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무엇일까. 현재 점점 빨려져 가고 있는 사회에서 “문학위기” 론하는 큰환경하에서 문학이란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책을 보고 성장한 우리들은 “문학이란 무엇”이고 “책을 읽는 것이란 무엇”인지는 정확히 생각해본적 없었을 것이다. 필자도 여러분들과 같은 생각이다. 나한테 문학이란 그저 놓고 싶지 않은 하나의 애착과도 같은 것이 었고 책이란 그저 수시로 읽고 맛보고 음미하며 그가 나한테 주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마치 어릴적 중2병에 젖어 있던 친구들의 “Music is my life(음악은 나의 인생)”이라고 소리를 치며 이불킥을 날릴 행동들을 하면서까지 느껴야만 했던 카타르시스 말이다.법이나도덕, 관습, 상징 체계, 언어 체계 등 소위 ‘아버지의 이름’아래,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주체의 내면에 억압되어 있던 생각과 느낌, 감정의 침전물을 어떤 형태로든 언표화하여 외부로 발산했을때느끼는카타르시스는엄청난것이다. 그러니 마치 중2병이난 중학생보고 “너는 왜 이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있니?”라고 물으면 대답을 얻지 못하듯이 나도 문학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드리기 힘들 것 같다.
혹시지금이글을읽고있는여러분들은이러한카타르시스를느껴본적이있을까? 아마 많은 분들은 이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문학을 하나의 공구로만 사용하였다. 례를 들면 우리는 늘상 문학을 조선어문이라는 수업에 련결하여 생각하고 조선어문 수업이라면 기타 수업의수용력을위해글만읽을줄알면된다는식으로여겨지는경우와대학입시를잘보기위해필연적으로선택하여야하는무미건조한물건으로생각한다. 필자가 연변1중에 다니면서 대학전공을 연변대학 조문학과로 선택을 한다고 하니 대반수 이상 친구들은 “왜 아까운 시간으로 쓸모없는 전공을 배우는데 사용하는가?”하고 물었다. 사실 이것도 리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학생시절은 물론이고 현재도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한다. 우리 사회가 점차 바빠지면서 많은 사람들은 차분히 앉아서 글을 읽기보다 스마트폰으로 짧은 문장을 읽거나 틱톡과 같은 동영상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러다보니 비교적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만 성과를 느낄 수 있는 문학은 사람들한테 다가가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이러한환경하에서도문학을읽어야하는걸까? 필자는 그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읽는데 일반 독자거나 문학보다는 짧은 동영상으로 더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람들한테 문학이란 어떠한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 것일까? 사실상 책을 읽는 다고 하여 다 같은 책인 것은 아니다.지식과정보를얻으려고책을읽는사람들은문학의 ‘쓸모없음’에 경악한다. 심지어일부독자들은인터넷에서떠돌고문장들을보면서도카타르시스를느끼는데문학작품만읽으면머리가아프다고하는분들도본적이있다. 례를 들어보자. 현재 전세계가 집중하고 있는 사건이라면 아마 코 바이러스이다. 한국도 현재 무서운 속도(이하 모두 3.1 기준)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 정치권에 일정한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 현재 한국 정치권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네이버 검색어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차이나게이트>라는 검색어이다. 그럼 이 <차이나게이트>는 무엇일까? 이 검색어를 정확히 알려면 우선 며칠전 한국 소셜네트워크에서 갑자기 등장한 <어느 조선족의 고백>이라는 글부터 말해야 될 것 같다. 27~28일 온라인 상에서 <어느조선족의고백>이라는제목의글이빠르게퍼졌다.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밝힌 글쓴이는 한국에서 유학 중인 많은 조선족이 댓글을 통해 한국내여론을형성한다고주장했다. 글쓴이는 "중국 정부와 한국 민주당이 이 일을 주도하는데, 이들은 무슨 짓을 해도 수사받지 않을 것"이라며 "한국인들이 코로나에 집중해 있는 동안, 중국 정부가 한국의 근간산업을 장학하기 위해 마수를 뻗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글은현재공포감에휩싸인한국사회에서엄청난파장을일으켰고필자가이글을쓰고있는아침현재까지 3000개가 넘는 블로그와 700개를 넘는 카페를, 그리고 600개를 넘는 지식인 문장이 작성되어있다. 그리고 이 컨텐츠로 만들어진 동영상만 70개에 달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필자가 읽고 보았던 대반수의 글들과 영상에서는 이 글에 대한 팩트체크는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전파하고는 하였다.뭐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일부 동영상에서는 혹시 <차이나게이트>에 관한 이 문장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경우에 법적인 처벌을 면하기 위해 “영상 속 내용들은 모두 자신의 뇌피셜이니, 구독자 분들은 본인 스스로 분석을 하기 바란다”는 말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가봐도 이는 “눈가리고아웅”과같이뻔한거짓말을하고있다. 그럼 이 글도 그렇고 이러한 글들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이 문장에 대한 펙트체크도 안 하면서 왜 광기에 휩싸인 전파만 하는 것일까?
