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은실

은희경을 맹렬히 추종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 2학년 땐가 3학년 때 그녀의 장편소설집 《새의 선물》을 읽은 뒤부터였다.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가차없는 일갈과 이른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긍정에너지(正能量)에 대한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시선들이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힙’했다.
그 무렵 도발적이고 호전적이였이던 스물한두 살의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그래도 친구인데 어쩌겠어.”, “그래도 너한테 도움되는 소리인데 들어야지 어쩌겠어.” 같은 말들에 신물이 날 대로 나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게 그녀의 거침없는 독설들은 너무 신선하게 다가왔었고 어른들에, 세상에 채 하지 못한 대거리에 대한 대리 분출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2022년에 나온 그녀의 신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고마운 선배님이 구해주셔서 늦지 않게 읽었다.
소설집에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네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었다. 각자 다른 사람의 얘기인 듯하며서 서로 또 련결이 되는 이야기로 읽히는 네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뉴욕, 타인, 오해, 편견, 이해”였다.
타인의 시선 속의 나, 내가 바라보는 나
소설집의 첫 소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오랜 친구인 승아와 민영이의 이야기이다. 조금은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민영이는 친구 승아가 sns에 올리는 뉴욕 사진들을 보고 뉴욕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굳혀가다 어느 날 즉흥적으로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다.
그러나 뉴욕도, 오랜 친구 민영이도 승아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다르다. 민영이의 뉴욕 월세방은 낡고 오래되였고 좁고 불편하다. 나를 무척 반겨 주리라 생각했던 민영이는 몹시 지쳐있고 또 예민한 모습이다. 거기에 승아는 상처를 입고 돌아오려던 날짜를 앞당기려 한다.
그러나 승아는 알 수 없다. 그 무렵 민영이는 친밀했던 남자친구와 갈등을 겪는 중이였고 취직도 여의치 않아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예민해져 있었던 속사정을…
그런 상황에서도 멀리 고향에서 날아온 승아를 위하여 같이 먹으려고 도넛과 베이글을 사왔지만 시차 적응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 했던 승아는 그런 민영이의 배려를 알 리가 없다.
둘은 서로 섭섭함과 답답함을 속으로 삭히며 갈등은 고조된다.
소설을 읽으며 북경에 첫발을 디뎠던 15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았다. 취직은 했다지만 작은 월세방에서 모르는 이들과 주거공간을 공유하며 박봉으로 지내는 내게 덜컥 고향친구가 왔다면…
―에게, 왜 니가 맨날 위챗 모멘트에 올리는 북경 모습이랑 달라?
―좋은 회사에 취직도 했다더니 이렇게 좁은 월셋방에서 살아?
라고 묻는다면… 관찰자의 시선으로 내 모습과 내 생활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친구가 있다면… 그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낼 자신이 내게는 없다. 민영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해 전, 아이가 아픈데, 북경의 큰 병원에 아는 의사 있으면 소개해줄 수 있나 물어왔던 고향 후배의 부탁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입사 초반과는 달리 제법 이 도시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해나가고 있지만 내게 그런 인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렵사리 도움을 청했을 후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 자책감과 나는 여전히 변두리적 삶이구나 싶은 자괴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던 나날이였다.

자아분열 속 진정한 나는 어디에
두 번째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속 주인공 수진이는 마흔여섯의 나이로 홀로 뉴욕으로 간다. 부족한 영어실력을 제고하기 위해 어학원에 갔다가 거기서 세네갈 대학생 마마두를 만난다. 첫 수업시간에 마마두의 자기소개 끝에 수진이는 입속으로 무심코 마마두의 이름을 불러본다. 자기의 이름을 되뇌이는 수진을 마마두는 고개를 돌려 무심하지 않는 눈길로 바라보고 둘은 그 이후 단짝이 된다. 서로 부족한 영어로 떠듬떠듬 소통을 해가며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수진이는 마마두가 무슬림교도라는 것을, 그리하여 술과 거짓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마마두에게서 전해 듣는다. 수진이는 료리가 취미이며 이 도시에 와서 영어를 더 잘 공부하여 많은 외국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적당히 거짓말이 섞인, 그러나 모범답안에 가까운 자기소개를 한다.
둘은 자기 상황과 앞으로의 꿈에 대해 교류하며 그럭저럭 소통을 이어오다 작은 오해가 쌓여 멀어지게 된다. 한국 류학생들과 류창한 한국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본 마마두가 소외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마마두는 나름 친밀한 관계였다고 생각한 수진과의 사이가 사실은 본인의 착각이였음을 깨닫게 되고 길가에서 수진이 봉변을 당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못 본 척 지나간다.
