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12월 4일자 「연세춘추」 ‘청서듦’ 칼럼에 ‘호칭과 인간관계’라는 제목으로 필자가 쓴 글이 실린 바 있다. 이른 아침 캠퍼스에 들어서면서 활자로 된 나의 글을 읽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원고에 ‘내가 비록 어릴 적부터 우리말을 구사해 왔고, 김치를 먹으면서 자라 왔지만, 우리말 외에도 중국어를, 그리고 김치와 함께 중국 요리도 먹으면서 자랐다는 얘기가 된다.’라는 대목을 담당 편집자가 ‘내가 비록 한국인이지만 중국 문화 속에서 자라왔다는 말이 된다’로 줄여서 신문에 실어 버린 것이다. 졸지에 나는 중국인에서 한국인이 돼 버렸다. 분명히 내 지갑에는 ‘주민등록증’이 아닌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나는 중국인이다’는 말에 ‘김치도 먹고 한국말도 잘 하는 당신이 왜 한국인이 아니오?’라고 하면서 섭섭해 하거나 화내는 한국인 친구들을 심심찮게 본다. 실은 필자가 중국인이라고 해서 한(韓)/조선민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부인한 적이 없고 우리 민족을 사랑함에도 말이다. 작년 총선 때 한국인 모두가 어느 후보를 찍느냐에 의견들이 분분했지만 나와 기타 중국·러시아·일본 등 국가에서 온 재한 교포 유학생 친구들한테는 먼 얘기였다.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기본적인 의무이자 권리인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나는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행사할 수 있는 중국 국민인 것이다.

중국은 56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 국가이고 나는 어려서부터 한족(漢族), 회족(이슬람계열, 回族), 만주족(滿族) 등 다양한 민족 친구들과 어울려 자라 왔다. 또 아직은 남·북으로 찢어져 있지만 우리 민족의 단일 민족 국가가 존재함에 자랑을 느끼고 분단의 사실을 슬퍼하면서 말이다. 다민족 국가로 유명한 러시아 교포 친구들과도 비슷한 얘기를 나눈 바 있다.

“중국과 한국의 축구 시합에서 어느 팀을 응원해요?” 재한 중국 교포 유학생들이 한국인 친구들한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아닐까 싶다. 혹자는 이렇게 묻기도 한다. “만일, 중국과 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편에 설 거예요?” 그야말로 민족과 국가의 이중 정체성을 가진 교포 친구들한테는 이중성의 모순을 극대화시킨 잔인한(?) 질문이다.

한중, 한러 또는 한일 전쟁에서 교포들은 과연 어느 편에 설까? 우선, 양국의 언어와 문화를 잘 소화할 수 있는 교포들은 양국 사이에 전쟁이 아니라 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그 다리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과연 질문처럼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나는 적십자 구호대원으로 전쟁터를 넘나들지 않을까. 나에게는 적군도 아군도 없으니 말이다.

우리 민족, 이는 한국 국민 4천만, 북녘의 2천만, 그리고 중국의 2백만, 구소련 지역의 45만, 일본의 80만 등등을 포함한 한반도 외에 거주하는 1000만, 모두 7천만 명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모두를 의미하는 ‘세계 속의 우리 민족’은 그동안 다른 지역, 다른 문화 속에서 다른 운명을 살아왔고, 앞으로 더 다양한 곳에서 살아갈 것이며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찾고 지켜갈 것이다. 이 글이 단일 민족 국가인 한국에서 민족과 국가를 동일한 개념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한국인 친구들에게 이른바 해외 동포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출처: 연세춘추 1411호 2001.03.1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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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도 무려 21년 전에 쓴 글을 옮겨 온 것이다. 다시 읽어 보니 선거권과 피선거권에 관한 부분은 사실이긴 하나 적절한 예는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중국에 있을 때 '피선거'의 경험은 없었고, '선거'는 단 한 번 경험하긴 했으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선거(?)'한 게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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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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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중국인이냐 한국인이냐라는 질문에는 谷爱凌 답에 공감합니다. 谷는 자신은 미국에 있을 때에는 미국인이고 중국에 있을 때는 중국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들레님이 글에서도 말씀하신 이중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Korean- Chinese,Korean -Canadian 등 이런 사람들의 이중성은 Korean-Korean(토박이 한국인)들이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싶습니다. 내가 저들처럼 태어나서부터 이 땅에서 같은 언어를 구사 하는 사람들과 접촉하고 한국 공교육을 받고, 유학 한번 안하고 살아왔다면 나라도 그들의 마인드를 벗어나기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양서류 같은 존재라서 땅도 편하고 물도 편한데, 육지에서만 살아온 코끼리가, 바다에서만 살 수 있는 고래가, 악어같은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끔 Korean-Korean들의 협애함을 보면 신기할 정도로 놀라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그들의 문화를 좀 더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이 땅에서도, 저 땅에서도 만끽하면서 살 수 있는 신분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1. 네, 저도 이제 많이 무뎌졌습니다. 다만, 가끔 내가 제 3국에 갔다가 변을 당했을 때 어느 나라의 외교공관에 연락을 해야 할까 생각하면 말이지요. 답이 나와요. 실제 도움을 줄지의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뭐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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