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ㅣ박동찬
착잡하다. 광복 76주년을 목전에 두고 이 글을 쓰는 일이란. 76년 전, 그날의 한반도는 분명 희열의 도가니였겠지만, 도둑처럼 찾아온 광복은 결국 분단의 단초가 되고야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단순히 38선으로 환원되는 지리적 분단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땅과 터를 공유하던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게 만든 정서적 분단이 더 야속했다. 거기에 더해 남과 북만의 단절도 아니었다. 한반도 바깥에 남겨진 수백만에 이르는 동포들도 부득불 단절되어야 했다. 설사 간헐적인 연결이 있었다 해도 그 조국은 온전한 것이 못 되는, 낯선 것이었다.
3·1운동 이듬해 조국 찬탈자로부터 수배자로 지목받은 나의 고조부는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하령리를 도망치듯이 탈출해 길림성 영길현에 정착하였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겠지 생각했으련만 1942년 5월 이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조부의 말로는 중국에 머무는 동안에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조부는 오래전부터 고조부의 독립유공자 신분 인정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2년 전 설날에 그동안 수집한 사료들을 장손인 나에게 넘기셨다. 나이도 나이고,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면서 이제는 나의 일이라 말씀하셨다.
내가 알기로는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혜택은 직계 3대까지일 거다. 너가 찾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너한테 특별히 주어지는 건 없어. 그래도, 무조건 찾아야 돼. 그건 우리 할배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국립묘지에 갖다가 모셔야지.
아무튼, 고조부의 선택 덕분에 나의 집안은 단순하지 않고 생동한 역사를 중국에서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고조부의 선택권이 그 후손들에는 오랜 시간 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관계로 우리는 중국에서만 살아야 했다. ‘조선족’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을 부여받고서.
몇 해 전에 연변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지인에게 두만강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도랑에 뭐 볼 게 있어 가냐고 그랬던 게 아직 생생하다. 눈물 젖은 두만강이 현지인들에게는 도랑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두만강이 증언하고 있는 역사는 잘 알고 있고, 강의 좁고 작은 정도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기까지, 우리는 반세기가 되도록 그 도랑 하나를 넘어가지 못하는 설움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우리에게 두만강과 압록강은 더는 넘어올 때의 물줄기가 아니다. 물 위에 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이주 행렬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지속 되었다. 가장 많았을 때는 200만 명까지 되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정처 없이 떠도는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한다. 유대인의 이산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성서의 <출애굽기>를 묵상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성서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장정 80만이라 기록한다. 신학자들은 여기에 부녀, 노인, 아이의 수까지 더하면 대개 200만 명이 될 것으로 추산한다.
200만 출애굽 히브리 민족과 중국에 뿌리내린 200만 조선인, 두 공동체는 수적으로만 닮았던 게 아니다. 이들은 기존의 배치 안에서 고정되거나 강제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가치나 방법을 창조하기 위해 벗어난 사람들이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공동선언」이 연이어 발표되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두 손을 맞잡으면서 얼어붙은 한반도에도 끝끝내 봄이 오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3년이 흐르고 완전히 경색된 남북관계는 평화로 향하는 노정의 지난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출범, 중국의 보다 적극적인 개입 등 외부 변수를 통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경향이 강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한반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독일 통일의 경험을 참조했을 때 주변국의 지지가 전제되지 않는 한 평화 성취가 난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질문은 가능하다. 외부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인해 망각되고 외면받아온 또 다른 내부 변수가 존재하지는 않을까?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이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일제의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은 해외로의 망명을 불러왔고, 이와 별개로 강제로 이주당하고 징용당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동족상잔의 전쟁은 수많은 난민을 양산하였고, 극심한 가난 때문에 아이들이 해외 입양아로 보내졌다. 경제 개발기에는 보릿고개를 넘어보자고 광부와 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이 해외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산의 동기는 다양했고 이들이 오늘날 한반도 전체인구의 10%에 달하는 재외동포-코리안 디아스포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평화를 희구하고 분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삶은 디아스포라가 전쟁과 냉전의 산물이기에 가능하다. 식민지시기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주한 재일조선인은 조선말, 조선사람, 조선학교, 조선민족 등 유독 ‘조선’을 강조한다. ‘조선’이란 표현이 한국에서는 북녘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연상한다고 하여 좋지 않은 뉘앙스로 읽힌 지 오래지만, 재일조선인들이 으레 자랑스럽게 말하는 ‘조선’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기 전의 조선반도, 또는 앞으로 다시 하나 될 조국을 가리킨다. 일종의 과거의 고향·상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점에서 서경식 교수는 재일조선인을 ‘분단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한다.
그동안 한국 미디어는 ‘우스꽝스러운’ 억양 모방을 통해 조선족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재현의 문제성은 차치하고, 조선족을 획일적 집단으로 상정하는 데서 우리의 사유의 한계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간 유민 중에는 조선팔도 출신이 골고루 망라되었는데 이들은 출신별로 집성촌을 형성해 살아갔다. 그런고로 조선족은 경상도,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충청도 등 한반도 전역의 말씨와 전통을 대대로 대물림해왔다. 한마디로 조선족은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단되지 않은 공동체’였다.
중국 화교들이 도처에 당인가(唐人街·차이나타운)를 세웠다면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세계의 곳곳에 ‘분단되지 않은 조선’을 개척해왔다. 그들의 역사는 남과 북 사이 어느 한쪽과 독점적으로 혹은 배타적으로 교류해온 역사가 아니다. 남북의 길항을 안타까워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통섭적 사고를 끊임없이 강구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에 산재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휴전선의 속박을 받지 않고 남북을 자유롭게 출입·왕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과정 중에 배태된 것은 남과 북을 아우르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하는 제3의 시선이다.
해외로 나간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더불어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우리 곁의 디아스포라도 있다. 이들은 이주민, 결혼이주여성, 외국인노동자, 난민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고 있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분단과 상이한 사회시스템 때문에 남과 북의 민족적 동질성은 옛말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 곁의 디아스포라는 탈분단 이후의 세계를 미리 투영하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이들에 대한 포용과 환대의 여부는 곧 우리의 분단 극복 의지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통일을 위한 예행연습이다.
엄혹한 시절에 문익환 목사가 ‘통일은 다 됐어’라고 예언자적 메시지를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소년기 만주 땅에서 키운 디아스포라적 상상력 덕분이 아닐까. 감히 말하건대 어떤 사물과 사건의 본질은 바깥에서 가장 잘 관측된다. 아픈 시간과 낯선 공간을 통과해온 디아스포라가 한반도 평화의 대안적 변수로 역할하기를 기대해본다.
※ 이 글은 저자의 동의를 거치고 옮깁니다.
※ 이 글은 <2021년 세계한인 청소년 더 위대한 도전>의 수상작입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이제야 읽었네요. “감히 말하건대 어떤 사물과 사건의 본질은 바깥에서 가장 잘 관측된다. ” 이 구절이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