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이 세상에 태어나기로 계획된 아이가 아니다. 가끔은 삶이 너무 고달파서 그냥 내 언니가 살아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언니가 살았더라면 나는 없었을거니까.
내가 출생하기 십년전, 나의 친언니는 선천성 심장병이라는 이유로 생후 몇개월만에 죽었다. 엄마의 심장이 언니의 심장과 닿지 않으면 심정지된다고, 가슴에 안아 키울지언정 12살을 초과 못할거라고 의사가 말했단다. 그럼에도 아빠는 집에 모든 재산을 털어 언니의 병치료를 위해 큰 병원을 옮겨다녔고, 언니는 결국 저 세상으로 먼저 갔다.
십년뒤, 우연히 내가 임신되었고, 이게 무슨 일인가 봤더니..십년전 언니를 출산했을 때 수술의사의 실수로 내가 임신되었던 것이다. 계획생육정책 시기라 부모님은 아이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울 생각이었으므로, 더 이상 임신이 되지 않는 수술에 동의를 했고 언니를 잃은 뒤엔 다신 아이를 임신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단다. 나는 제왕절개수술로 태어난 아이인데, 나를 출산했을 당시 수술의사 말로는 십년전 잘못 된 의료실수로 말미암아 내가 임신될 수 있었고 엄마의 뱃속엔 큰 염증이 곯아있었고, 나를 꺼내면서 그 염증도 함께 제거했다고 한다.
나는 의료실수로 태어나게 되었지만, 우리 부모님한테는 기적같은 일이었고, 엄마는 나의 출생으로 인해 뱃속의 오래된 염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날 입이 귀에 걸려서 온하루 이쁜 공주님이 태어났다(아빠가 워낙에 애기랑 동물을 좋아했는데 언니를 잃고 한동안 삶이 무너졌다고 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다고 한다. 참, 동네에선 얼마나 시끄러웠을라나, 아님 오그래죽 만들어 서로 인정을 나누던 세월이라 함께 기뻐했었을라나. 무튼 엄마말로는 그냥 쌔뽀얀 곱덩이가 누워있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묘사도 참 냉소적이지, 하얀곱덩이가 뭔가 싶다.
힘들고 괴로울때면 아예 이 세상에 태어나지나 말았더라면 하고 절망하지만, 그래도 태어난 건 잘 된 일인 거 같다. 인간세상의 고통을 알아갈 수 있으니까.
“고통뒤엔 늘 희열이 있다. 불행뒤엔 늘 행복이 있다. “이건 어떠한 룰처럼 동행하는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어쩌면 고통은 연속드라마처럼 우리의 일상이 녹아있고 행복이나 희열은 찰나라는 현실이 벅차기만 하다.
어린 나이인 나에겐 제일 무서운 게 있었는데, 그건 귀신도 아니고 굶주림도 아닌 구더기였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때, 기억에 친구들은 거의 아파트에 살았는데 우리집은 단층집이었다. 단층집의 단점은 화장실이 집안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집이랑 나란히 붙어있는 집이 두 집 있었는데, 한집은 개탕집이었고 한집은 중식당이었다. 회억해보면 이 세집은 즐비하게 늘어진 아파들 사이에 낮게 가지런히 지어져있었다. 지어져 있기보다 허물어지지 않았다가 더 정확한 표현인 거 같다. 무튼 이 세집은 공동화장실 하나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화장실(화장실도 아니고 그때는 공공변소라고 불렀다.)을 가는 게 제일 역겨웠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같이 쓰고 치우지 않기 때문이다.
쓰러질거 같은 오막살이 모양의 외관에, 안에 들어가서 허술한 널판지 두개위에 간신히 다리를 올리고 서서 밑을 내려다보면 늘 구더기가 우글거렸기때문이다. 징그럽고 소름돋았다. 분명, 더 어렸을 때도 이런 화장실을 사용했건만(밤하늘의 별을 볼수 있는 낭만적인 시간이 밤에 나가서 화장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뒷일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러다가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면 이상한 자세로 소원빌고) 그땐 집 사람들만 사용해서 그런가, 아님 너무 어릴때 기억이라 가물가물해서 그런가 이런 괴로운 느낌이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늘 그 화장실에 가자마자 소리지르며 집에 뛰쳐왔고, 아빠는 그때마다 삽을 가지고 가서 주변의 흙으로 응급처지를 해주었다. 화장실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그 구더기들이 흙을 뚫고 올라올가바 뚫어지게 바라보며 볼일을 봤었다. 가끔은 긴장해서 머리를 들면, 위에 거미가 열심히 줄을 치다가 드렁드렁 드리워서 나를 내려다보니 또 깜짝 놀래서 소리지르며 집에 뛰쳐갔다.