사실상필자도이문장의진실성에대해뭐라하고싶지않다. 믿는 사람들은 믿을 것이니 말이다. 그럼 진실성을 떠나서 이 문장은 왜 이토록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포본능, 부정본능, 일반화본능과 비난본능에서 온 것이다. 우선 사람을 태여날때 부터 공포심을 가지고 태여난다. 현재 한국에서는 중국보다도 강한 전파력으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한국 국민들의 공포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만약 인간이 공포감에 휩싸여 두려움으로 자신이 일상을 보내기 시작하면 인간이 판단능력은 어느정도 떨어지게 되어있다. 를 들면 우리가 늘 말하고 있는 정당방위도 어떻게 보면 사람들의 공포본능에 대한 인정이다. 정당방위로 인해 상대방한테 위협을 주었으면 그건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어려서부터 좋은 사람이되려면 타인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로써 어찌 타인을 해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물체에 대해 진행하는 본능적인 반항은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다.즉 공포본능하에 우리는 정확한 판단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위협하면 도덕적 억압에 대한 생각보다 본능적으로 반항하게 되고 누군가가 나를 공포 속에서 구원한다면 그 어떠한 원인이라도 이 말들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한국국민들 공포본능으로 인해 그 누군가가 자신들을 구원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것이 문재인이든 의사든 아니면 정치권에 그 누구든,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다음단계로들어가는것이바로부정본능과일반화본능이다. 사실상 늘 한국의 우호교류를 논하고 있지만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늘 피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많이들 말하고 있는 영화와 예능프로에서 나오는 조선족들도 그렇고 뉴스에서 나오는 조선족에 관한 뉴스들도 그렇다. 심지어 일부 문학작품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보인다. 례를 들면 김사과의 <테러의 시>(2012) 속에서 조선족 녀성이 녀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돼지우리에서 생활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한국 남성이 그를 강간하는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딸을 더렵혔으니 돈을 내고 사가라고 말하는 조선족이었다. 물론 현재 필자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모든 한국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부정을 못하는 것은 현재까지 나오고 있는 조선족에 관한 영화, 예능과 문학작품은 어느정도 한국국민들한테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놓았고 이는 그들의 부정본능과 일반화본능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진실성도 확인되지 않는 <어느 조선족의 고백>이라는 글이 검색어 1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마지막단계로비난본능으로들어간것이다. 정확한 판단이 힘든 공포본능과 예전부터 조선족에 대한 부정본능과 일반화본능의 영향하에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이번 사태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보면 현재 일순위에 놓여야 하는 코로나19와는 큰 련관성이 없다. 전반글은 단지 조선족 단체의 여론조작과 이에 상응한 중국정부가 한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말하고 있다. 앞에서부터 말했지만 필자는 이 문장의 진실성에 대해 그 어떠한 의견도 표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은 현재 한국국민들한테 가장 적합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글이 아닐 수가 없다. 공포본능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분노를 일으킬 수 있고 예전부터 가지고 있는 부정본능과 일반화본능에 따른 반대의견도 나올 수 없으면 마지막으로 공포본능과 부정본능으로 인해 축적되었던 비난을 토로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해 광기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니 이 글의 진실성이 그렇게도 중요할까? 이러한 글들이 생존의미는 바로 여기까지이다.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주면서 여론을 이끌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안 되면 단지 그 카타르시스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 누가 이러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글들의 힘을 또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우리조선족들은이러한글들을보면서어떠한감정을나타내야할까? 