이라서 자신이 없었다.
좌석 복도 오른편 대각선에 앉은 누군가의 손이 타블렛 pc를 세워두고 연결된 키보드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논문을 쓰는 것인가. 글을 쓰는 것인가. 보고서인가. 훔쳐보기는 나쁜 것이지만 한글자라도 보고 싶었다. 안경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졌다.
언젠가부터 유원은 남의 인생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드라마를 보는 일, 소설을 읽는 시간, 짧은 동영상 화면을 입력함으로 가능해지는 생각의 단절, 이 모든 것이 유원에게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들 외에 유원이 쓸 수 있는 시간은 없어보였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 외의 모든 시간을 채우는 것은 진영의 구체적인 명령과 오년의 결혼생활동안 그가 직조하고 강요한 가치체계였다. 그것이 싫을지라도 그물 같은 것에 빗대는 것은 너무 식상하여, 유원은 그것을 커다란 무엇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확실히 커다랗게 유원을 덮고 있었다.
안경을 끼고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목을 뻗어보아도 손의 주인이 쓰는 내용은 한글자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더욱 밀도 높은 타자소리를 내며 화면을 채워갔다. 대충 보아도 바탕체임이 분명했다. 진영도 바탕체를 좋아하지. 글을 쓰고 나서 바탕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바탕체로 쓰지. 그는 무엇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뚜렷하지.
친구 소개로 만난 진영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단지 그가 유원의 이상형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진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영은 좋고 싫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이래서 좋고 저것은 저래서 싫고, 처음부터 유원은 그런 진영에게 절대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까다로운 남자의 마음에 든 여자,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를 한 대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참으로 하찮은 그 무언가가 되고 싶어 진영의 취향에 맞춰갔다. 그리고 유원은 소원대로 진영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전에 단 한번 문자메세지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넌 내가 왜 좋아?
너의 이름은, 서 있는 남자 옆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자 같아.
뭐?
너의 이름 말이야, 유원.
아하하, 듣고보니 그러네. 뭐 그래서 내가 좋다고?
음, 나는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않는 여자를 좋아하지.
뭐야 그 어려운말은. 차라리 다소곳이 앉아 있는게 낫겠다 ㅋㅋ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않는 여자, 유원은 그게 나냐는 질문을 삼켰다. 대신 그런 여자가 되기로 했다.
아까 그 손의 주인은 글쓰기를 잠깐 쉬는 중인지 타블렛을 집어 들고 테트리스 게임을 하고 있었다. 테트리스 조각은 유원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고 유원은 말없이 속으로 함께 조각을 쌓아갔다.
잘 쌓는 것이 중요함. 시간이 지날수록 빠른 판단을 하여야 함. 빈 화면의 여유로움을 고수하기 위하여, 그래서 게임을 더 오래 지속하기 위하여 무작위로 나오는 예측가능한 조각들을 적당한 자리에 재빨리 끼워 맞춤. 잘 맞추면 화면이 파르르 떨리면서 조각들이 사라지기도 함. 그 전율하는 화면이 칭찬처럼 느껴짐. 더욱 신남. 개떡같은 게 떨어져도 찰떡같이 돌려 끼우든지 아무튼 그건 네 몫임. 정신줄을 놓았다가는 조각들이 순식간에 미쳐 날뜀. 그럼 게임 끝임.
유원은 어느새 속으로 욕을 섞어가며 자기를 향해 빈정대고 있었다. 테트리스 규칙의 틀 안에서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진영에게 길들여진 자기의 처지와 너무 닮아있었다. 진영이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하고, 그가 좋아하는 책을 하나씩 읽어가고, 그의 취향대로 옷을 입고, 그가 비난하는 일을 함께 비난하고. 조금이라도 이견을 보이면 진영은 아픈 말로 유원의 마음을 조였다. 그것은 그 어떤 큰 갈등보다 유원을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 무슨 교시처럼 기억하고 있던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않는 여자가 되려고 맘먹으니 직장이나 그런 필요한 관계 외의 누구를 만나는 일도 시시해졌다. 그나마 일 년에 두어 번 경희를 만나왔다. 경희는 유원과 진영의 공동의 친구이고 둘을 이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난달에 만났던 경희마저 조금씩 유원을 멀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건 경희가 유원에게서 들은 진영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축적하고나서 단어를 만들어내듯 조심스럽게 한 글자씩 입 밖으로 낸 말이었다. 유원을 향한 진영의 가스라이팅, 그것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내 동조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기보다는 쓸쓸했다. 구체적으로 명명까지 할 수 있는 그런 고장난 관계의 피해자인 유원이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 그건 경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유원의 마음속의 어떤 구석을 시들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더욱 쓸쓸한 것은 경희의 그 다음 말이었다.