하루중 무조건 두번은 화장실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다행히, 아빠가 있어서 수많은 구더기랑 거미 벌레 파리들은 미리 퇴치가 가능햇단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는 동시에 왜 이런 단층집에서 살까 하는 짜증때문에 개탕집 주인 아저씨한테 찾아가 식당집 주인 아저씨랑 협상해서 새 화장실 하나 지어라고 제의를 했던 적도 있다. 어찌됐건, 두 집 손님들이 대량 사용하기에 그게 맞지 않냐고 따졌던 적도 있다. 결과적으론 의미없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부모님한테 왠지 미안했다.
학교를 가는 날은 학교 화장실을 이용할 수가 있어서 행복했다. 며칠이라도 요란하게 볼일을 볼 필요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 그때 내 소원은 아파트에서 쓰는 변기를 소유하는 거 였다. 여러사람들이랑 함께 쓰지 않고 우리 가족만 이용가능한 화장실이 있는거 였다.
지금은, 깨끗한 화장실은 물론 구더기를 못본지도 몇십년은 된 거 같다. 지금 화장실은 일상적인 샤워나 세수하고 양치하는 일 외에는 보통, 눈물을 감추려고 들가거나 통곡하면서 울려고 들가는 장소가 되었다. 그 시절 그렇게 혼비백산하면서 뛰쳐나오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한번 들어가면 오래오래 있곤 한다.
구더기만큼 싫었던 게 있었다면 아마 비오는 날이 아닐가 싶다. 지금은 비 오는 날 감성이 차 넘치고 몽상에 젖어있지만 어릴 땐 정말 귀찮고 번거로웠다.
그때 우리집은 북산이라는 좀 높은 산 위에 위치해 있었다. 올리막도 많았고 산길이라 가파로웠다. 시내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랑 다르게 나는 늘 비오는 날이면 무릎까지 오는 장와를 신고 자전거를 끌고 산길을 돌아돌아 시내로 통하는 아스팔트 길 근처까지 가는 고생을 한번 더 해야 했었다. 그렇게, 아스팔트 길이 보이면 난 근처 물구덩이 같은 곳을 찾아 흙이 묻은 장와를 한번 헹궈낸 뒤 비닐주머니에 챙긴 신발을 갈아신고, 아스팔트 길을 따라 다시 학교로 가는 길에 오른다.
택시를 타고 편안히 학교에 도착하는 친구들이 부러운거보다, 죽어도 장와를 신고 등교하지 않을수 있는 게 내겐 행복이었다. 장와는 내 전체적인 패션을 너무 망친다고 생각햇다. 요즘은 장와가 스타일로도 유행되지만, 나한텐 그냥 흙길을 미끌지 않게 무사히 아스팔트까지 데려다주는 못생기고 실용적인 발목을 넘어오는 신발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수고는 사서 하고 싶어도 할 일이 없고 코앞에 있는 슈퍼마켓에 가면서도 자가용을 이용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너무 편리해서 한치의 거추장스러움도 용서가 안되는 지금이 행복하지가 않다.
그렇게, 초중까지 비탈지고 먼 거리를 왕복 자전거란 교통수단을 줄곧 이용해서 그런지 나는 지금도 자전거를 상당히 잘 탄다. 그리고, 더 잘하는 게 있었는데 상상해서 꾸며내는 글쓰기였다.
나의 글이 처음으로 어딘가 실린 일은 초등학교때 였다. 속초문학상?인가 하는데서 작가상? 인가 하는걸 수상했는데 정확히 그때 돈으로 2000원을 받았었다. 주최측이름도 내가 받은 상의 수상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한 건 당시 그 돈이 큰 돈이었단 것과 그 글은 꾸며낸 것이라는 거다.
그때는 외국바람이 심하게 불었던 2000년대 초반이었다. 친구들 10명에서 절반이상은 부모들이 외국에 가 있었다. (한국에 간 사람들이 제일 많았고 가정형편이 좀 넉넉한 친구들 부모님은 러시아 일본 미국에 간 거로 알고 있다. 부모님 중 적어서 한명은 외국에 있었거나, 외국이 아니더라도 중국 대도시 외지에 나가 있었다.) 한국에 간 사람들중에서도 제일 쉽게 갈수 있는 방법은 위장결혼이었는데, 그러면서 부부사이가 파탄난 집도 많았었다.