그들과같이 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이는 병적인 모습(물론 필자 주위에도 이글에 대해 인정하는 친구들도 있었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족들에 대한 부정본능과 비난본능에서 탄생한 글인데 이에 대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면 병적이 아닐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똑같은 글을 써서 반박해야 하는 걸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현재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한국국민들을 위해 또 이러한 글을 한편 더 쓰는 방식으로 그들을 자극한다면 그들은 더 강한 카타르시스만 느낄 것이다. 마치 첫단락에서 말한 중2병이 있는 중학생들처럼 말이다. 중2병이 있는 중학생들은 부모님에 대한 반항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부모님들의 비난에서 자신들의 성공을 느끼면서 더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니 말이다. 사실 조선족 문단은 예로부터 이러한 부정본능과 일반화본능을 상대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왔다. 그것도 수많은 문학 작품들로 말이다. 왜냐하면 문학을 읽다보면세계관에변화를가져오고주의를다른곳으로돌리게하며타자에대한감수성을바꾼다.만약이말들에대해리해가안간다면필자는아래와같은실례를들고싶다. “어른”들은 늘 80, 90의 의식은 기본적인 자아실현의 충족을 위해 힘쓰는 ‘유희 정신’에 기울어져있고자기자신과본인의미래에만충성심을보이는세대, 즉 기존 세대들과는 다른 집단주의가 아닌 자아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 80,90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80,90들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을까? 이 문제의 답을 찾으시려면 김혁의 <장백산 사라지다>(2004), 리휘의 <울부짖는 성>(2007), 최동일의 <천사는 웃는다>(2007), 리혜선의 <터지는 꽃보라>(2008)와 전춘화의 <리화>(2020년 2월 예정) 같은 작품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러한 글들을 읽고나면 조선족 사회를 휩쓸고 있는 “코리안드림”이라고 불리우는 사회현상 속에서 성장해나간 80,90들의 모습과 그들이 겪게 된 이야기들과 80,90들이 정서 불안의 영향으로 인해 겪게되는 고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뇌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알고 싶다면 박옥남의 <아파트>(2009)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공허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들이거나 박옥남의 또 다른 작품인 <목욕탕에 온 여자들>(2008)에서 나오는 미래에 희망을 잃고 소비 지향적 풍조에 빠져 무력하게 지내는 그들의 모습을 필자는 추천해주고 싶다. 갑작스런 경제 체제의 변화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달콤함만을 향해 달려갔던 부모님들과 80,90들이 느꼈던 애정과 배려 대신 경제적 지원만에 기대어 자본주의의 그늘 속에 살아가는 잔혹한 이야기들은 그당시 말할 수 없었던 80,90들의 마음속 이야기들이고 “어른”들이 그동안 가질 수 없었던 공감대인 것이다.
그럼이것만으로 80,90의 이야기들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일까? 사실상 이것만이 끝이 아니다. 만약 독자님께서 80,90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면 필자는 아래와 같은 작품들도 추천해주고 싶다. 가족해체로인한사랑의결핍과같이 80,90의 앞에 “피동적”으로 놓였던 문제는 바로 민족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많은 조선족 인구의 외국 혹은 대도시로의 이주로 인해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의 조선족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80,90세대중 일부 청년들은 “피동적”으로 다른 문화환경에서 성장하여야 했다. 박옥남의 <둥지>(2007)같은 경우에는 전체 학생이 일곱 명 밖에 안 남은 벽성소학교가 이웃 큰 도시의 한족 소학교로 편입이 되는 이야기를 썼고 조룡기의 <강씨네 샹하이탄>(2009) 같은 경우는 한족 여성과 결혼하고자 했던 주인공 성철이의 뜻을 강제로 꺾고 연변에서 찾아 맺어준 조선족 여성과 결혼하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와 리혼하고 또 한족을 찾을가 두려워서 빨리 조선족 여성을 찾아주는 이야기를 그렸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아예 조선어를 할 수 없는 조선족 3세를 등장시켜 현재 가정을 이루고 나가고 있는 80,90세대 가족의 모습을 암시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천해주고 싶은 것은 최화의 <빈집>이다. 청화대학을 졸업하였지만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느끼게 된 외로움과 불행한 사람끼리 맺어지는 인간적 동정을 그린 작품이다. 사실 최화의 <빈집>은 조선족을 위해 쓴 것이 아닌 모든 80,90세대가 낯선 도시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인간적인 동정을 잘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외국과 대도시로의 이주로 인한 80,90세대의 민족정체성 단절 위기, 그리고 낯선도시에서 외롭고 불안함 속에서 성장해나가고 있는 모습들이 80,90세대가 현재 느끼고 있는, 어찌보면 어쩔 수 없이 변화속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감정들인 것이다.