가장 익숙한 언어로 이야기를 할 때와 그렇지 못한 언어로 이야기할 때 다른 자아가 된 듯 분렬이 생기는 경험을 나는 종종 한다.
이 도시에서 한어로 일상용어를 하는 것에 크게 불편을 겪지는 않지만 나는 모어가 아닌 한어로 둬시간 떠들고 나면 체력이 고갈된 듯 눈이 다 퀭해지곤 한다. 모어는 피가 혈관을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내게 한어는 한 번 더 뇌의 어느 한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일이다
헬스장에서 젊고 싱싱한 트레이너들을 만나면 나는 괜히 요새 인터넷에서 류행되는 어휘들을 사용하여 내가 나이에 비해 꽤 센스가 있는 사람임을 어필하고 싶어진다.
어느 한번, 어린 녀자 트레이너와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트레이너가 운동을 안하면 중년이 되여 배가 나오고 머리도 빠지는 전형적인 ‘느끼한 아저씨’가 된다고 하자 나는 거기에 격렬한 맞장구를 치고 싶어졌다.
맞다고, 배도 남산만해지는 데다 머리도 중남해(中南海)가 되면 정말 뛸데없는 아저씨가 되는 거라고 내가 제법 재치있는 화술을 뽐내며 말했는데 트레이너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언니, 지중해 아닌가요?
트레이너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남자들이 탈모가 생겨 정수리 쪽이 휑해진 모습이 지중해를 닮았다고 하여 언제부터인지 인터넷용어로 ‘지중해 헤어스타일’이란 말이 류행하였는데 그 지중해를 말한다는 것이 내가 ‘중남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류사한 일이 두어 번 있고난 뒤부터 헬스장 트레이너들은 나와 대화할 때 꼭 마치 꽤 어물쩍하게 말을 잘하는 유치원 어린이를 상대하듯 웃을 준비를 막 마친 듯한 표정을 짓고 말을 건네왔다.
자기가 앞질러 말하고는 “그렇죠? 언니?”라고 확인하듯 묻고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기도 했다.
어느 땐가는 “언니가 말하는 거 틱톡에서 중국말 하는 프랑스인 보는 것처럼 잼있어요.”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상당히 굴욕적이였다.
그들은 마냥 나를 귀여운 아이 취급을 하였는데 내가 우리말을 할 때는 숨도 돌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내뿜는 싸움닭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들이 알가?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할 때의 나는 조금 어수룩하고 어눌한 사람으로 변해 있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신선한 그런 대접도 마냥 싫지는 않아서 헬스장 가기를 꽤 재미있어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상대가 흘린 몇 조각의 단서로 내 머리속 편집기에 따라 상대방의 이미지를 구축해 놓고 그것이 상대방의 모습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마냥 상냥하고, 짜증이라고는 낼 줄 모를 것 같은 그 예쁜 코치도 친구들과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세 번째 소설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서는 극작가가 꿈인 현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주는 졸업 작품을 구상하다가 그 전에 인연을 맺어왔던 로언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간다. 그는 사촌언니를 통해 알게 된 로언을 비롯한 무리 속에서 늘 겉도는 모습이다. 게다가 이명까지 앓고 있어서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지금의 이 분위기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로언에게는 자신의 상황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며 괜찮다고만 한다. 잦은 오해로 이해가 엇나가게 되고 둘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사람들이 아는 나는 내가 아니야.”
네 번째 소설 <아가씨 유정도 하지>는 작가인 화자가 뉴욕에서 열리는 한 행사에 초청되였는데 80여세의 화자의 어머니가 함께 뉴욕 려행을 하고 싶다고 하여 예상에 없던 어머니와의 뉴욕행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머니는 꽤 독립적인 자아를 가진 녀성으로서 우리가 믿는, 어머니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이 느껴지는 자식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념려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이 별로 없는 꽤 담백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성격이라 믿어왔던 어머니가 낯선 곳 뉴욕에서 보이는 모습은 내 예상과 많이 다른 모습이다.
어머니는 무리를 해가며 코니아일랜드를 가려 하고 거기 해변에 도착해서는 눈발을 맞으며 어머니 답지 않게 노래도 흥얼거린다.