나는 그렇게, 몇 안되는 부모 둘다 옆에 있는 가정에 속해있었고(우리 부모님은 왜 외국을 가지 않을까 그땐 돈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 속으로 원망도 적잖게 했는데, 지금도 그 의혹이 풀리지 않는다. 그때 외국에 가지 않은 가정들을 보면 그나마 다 직업이 좋고 외국에 안가도 잘 살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우리집은 그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때문이다. 대단히 평범했지만 빈틈없이 행복했단 건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반증이니, 우리 부모님는 그때부터 탕핑(躺平)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계셧나보다.) 대부분 작문경연의 주제가 이별 혹은 가족상봉이었으므로 내 상상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다. 수없이 머릿속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가정(假设)을 하면서 나는 그 사건의 주인공이 된것마냥 이야기속에 뛰어들어 집중하고 공감하고 과장해야했다. 나는 아빠를 용서할수 없는 나쁜남자( 渣男) 로 설정했고, 나와 엄마는 그런 남편 그런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편지식의 내용이 었는데, 아빠가 너무 독했는지 아님 엄마와 내가 불쌍했는지, 아님 그냥 현상황에서 이런 가정이 얼마나 많을가 하는 심사관의 공감을 자아냈는지.. 무튼 그 글은 꽤 많은 금전적보상을 나한테 안겨주었고 후에 길림신문 첫면에 실렸다. (첨으로 실린글인데 아빠가 바람핀 내용임. 신문에 실릴지 전혀 예상못했음.)
길림신문에 실린 건 친구가 알려줘서 알았다. 친구 엄마가 길림신문에서 내 글을 보고 “여니가 얼굴이 밝아보여서 역시 부모가 다 옆에 있는 애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불쌍한 애였다” 고 했단다. (아빠가 그 글을 읽고 너무 억울해해서 그 뒤에 몇번의 경연은 다 완전 자상한 컨셉으로 만들어줬다. 삼각사랑이란 제목으로 쓴 글인데, 뭐 갈비탕안에 갈비 하나를 셋이 삼각형처럼 서로 주고 받고 하는 내용이었던거 같다. 건축에서 기초공사할 때 씌이는 삼각형의 안전성처럼 우리 가족도 그런 삼각사랑이 지탱하고 있다 그런 식의 비유였는데 그것도 무슨 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갈비 하나로 그 정도까진 아니었을텐데, 순 뻥이었지만 무튼 그 외에도 명태머리, 게, 옷한벌 등등 다양한 사물들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가족사랑을 주제로 나온거라면 오버하며 꾸며내 써서 상장은 적지 않게 받았다.)
웃픈 일이다. 글이랑 현실이 정반대 될 수 있게 해준 부모님이 고맙다.
그런 부모님한테 내가 바라는 게 하나 있었다. 나만의 침대가 있고 싶다는 일이다. 우리집은 내가 세상을 알아서부터 지금까지 세식구가 오붓하게 지낸 기억이 없다. 우리집은 부자가 아니었는데 단연코 사람들이 오기 좋아하는 집 1위였던 거 같다. 내가 완전 어렸을 때에는 외할머니, 친 할머니를 모셨고 그 뒤로는 사촌언니, 사촌오빠들 이모들, 심지어 아빠 친구들까지 늘 우리 집에 함께 지내고 있었다. 작은 집에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란히 누워잤고 나만의 방이라곤 전혀 있을수 없는 상황이었다. 13살부터는 사촌동생이 우리 집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거의 10년을 함께 지냈다. 심지어 내가 고중을 기숙사로 가고 대학을 북경으로 떠났음에도 동생은 우리집에서 쭉 생활했다. 대학붙기전까지.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딸이 두명인 거 같다고 한다. 사촌동생도 우리 엄마아빠를 자기 엄마아빠보다 더 좋아한다. 키워준 정이 무섭다.)
자기방이 따로 없고 자기 침대가 따로 없이 늘 수많은 사람들이랑 부대끼면서 사는 게 어느 순간부터 어지럽다(晕)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사춘기는 침대 하나 가지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끝났다.