아무런두서도없이써내려가니글이길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글들을 읽다보면 물론 광기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지만 우리가 생활하는 현재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90후 세대이니 현재까지도 많은 조선족 문단의 영향을 받고 “조선족”세글자가우리들한테주는의미를알고있다. 그리고 <어느 조선족의 고백>과 같은 글들을 보면서도 단지 단순한 분노거나 광기가 아닌 “조선족”의시야에서이문제를바라볼수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만약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성장해온 1.5세대 조선족 어린이들이라면 이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이 글에 대해 모두 믿을가? 아니면 아예 분노를 할까? 또 아니면 현재 우리들과 같이 이 글의 진실성을 놓고 분석을 하고 쟁론을 해볼까? 물론 필자도 우리가 이런 진실성을 확인하지 못한 글들을 보면서 웃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한 사람? 두 사람 정도는 있지 않을까(마치 그 친구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글의 힘이 아닌가 싶다. 만약 하루종일 먹고, 일하고, 자고, 장난치면서 틱톡으로 카라르시스를 느끼는 외에 그 어떠 자신만의 생각이 없는 사람을 백지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조선족의 고백>과 같은 글들은 바로 그 백지에 무언가를 그리는 연필이 되는 것이다. <강씨네 샹하이탄>에서 나오는 제3세대 조선족 어린이들이 어려서부터 읽는 것이 어떠한 문학인가에 따라 그들의 백지는 어떠한 색갈로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동등한 색갈을 가지고 있는 책들만 보면서 공감을 사고 이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더 한층 그 색갈로 변해 갈 것이다. 한 사람이 백지가 점차 단조로운 색상으로 변해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백지일까? 한번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 같다. 만약 단조로운 색상들로만 이루어진 그림을 놓고 우리는 그 그림의 미를 느낄 수 있을까? 그럼 한 인간의 백지장에 단조로운 색상만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미를 느낄 수 있을까? 그림이 아름다운 것은 수많은 선들과 색상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이야기와 미를 우리들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원인도 그런 것이다. 한 인ㄴ의 백지장에는 다양한 색상들로 자신의 주체성을 설명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연필을 마주하게 될때 우리는 그 연필이 가지고 있는 색상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색상들과 수용되는지, 맞는지 아니면 반대로 되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수용이 된다고 하여도 그 어떠한 위치에 색상을 그려넣을까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문학을 읽는 독자들이 느끼는 공감이자 카타르시스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즉 타인이 연필로 인해 마구마구 그려지는 백지가 아닌 자신만의 생각과 의견과 판단으로 자신의 백지를 채워가는 모습이야 말로 문학이 힘이니 말이다.
글 참 잘 읽었습니다. 첫 시작 부분은 공감, 공감. 공감! 하면서 읽다가 중반부터는 제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얘기하셧고 마지막 끝 역시 같은 인생관입니다. 저도 조문학부를 진학한 어느 한 첫 수업이 떠오릅니다. 이 학교 이 전공이 진짜 오고싶어서 온 사람 손 들어라고 했던 선생님 말에 우리반은 저 포함한 고작 두명만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저는 지금도 많은 작품을 읽었다고는 할수 없으나 아직도 문학은 재밋고 책읽는 순간은 카타르시스가 엄청 느껴지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고전이나 깊이있는 글은 피하고 단순히 베스트셀러 같은것만 추구하는 것도 이 시대 추세가 된 점 조금은 아쉽네요~ 저도 가끔 두서없이 뭐를 막 적어서 올리기 좋아하는데 앞으로 두서없는 글 종종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매번 열심히 쓰려고 하는데 쓰다보면 두서없이 써져서 문제입니다.
글을 잘 읽으려고 우선먼저 카타르시스 (Catharsis)라는 생소한 단어부터 잘 공부하고 왔습니다. 혹시 저같이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시간을 절약(?)하라고 여기에 위키의 뜻을 카피합니다.
———-
카타르시스(그리스어: katharsis)는 그리스어로 정화(淨化)를 의미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던 불안, 우울 긴장, 등의 응어리진 감정이 풀리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이러한 정화작용을 비극에서 등장인물의 비극적인 상황이나 비참함을 보고 마음에 있던 응어리나 슬픔이 해소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또 정신분석학에서는 감정의 상처를 밖으로 표출해 안정된 상태를 되찾는 의미로도 쓰인다.
많은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쾌감과 관련하여 생각해볼수있는데, 엄밀히 따지면 카타르시스는 비극에서 비참한 모습이 해소된 이후에만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로 이를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을수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용어로 알려져있다. 그는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관람할 때의 체험을 카타르시스의 주된 내용으로 삼았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체험의 본질은 인간을 한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 환희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관찰했는데, 비극적이고 부정적인 체험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느끼게 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오히려 인간은 이성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초월을 체험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영혼은 한 차원 더 고양된다.
뜻을 하나하나 이해해가면서 글을 열심히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중 “타인이 연필로 인해 마구마구 그려지는 백지가 아닌 자신만의 생각과 의견과 판단으로 자신의 백지를 채워가는 모습이야 말로 문학의 힘이니 말이다.”에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3자에 의하여 그려지는 우리가 아니라, 우리절로 우리를 기록해야 한다는.
그리고 1인 미디어(自媒体) 시대인 요즘, 누구나 주어 들은 정보로 뉴스를 만들어서 전파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뉴스의 질이나 신뢰도는 보장하기 어렵구요. 가짜 뉴스가 너무 많은 요즘 세상에 사람들이 무슨 말을 내뱉거나, 글로 적거나, 영상으로 만들때 한번씩 혹은 두세번씩 더 잘 생각해보고, 자신의 대뇌에 수입된 정보를 잘 분석한후 전파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열심히 검색하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그저 재미로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종이장을 칠할 다양한 물감이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물감으 만들어낼수 있음 좋겟음다 ㅋㅋ그징 ㅋㅋㅋㅋㅋ
언젠가는….있겠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