나는 어머니의 수첩 속에서 오래된 편지를 읽는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아닌 박형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남자의 편지가 들어있다. 편지에서 그는 “코니아일랜드의 해변을 유정한 사람과 걷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유정’은 어머니의 이름이다. 남매 중에 어머니와의 관계가 가장 친밀한 누나의 말에 따르자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첫사랑이자 생애 유일한 남자여야 했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뉴욕에서 편지를 보내온 박형만이라는 남자의 발자국을 따라 죽음 예행연습을 하는 것이였다.
“내가 할머니지만, 그 사람들이 아는 그 할머니는 아니야. 그러니까 아는 척 좀 하지 말라는 거야.”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 통틀어 나는 이 구절이 제일 좋았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가족에 대해 우리는 얼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일흔여섯의 엄마가 미스터트롯의 ‘장민호’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한편 신선했고 한편 엄마가 낯설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억척스러웠고 생존에 필요한 밥과 돈이 아닌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녀자였던 것이다. “엄마가 노래도 듣는다고?” 하며 의아했는데 장민호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잘생겨서’라고 해서 더욱 놀랐다. 엄마도 잘생긴 이성에 마음이 설렐 수 있는 녀자라는 사실을 나는 외면해왔다. 그러면서도 엄마 속은 빤히 다 아는 듯 넘겨짚었고 속단했다.
가건물을 시멘트 집으로 만들려면
우리는 타인을 본연의 모습으로 보기보다는 쉽게 편견에 사로잡혀 의심하고 오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련대하고 서로 사랑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친밀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관계가 호의라는 몇 개의 나무로 기둥을 세운 가건물이라면 성장기를 함께 보낸 친구와의 관계는 돌과 모래와 물, 거기에 몇 가지 불순물까지 더해서 오래 굳힌 시멘트 집일 것이다.”(<우리는 왜 얼마동안 어디에>에서)
오해와 편견 투성이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은 바로 돌과 모래와 물이라는 사랑과 이해 배려, 그리고 불순물이라는 작은 상처 주고받기가 서로에게 견고한 다리가 되여주기 때문이다.
현주와 로엔, 수진과 마마두 사이는 호의라는 몇개의 나무로 기둥을 세운 가건물이였으므로 작은 오해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성장기를 함께 했던 승아와 민영 그리고 혈육사이의 끈끈함을 갖고 있는 어머니와 나 사이는 몰이해와 오해 섭섭함 등의 불순물이 있지만 나중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따뜻이 품어줄 수 있다.
상대가 보여주는 몇 조각의 퍼즐만으로 상대를 속단하려 하지 않고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해하려 애쓰는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 속의 화자는 <장미의 이름은 장미> 속 수진의 전남편으로 보인다. 그는 엄마와의 뉴욕행에서 자주 전처인 수진을 떠올리고 수진과 신혼여행으로 함께 왔던 뉴욕의 구석구석에서 수진이를 느낀다. 아직 서로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면 그 둘도 오해와 상처를 딛고 다시 손잡을 수 있지 않을가?
저자 은희경은 <작가의 말>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위축되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공감하려고 애쓰기를 바랐다. 고독 속에서 연대하기를 바랐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수진과 전남편이 다시 손을 잡았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싶어진다.
은희경 작가의 오랜 팬으로서 나는 늘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듯한, 그 작가에 대해서라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작가의 말>에서 조금 낯섦을 느낀다. 《새의 선물》을 쓸 적의 그녀라면 “인간은 다 혼자이다. 공감이라거나 이해 따위는 없다. 그저 련대하고 있다는 착각만 있을 뿐이다.”라고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냉소, 독설의 작가라고 하는 것 또한 어찌보면 소설가 은희경에 대한 독자의 편견은 아닐가. 30여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어쩌면 그녀의 세계관도 변했음직하다. 변하기 전의 그녀도 변한 이후의 그녀도 소설가 은희경인 것이다.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그 고유성을 이해하고 나서야 그의 소설세계에 더 가까이 가닿을 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
그 고유성에는 내가 아는 작가 은희경도 내가 모르는 작가 은희경도 다 들어있는 것이다. 나는 상대를 잘 모르고 있음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상대는 그의 본모습과 다를 것임을 먼저 인지하는 것이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한 첫 단계가 아닐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본모습이란 무엇인가? 본연의 모습,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곡해할 수 없는 고유성이란 또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온다. 은희경 작가는 좋은 소설이란 질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고 했다. 이 질문을 유보한 채 은희경의 다음 신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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