미국오기전에, 한국 전주 한옥마을에 출장을 갔다가 한옥구들에서 하룻밤 보낸적이 있는데, 타임캡슐의 마법에 걸린마냥 다시 과거에 잠깐 갔다 온 신비한 느낌을 받았다.나는 결코, 침대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추움을 녹여주는 엄마손길같은 구들이 내 몸이 감싸안겨져 있음을 반응하기엔 더 익숙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리저리 딩굴거려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을만큼의 킹사이즈 침대에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나사에서 사용되는 재료로 만들어 진 매트리스에 누워있지만 딱딱한 구들에 이불펴고 잘 때보다 행복하지가 않다. 그 시절 우리집은 쌀 한포대 사면 일주일이면 없어지고 아이스크림 백개 사놓으면 며칠이면 거덜나고 간장 소금 같은 조미료들은 마법에 걸린마냥 순식간에 사라지고 했는데, 지금의 내 삶은 장을 한번만 보면 진짜 오랫동안 먹을수 있다. 알뜰하고 경제적이고 지극히 효률적인 조용한 지금을 얼마나 바라왔건 만, 북적대던 환경에서 자란 기억이 대부분이라 불쑥불쑥 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방인이라서 그런지 마음한켠은 늘 외롭다.
외로운 타지생활은 북경에서보다 더 외로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오기전까지.
어릴 때 학교엔 지금말로하면 방학마다 캠프 같은 게 있었다. 몇십명씩 조직해서 선생님 두세명이 책임지고 여행겸 견학 같은 걸 다녀오는 거였다. 북경은 수도 였으니까 당연히 인기가 제일 많았고 나도 가고 싶었다. 나는 공부도 잘했고, 늘 반에서 1,2 등이었지만 엄마는 1등 했으니까 캠프 보내줄게 이런식의 평등관계를 나와 유지하지 않았다.
뭘 하면 북경캠프에 날 보내줄수가 있는가 물어보니, 좋은 방법이 있는데 내가 직접 북경에 있는 학교에 붙으면 마음껏 수도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정말 답답하면서도 어딘가 설득이 되는 답변이었다. 그렇게 수도에 대한 동경을 품고 어쨋든 북경에 있는 학교에 붙기는 붙었는데, 졸업을 한 뒤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새삼 느꼈다. (북경에는 고향에 없는 지하철도 있고 멋드러진 영화관도 있었으며, 숨막히는 압력과 노력으로 안되는 게 있었다.)
버블처럼 얇고 투명한 반짝이는 한층의 막은 외부의 작은 터치와 내부의 미세한 자극에도 순식간 붕괴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거나 되고 싶어서 매일을 분주하게 살았다. (북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꿈나무프로젝트 같은 데 가서 자원봉사를 꽤 했다. 견학 온 학생들을 보면 수년전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낱 사회초짜로 헤매고 있는 와중에 또 많은 친구들은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은 사귀는 남친들이 자꾸만 떠나는 나라였다. (사귀고 있는데 어느날인가 토플이나 GRE 공부를 열심히 한다. 사전처럼 두꺼운 책을 펼치고. 그후는 내가 그를 떠나보내거나, 그가 내 곁을 떠난다.) 그땐, 미국은 나와는 접점이 없어보이는 그냥 아득한 곳이었기에, 나는 어떻게 하면 미국에 갈수 있을가 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막연히, 미국에 유학갈수 있는 애들은 참 좋겠다 그저 이 정도였다. 북경에서 몇년 직장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우연히 미국에 갈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번엔 사귀던 남친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그렇게 뉴욕이란, 북경보다 내 상상속에도 없을만큼 멀어 보였던 곳에 떠날 수 있었다.
뉴욕에 정착하고 살아갈수 있다는 건 나한텐 생각밖의 일이었다. (살면서 단 한번도, 미국에 가서 생활할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못해 몇메터밖이 안개처럼 뽀얀데도 나는 그땐 북경에 너무 남고싶었으니까. 북경은 어쩌면 내 제2의 고향이었으니까. ) 뉴욕은, 내가 섣불리 상상했던 곳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 상상을 시작할수 있는 곳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로 행복하지가 않다. 훈춘에서 살때보다, 북경에서 살때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지금 행복하지가 않다.
그런데, 나는 이젠 행복한 척을 너무 잘 하는 거 같다. 옛날에 일부러 상처받은 척 꾸며내기 글을 쓸때처럼.
