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트 상공에 려객기 뜬다.

나는 집으로 들어오던 걸음을 멈추고 머리우로 날아가는 려객기를 바라본다.

굉음을 지르며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라 운무속에 숨는듯 나타나며 날아 오르는 려객기. 수없이 보는 려객기지만 처음 보듯 려객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망연하게 바라 본다.

가고 싶다. 그 려객기에 앉아서 저 멀리 창공으로 날아 오르고 싶다.

도착지는 어디여도 상관 없을거 같다. 괜찮다. 여기서 떠날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

마음 한 구석에서 탈출의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 온다. 이 감각, 이 느낌. 아주아주 오래전부터였던거 같다. 도망가고 싶은 욕망이.

어렸던 그때. 밖에선 한 겨울 바람이, 아니, 굳이 한 겨울이 아닐지라도 차거운 바람이였던건 확실하다. 항상 춥고 허전했던 그때였으니. 그 찬 바람이 뙤창문을 두드릴때 어린 나와 세 언니들은 희희닥거리다가 듣는다. 삐-익 하는 대문 열리는 소리를. 아버지가 퇴근해 자전거를 밀고 들어오는 소리다. 우리는 그 소리만을 너무 잘 듣는다.

우리 네 자매는 제꺽 입을 닫는다. 혹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릴가 저어되여 최대한 숨 죽이고 경직된다.

그 시절 어머니는 늘쌍 아팠다. 병원출입을 잘 모르던 그때 그 세월에 대수술 두번 했고 여러번 입원했었다.두달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은 첫  수술을 할때 나는 돌도 안됐었다. 흰 세수수건으로 이마를 동이고 첩약을 달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내 동년의 하나의 풍경이였다. 그런 안해 시중을 들며 아버지는 어린 네 딸들을 돌봐야 했다.

집은 째지게 가난했고 어머니의 병원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아버지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집에서도 독재자였고 밖에 나가면 누구와 다투고 들어 올때가 많았다. 그 자식 우릴 업신여긴다가 이유였다.할아버진 해방전쟁에서 희생됐고  하나밖에 없는 삼촌도 북조선에 간다고 나선후 감감무소식이여서 형제 하나 없이 아픈 아내와 어린 네딸을 거느린 아버지의 세상을 맞선 처절한 몸부림이랄까.

비록 폭력적인 아버지는 아니였지만 화난 아버지는 어린 우리에게 충분히 무섭고 어려운 존재였고 감히 입밖엔 내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가 있는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당연히 돌아와야 하지만 돌아오기는 싫고 그렇지만 어쩔수 없이 돌아와야만 하는 곳, 집은 나에게 그런 곳이였다. 숨 죽이고 눈치보고 최대한 움츠리고 있는 곳.

그러다가 어쩌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져서 하모니카를 꺼내는 저녁이면 우리도 접혔던 날개를 펴고 우쭐우쭐 일어나 춤바람을 펼친다. 소리내여 웃기도 했다. 계속 움츠리기만 했더면 우린 어떻게 살았을가.

여러가지 악기를 다룰줄 알았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소유할수 있었던것이 그 자그마한 하모니카였다.

어쩌다 하모니카소리에 맞추어 웃고 춤추고 하면 미치도록 도망가고 싶었던 집에서도 우리의 스트레스는 얼마간 풀려 우린 계속 살아갈수 있어진다.

"나가자" “찔레꽃” “나그네 설음”그리고 제목도 모르는 노래 “어디선가 풀피리-”

"구락부의 전등불—" 등 노래들, 지금도 기억된다. 하모니카소리로.

대학에 락방되고 20대에 들어서며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났다. 나는 이 집을 탈출할 희망을 보았다. 아버지와 같은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는것이 목표가 돼버린 나는 그가 날 마음고생 안 시킬거란 확신이 듬과  동시에 결혼에 올인했다.

아버지는 내 결혼 3년후 돌아 가셨고 이제 내 나이 40대 중반. 그 아플수도 없다는 40대이다.

어린 자식과 년로한 부모님. 다른 자식들은 모두 외국에 흩어졌고 여기 일은 오롯이 내 몫이 되였다.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나는 빠져 나가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이 어쩔수 없음 속에서.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무엇이 나를 도망가고 싶게 하는가. 아픈 반려가 있는것도 아니고 보살펴야 할 자식 여럿 있는것도 아니다. 외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과 착한 아들, 그리고 80을 바라 보고 있지만 아직 병원신세 별로 안지는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

경제상 별로 어려움도 없다.

그래도 무거운 어깨는 어쩔수가 없다. 가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혼자서 해내며 어떤때는 내려 놓고 싶을 때가 있다. 내려 놓고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힘든데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가.

나는 아버지를 추억한다.

서점에 가서 정연히 꽂혀 있는 책들을 골라 들며 출장 갔다가 점심밥 굶으며 내가 볼 소설책을 사다 주던 아버지를 추억한다.

강경애등의 작가들의 잘된 문장들을 노트에 정리해 두고 펼쳐 보던 아버지.

아버지는 사철 봐뀔줄 모르는 그 용접불꽃에 구멍 뚫린 곤색 작업복으로 기억 된다. 농사일과 공장일을 병행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아버지처럼 닳고 낡은 그 고물 자전거로 기억 된다.

그리고 비닐방막 덧붙인 창을 울리고 퍼져 나가던 그 하모니카소리로 기억 된다.

인생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아버지는 작업복과 자전거가 필요했고 하많은 고독과 근심을 짧은 순간에나마 날려 보내기 위해서 아버지는 하모니카가 필요했나 보다.

나는 지금도 노래를 들어도 하모니카반주가 들어간 노래를 즐겨 듣는다. SG워너비의 "라라라" 박상민의 "해바라기" 김광석의 "너무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 "

가슴 깊숙히 심장을 흔드는 그 하모니카소리에 아프지만 자꾸 찾아 듣게 되는 노래. 하모니카소리는 마음의 바닥에 깔린 세월의 락엽을 걷어내고 밑에 숨겨졌던 아픔을 어루만져 준다. 다독이듯 흔들고 다시 흔드는듯 다독여 준다. 아프지마 아프지마 한다.

어깨의 짐으로 하여 힘들어 하지만 쏜살같이 세월이 흘러 누군가도 내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을때 난 구경 행복할가.

가족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곁에 함께 할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지금은 매일매일이 행복의 연속일것이다.

얼마전 문학행사에서 학원생들과 함께 사회실천차 뻐스 타고 려정에 올랐었다. 룡정의 한 작가님이 장끼자랑으로 하모니카를 부신다. 생각지도 않던 장소, 생각지도 않던 분한테서 받은 하모니카소리, 나에겐 선물이다.

모두들 박수 치며 웃고 잘 한다고 소리 높이지만 나는 차마 그 작가분을 보지 못하고 창밖에 지나가는 들녘을 본다.

아버지의 하모니카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 시절, 어쩌면 도망가고 싶었던 이는 나보다 먼저 아버지였는지도 모른다. 고된 짐을 지고 자식한테서마저도 외면당하며 도망갈래야 도망갈수 없었던 인생을 그 하모니카소리에 담아 다독였을것이다.

아버지한테서 도망가려 등을 보이지 말고 돌아서서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아픔을 안아 드렸더라면—

창문을 연다. 숨 죽여 기다리노라면 아빠트 상공에 다시 려객기 뜰것이다. 굉음을 지르며 날아 오르는 려객기를 보며 난 또다시 탈출을 꿈꿀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붙잡는것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한줄금 하모니카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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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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