진영이한테는 농담으로라도 내가 이런 말 했단얘기는 안할거지? 난 너희 사이에 개입되는 거 싫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입술을 한번 여미는 경희의 표정은 자신의 일상을 지키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건 정말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상 누구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있는데 유원만이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익숙하고도 버거운 테트리스 조각을 빈틈없이 쌓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벗어나고 싶었다.

진안 소설 데뷔임까
오르지 못할 나무 밑에 앉아서 기대어 있는 중입니다. 🥹
단숨에 읽히는 글입니다. 마침 테트리스에 빠져 있는데 “잘 쌓는 것이 중요함…….게임 끝” 공감합니다. 딴눈 팔면 안되고, 한줄에만 집중해도 안되고 욕심 넘 써도 안되고, 한가지 종류의 조각에 너무 의존하면서 기다려도 안되고… 사라지는게 칭찬처럼 느껴지고, 게임 끝날때면 한번만 더 하면 완전 끝내줄거 같고… 가스라이팅에도 관심 많습니다. 다음편 기대합니다
테트리스는 요물이죠 ㅎㅎ 다음편이 나올지 모르겠어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조각 하나를 실수로 생뚱맞은데 갖다 놓으면 그걸 수습하기에 급급해서 리듬이 확 깨지면서 폭삭 망하기 쉽상이던데, 그렇다고 너무 조심하면서 놀기에는 재미가 덜하고… 정답은 없고 다만 각자의 균형잡기일가요
실수로 하나 잘못 쌓았으면 새롭게 그걸 수습할 시간의 여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또 다른 미션이 떨어진다는게 비인간적이죠. 게임은 그래야 스릴있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그러면 고장난 관계가 된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게임처럼 그냥 폭삭 망하고 새롭게 시작 ? ㅋㅋ 그것또한 쉽지 않을 같아요.
아, 그거네요. 진부하긴 하지만, 새롭게 시작할 밑천이 있는 상황에서는 스릴 있게 살고, 반대의 경우 조심스레 있는걸 지키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데 주의를 더 많이 기울이면서 사는 것. 그래서 나이 들면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젊을 땐 좋아하는걸 찾아 이리 저리 탐구하고 실패도 해보고, 나이 들면 안전하고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 그러고보니 우에 공간이 많을 땐 보다 공격적으로 조각을 쌓았건것 같아여. 그래도 잘 모르겠… 아마 결국은 각자 유전자와 환경에 의해 정해진 성향대로 사는듯요
대체적으로 그렇긴한데, 또 나이들어서 어떤 부분에선 더 모험적일때도 있는 것 같아요. 조심스레 살아본게 별거 없다든가 뭐 그런 깨달음? ㅋㅋ 더 나이들면 머 어차피 얼마 안남았으니 해보고픈 거 다 해본다 이런 사람들도 있고요. 결국 맞아요 hana 말처럼 나이보다는 성향차이인 것 같아요.
도라쓰~ 테트리스 계속 놀겁니다. 다음편이 나오면 그때 또 소감 나눠요
🤝 다음편 또는 다른편 ㅎㅎ
우와, 2024년에도 조선말로 구상하고 시작하며 쓰여지는 소설이 있군요.
2023년에 ㅎㅎ 아직도 소설 쓰는 사람 많은데요? 쓰고싶은 사람도 많고 저처럼 ㅎㅎ
소설인가요?! 와우 백만년만에 들어와봤더니 소설가 데뷔 추카해요👏👏
“소설가“ ㅎㅎ 그거야말로 저에겐 소설이죠.
진안의 에세이의 애독자인데, 소설은 더 잘 쓰는데요?!! 얼마 전에 폰에 테트리스 게임을 설치하고 놀다가 그대로는 너무 시간을 뺏긴다 싶어서 삭제했는데, 여기서 이런 제목의 글을 만나다니!
요즘 테트리스 얘기하는 분들이 많아서 지난해에 써뒀던 글 올려봤어요. 묵혀둬도 나아지지도 않아서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