울며겨자먹기로 그 지루한 공부를 꾸역꾸역하던 시절엔, 북경은 그저 이 큰 중국의 대단한 수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곳은 꿈 같은 곳이었고 그곳에 커다란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북경 물가에 비하면 쥐꼬리만한 월급을 벌면서 北漂하던 시절엔, 미국은 그저 세계에서 초대국이고 제일 잘 사는 나라, 교육체제가 가장 선진적인 나라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곳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고 그곳에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성장환경부터 부모님들이 다 외국에 나가지 않았기에, 이방인이 되는 일은 설레고도 모험가득한 세상처럼 기대가득하게 다가왔다. )
그 세상에서 한껏 부푼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지금은, 고향이 그립다. 그 열심히 빠져나오려고 안깐힘을 다 했던 곳이 그립다. 그곳을 스친 기억들은 다 그토록 작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난 지금 그 곳을 다시 갈수가 없다. 이건 분명 내 욕심이다.
나는 잘난 척 혼자 막 북경에 가고 혼자 막 미국에 왔다. 우리 부모님은 온갖 힘을 다해 내 곁에 남았지만 난 혼신의 힘을 다해 부모님의 곁을 떠났다.
화장실 한번 가는게 무서워서 볼일을 초 단위로 계산했던 나날들, 산꼭대기에 살아서 장와를 신고 자전거를 끌며 힘들게 등교했어야 했던 나날들, 소비돈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 일부러 가정이 파탄난것처럼 글이라도 써서 상금을 받았던 나날들, 침대 하나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이불덮고 울며 일기를 썻던 나날들, 북경캠프에 참가하고 싶어서 두구바라 내가 북경에 있는 대학 혼자 힘으로 붙는다 하면서 벼르고 별렀던 나날들, 北漂생활에서 수많은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현타와서 방황했지만 나이차 하나에 풀려서 역시 대도시하면서 좋아했던 나날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시작했지만 이방인의 슬픔을 견뎌낼수밖에 없는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현재의 나날들… 나는 삶의 한순간도 대충 살았던 적이 없다. 우리 다 그렇치 않는가?
지난 나날들의 나는 조금은 호화롭게 살지는 못햇으나 소박한 념원 하나씩 가슴에 간직하고 진심으로 웃고 좋아하면서 살았던 거 같다. 행복해서 불행한 척 하면서 슬픈 글을 썻고, 많은 걸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작은 거에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 같다. 하찮고 별 볼일없던 평범한 일상에 가족이 있어서 명품으로 허기를 채우지 않아도 명랑할 수 있었고, 조금은 간고하고 고생스럽더라도 오랜 시간이 쌓여 이뤄지는 작은 변화에 놀라움을 느끼며 뿌듯해했었다. 그래서 잘 웃고 잘 웃어서 내 얼굴에 박제된 웃는 표정이 지금은, 낯설게 느껴질때가 많다. 돌고래미소처럼.
돌고래는 얼굴 근육을 움직일 수 없어서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아이의 미소, 다른 하나는 돌고래미소라고 한다. 아이는 진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다. 돌고래도 진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짜 행복해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가슴의 상처와 말못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는 돌고래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돌고래미소를 장착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더 넓은 바다로 역류하는 용감한 돌고래들 말이다.
이 바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울뿐만 아니라 깊고 풍랑도 많고 번개와 우뢰도 가득하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수많은 고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고 우리가 하나씩 타파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은 더 깊은 수심에 그대로 잠적하고 싶을때도 있고, 가끔은 수면위로 날아올라 그대로 바다를 떠나고 싶지만, 우리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속에 있을때 가장 자유로울수 있음을 느낀다.
바다는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그속엔 우리 혈육들이 있으며, 그 혈육들이 대서양 태평양 인도양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언젠가 흘러흘러 만날 그날이 있다는 걸 알기에 열심히 쉬지 않고 헤염치고 있는게 아닌가. 우리는 돌고래미소를 하고 있지만, 진짜 미소를 지을 일들과 사람들을 찾아가는 고된 여정의 끝에서 잠깐의 희열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 같다.
살아보니, 처음부터 쉬운 건 별로 없듯 끝까지 어려운 것도 별로 없던데, 나는 예전보다 많이 소극적인 사람이 된 거 같다. 하고 싶은 얘기도 딱히 없고 다 뻔하게만 느껴져 희망보다는 안 좋은 결과나 미리 걱정하고 소심하게 시작을 꺼려하는 경우도 많다.
살다보니, 어른의 나이가 된 것처럼 살아있으니 태어난 김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기대를 걷어 잠그고 혼자 우울에 빠져 지낼때도 많다.
노력할거면, 논리적으로 따지지도 말고 조건은 생각하지도 말고 우는 아이 달래듯 온전히 안아주어야 하는데 지금은 구실이 많고 명분이 많다.
