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여름캠프를 다녀오더니 집에 박혀 아이패드를 보고 앞머리를 다듬고 눈초리를 붙인다.

이틀 정도 봐주다가, 하루 한시간만 내달라고, 같이 영어책을 읽자고 했다. 

첫날은 좋아하는 밀크티를 사줬더니 50분 정도 견뎠고, 이튿날은 30분이 지나서부터 알람을 보면서 40여분 버텼다가, 셋째날은 한시간은 죽어도 못하겠으니 20분으로 줄이자고 항의해왔다.

– 하루 한시간이 많아? 한시간이라도 집중해서 하는 일이 있기나 해? 내가 심심해서 한시간을 너랑 책을 읽는줄 알아? 나 바빠. 그 한시간으로 내 영어공부를 하면 오죽 좋아. 네가 나 대신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꿈을 이루길 바라지 않아, 네 인생을 계획해줄 생각 꼬물만치도 없어. 다만 철저히 손을 떼기 전에 마지막으로 뭔가 해야 될것 같아서 생각해낸게 한시간 영어책 읽기였어. 싫으면 관둬. 하지만 네 공부를 어떻게 할지, 네 앞길을 어떻게 갈지는 생각해봐.

이날 내가 아마 당이 떨어졌나보다. 그러고나서 휴대폰 할일 목록에서 영어책 읽기를 지워버렸다. 

***

집콕 네번째날, 악기 련습 좀 하라고 했더니 2분만에 그만둔다. 너무 오래 손을 놓고 있어서인지 악기 칠줄 모르겠다고 한다. 

– 그래? 모르겠다고? 그럼 선생님한테 도움 받아야 하나?

그 이튿날 악기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내, 선생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으니 여름방학동안 수업시간을 좀 더 늘려주면 안되냐고 문의했다. 선생님은 자초지종을 물으시더니 흔쾌히 응낙하셨다. 

아이에게 이 소식을 알려줄때까진 내가 화약통에 불을 질렀음을 깨닫지 못했다. 

물음표 20여개, 감탄표 거의 100개를 보내면서 뭐하냐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한다. 칠줄 모르겠다고 한건 과장된 수법이였다고, 본인의 즐거움이 나때문에 소진됐다고 한다. 선생님에게 왜 말했냐고, 한달밖에 남지 않은 방학을 그렇게 보낼 수 없다고 울고 소리지르는 음성도 보내왔다.

어라, 반항이 좀 강하구나. 좀 더 컸구나.

영어에서 손을 뗐는데, 악기에서도 손을 떼야 하는가부다.

선생님께는 저녁에 아이랑 얘기해보고 답변 드리겠다고 했다.

– 실컷 울고나니 시원하냐

– 왜 선생님에게 얘기했는데~!

– 네가 칠줄 모르겠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 할수는 없고 해서 선생님에게 도움 받으려 했지

–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말하면 어떡하라구

그제야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선생님에겐 잘 보이고 싶구나. 밖에선 얌전한 숙녀모습이라고,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 좀 한다고 했지. 집에 있는 모습을 주로 보면서 내가 깜박했구나. 잘못했네.

아이는 선생님이 제안한 수업시간의 2/3만 어쩔수 없이 수용하겠다고 하면서 오늘은 울어서 고단하니 일찍 자겠다고 들어갔다.

*** 

그전까지는 사춘기로 오는 길에 있었던거지 사춘기는 아니였나보다, 이제야 소문으로만 듣던 사춘기가 오려는가보다 하면서 오소희 작가님의 블로그 문장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마침 지인이 모멘트에 추천하는 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꼭 아이의 의견을 먼저 물어볼 것, 밖에서의 아이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조용히 다짐했다. 집에서 보이는 그 모습들이 나만 볼수 있는 소중한 모습인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선생님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충분히 기특하다.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본인의 괜찮은 이미지를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 유지하겠다는게 나쁘지 않지. 어미가 보기에 답답한 집에 있는 시간들이 있기에 긴장이 풀리고 에너지가 보충돼서 밖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거지.  

***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왔다.

아이가 무서운 꿈을 꿨다고 한다. 매일 밤 나무침대 하나를 빼곤 아무것도 없는 하얀 공간에 보내지는데 말을 해도 대답하는 이가 없어 매우 심심하다고 한다. 내가 가끔 보러 오는데 눈길 한번 주고 말 한마디 하고는 사라진다고 한다. 

– 어머, 그럼 꿈에, 내가 영어책을 들고 가서 같이 읽자고 하면 읽을래?

– 네

– 그럼 오늘, 현실속에서 한번 해볼래?

– 네

꿈에서 오랜만에 나를 보고 울고싶었다고 한다. 여기가 어디냐고, 돌아가고 싶다고, 사람들 다 어디 갔냐고 물어보니 내가 웃으면서  "나는 내 세상으로 돌아갈거야"라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 나도 바쁘다고, 한시간동안 내 영어공부를 하면 오죽 좋냐고 말한게 꿈에 그렇게 왔을가?

꿈속에서 조금 무서웠겠지만 엄마도 본인만의 인생이 있고, 아이의 인생은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각인시킨건 잘한 것 같다. 아직은 엄마 간섭을 물리치려니 그러다 엄마가 본인 일에만 빠져버릴것 같아 무섭기도 하겠지만,  반항과 타협을 반복하는 중에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고 고민과 용기가 많아지면서 어른이 되겠지. 

우리 둘 인생의 중첩된 부분이 점점 줄어들고 있구나. 분리되는 과정이 물론 아프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같이 겪는거니까 잘해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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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 읽다보니…. 마지막 부분쯤에서 눈물이 좀 핑 도는데… (갑자기 몰입)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엄마도 엄마의 인생이 잇다에서… 아니면 우리 둘 인생의 중첩된 부분이 줄어들고 잇다에서… (결국엔 같은 관계지만, 저는 애보다는 부모님과의 시간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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