구더기가 무서워도 널판지에 발을 올려놓던, 비오는 날 장와를 신고서라도 꿋꿋이 자전거를 밀고 가던, 365일 그 무료한 교과서를 반복적으로 외우고 또 외웠던, 지극히 냉철한 현실의 주먹에 연타를 맞으면서도 북경에서 살고 싶단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내가 더 나은거 같다.
미국의 생활은 또 다른 체험의 도전이었고, 나는 그 도전에서 자꾸만 물러설 생각만 하는 같아서 속상하다. 이방인의 도전에는 몇배의 강력한 전투력이 소요되고 충전은 오래 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같아서 힘이 빠진다.
나는 내가 지치지 않길 바란다. 지쳐도 내려놓고 갈수 있는 곳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당분간,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더라도 너무 조급해하지 않길 바란다. 어찌됐 건 모든 건 지나가게 되어있으니 이 시간도 분명 지나갈 거다. 그리고, 이건 전환점에 있다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길 바란다. 코너를 돌면 새 도전과 새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20대의 내가 되길 바란다.
그래도, 이런 희노애락을 한껏 느낄수 있게 이 바다에 나를 잉태시킨 부모님께 (지금이라도 힘들면 다시 부모곁으로 오라고,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너의 뒤에는 우리가 있다고 하는) 고맙다. 세상은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고 한번 한번의 물쌀은 한없이 차갑지만 우리는 종국적으로 마음을 귀속시킬수 있는 그 알집(고향)이 있기에 해볼데까지 할수 있는 용기가 자꾸 생기는 거 같다. 그리고, 그런 안식처마저 없는 그대들이 있더라도 같이 힘내자고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달라도, 우리 모두가 다른 삶을 살고 있어도,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사람을 만나고, 우리 모두가 다른 선택을 할지라도 결국엔 해피앤딩이라는 하나의 세계에 도착해 서로 마주보며 웃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너도 있고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은 지독하게 외롭지만 또 의외로 따뜻하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우린 다 외롭고 다 애써 웃고 있다.
그래서 우린 같다.
아무리 돌고래 미소로 살아간다 한들, 우리에겐 좋은 날이 올 것이다. 햇살이 적당히 따스하고 바람이 적당히 서늘한 고요한 수면위에서 함께 춤추는 그날이…

다 읽고나니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할지요. /돌고래: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그냥 웃는 상이야. 🥹
그렇짐요 ㅋㅋ 행복한 척, 웃으면 복이 온다 뭐 그런..
세상사는게 지독한 고독을 뚫고 지나가보면 그나머지엔 햇살만 남지 않앗을까^^
이제야 느끼는건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우리에 연기는 더 늘어난다는거야… 옛날엔 그냥 속상해서 울엇고 요즘은 웃고잇는데.. 가면뒤에서 울부짖으면서 울고있고 참… 이늠에 인생이란 무엇인지… 아직도 배워가야할께 너무 많은듯해^^ 같이 힘내쟝^^
고독을 뚫고 지나가보면 햇살만 남는다… 그렇짐, 늘 그랬짐요. 고독속에서 버티는 힘과 지혜롭게 넘기는 유연성을 자꾸 연습해야 할텐데, 아직 너무 말랑해서 그게 문제짐요.. 배우며 천천히 가보지뭐.. 같이 화이팅..
애때부터 글쓰기를 잘했군요! 어떤 이유였던, 여니가 결국이 세상에 태어났던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부모님의 딸로 태어나는 그 자체로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고 위로였을가 싶습니다. 신문에 실린 아빠 사연이 ㅋㅋㅋㅋㅋㅋㅋ 억울해도 아빠는 그 신문을 오려두지 않았을가 싶습니다. 왕뿌듯해하시면서♡
맞는 말씀임다. 요즘은 좀 많이 다운되고 우울한 시기라 그냥 생각하는 그대로 적어봤습니다. (먼 훗날, 아 내가 저때 저런 생각을 햇구나, 하구 기록하고 싶어서요.) 어떤 분이, 사람은 생각이 자주 바뀐다고 하더라구요, 내가 빨리 생각을 바꾸고 긍정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글도 써봤습니다. 뿌듯은 글쎄요 ㅋㅋ아빠가 살짝 한심해하면서, 있지도 않는 일을 어떻게 그렇게 생동하게 쓰냐면서 칭찬같은? 어이없음을 온몸으로 표현하시던 (표현력이 없으신 분인데) 그 표정이랑 몸짓이 기억에 생생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