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녘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붉은색이 붉은색을 덮으며 진하게 번지고 있었다. 친구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하늘이라고 했다.노을 때문에 한해에 몇명쯤은 미칠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말없이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이 먹먹하도록 한껏 뻘건 하늘을. 어쩌면 내가 노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시간이였을 것이다.

   ‘사무치다’ 라는 단어가 입 안에서 흐느낌처럼 새여나왔다. 그 단어는 강렬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머리가 갑자기 떠올린 것도 아니고 노을이 알 수 없는 경로로 그 단어를 목구멍에 불쑥 집어넣어서 어쩔수없이 토해낸 것도 아니였다. 무겁고 뜨겁고 강한 기운이 서서히 주위로 몰려오며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리고 내 안으로 스며들어서 곳곳을 느리게 흐르며 저리고 아프게 했다. 그것은 얼마쯤의 감미로움과 부드러움을 배고 있었다. 이 생생한 피빛의 떨림이 서로 모여들고 흡수하고 다시 퍼져가며 ‘사무치다’라는 단어를 어원과 관계없이 내 안에서 새로이 만들어낸 것이다. 완벽한 질감의 언어가 원래 인식된 리해를 깨뜨리며 몸의 온 무게와 온기를 체감하는 순간이였다. 

     ‘사무치다’

    그 단어는 한숨처럼 신음처럼 웨침처럼 노래처럼… 

   또 그리움처럼 기다림처럼 외로움처럼 희망처럼… 

   꽃처럼 나무처럼 바람처럼 별빛처럼… 그 모두를 닮아있었고 

   우리 삶의 결마다에 독한 향기로 배여있었음을 느낀다. 

    어느날은 이제 내게 가능한 남아있는 시간들을 계산해보고 그를 만날 수 있는 날들에 표시를 해보다가 줄어드는 내 시간과 많아지는 리별의 시간을 보면서 울음이 터졌다. 또 어느날은 지도를 펼쳐놓고 그가 있는 곳과 내가 있는 곳 사이, 그 떨어진만큼의 거리를 접고접어 한 점으로 합쳐놓고 현실의 아득한 거리를 스스로 잠시 속이려다가 와락 지도를 구겨 던져버렸다. 어느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바람처럼 파고드는 기억에 몸서리치며 갈 길을 잃어버렸다…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우리는 어찌하든 헤여지게 된다. 그래서 누구는 헤여지는 련습을 하며 산다고 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계속 만나는 련습을 하고 싶다. 아무래도 나중에는 헤여질 줄 몰라서가 아니다. 더 으스러지게 껴안고 더 서로에게 몰두하며 더 가까이 가닿는 련습을 하고 싶다. 언젠가 헤여지는 때가 오면 얼마나 더 고통스러울지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서로의 몸과 마음에 배여든 정과 체온을, 서로의 정신과 령혼에 불어넣은 숨결을 어떻게 갈라낼 수 있을가. 어느 만큼 예리한 칼날이 있으면 상하지 않게 서로를 잘 갈라주어 다시 혼자가 되게 해줄 수 있을가. 서로가 있어서 갖게 된 행복과 불행, 희망과 실망, 환희와 서러움 같은 것들도 썩둑 잘라내고 흔적조차도 깡그리 벗겨내여 남남으로 살았던 원래의 자아의 시간으로 되돌려줄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만나는 련습이 중요하다고 고집한다.

    빈 몸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서 얼마쯤 살다가 온갖 것 다 버리고 죽을 인간이 잠시 머물러있는 동안 무엇에 그리 련련할 필요가 있을가 싶고 다 헛된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땅에서 몸을 부리며 살아가는 동안 사랑을 주기 위해 혹은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하고 싶다. 그 대상이 한사람이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말이다. 내가 태여나 만난 내 자신도 내 생명에도 나는 초연하지 않겠다. 아주 애착하겠다. 내 생에 내 몫으로 주어진 웃음과 눈물 모두를 지독하게 누리겠다. 그래야 진짜로 내 생이 되는 거 아닐가.

     어느 누가 사무침을 체험하지 못했겠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일 역시 사무침이다. 심오한 고뇌로 밤을 새우든 시장에서 감자 몇알을 고르는 순간이든 모두 귀중한 우리의 시간이다. 아무리 평범해보이고 보잘것없어보이고 간단해보이더라도 사무침이 없을 수는 없다. 눈물방울 하나도 사무쳐가는 몸 속에서 진액 같은 것이 고여서 이루어진다. 매일 내딛는 한걸음도 상처와 희망을 껴안고 지탱하려 애쓰는 흔들림으로 나아간다. 작은 미소 하나도 상대에게 아픔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따뜻한 모지름으로 피여난다. 세상을 되는대로 막 살아버리는 듯한 알콜중독자도 그들의 뼈마디마다에는 지나온 거칠고 험악한 날들과 그 때마다 마음을 다잡으며 온몸의 힘을 다해 버티던 순간이 고여있을 것이다. 매 순간들은 평범한 것 같지만, 특별하고 덧없는 것 같지만 소중한 의미들을 품고 있다. 그러니 그 순간순간이 어찌 살갗에, 뼈에 사무치지 않으랴. 다만 사무치는 것들은 말로 표현이 안되며 드러나지 않고 깊이 스며들어있을 뿐이다.

     사무치지 않고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작은 한송이 풀꽃도 가녀린 뿌리를 애써 뻗어가며 비 한방울을 오랜 갈증으로 기다리고 해살 한오리를 온몸 기울여 잡으며 간신히 피워올리는 게 아닐가? 그 하염없는 기다림과 안깐힘이 바로 작은 몸에 깃든 지극한 사무침인 것이다. 어쩌면 이 가을 채 여물지 못한 이삭 하나에조차도 사무침은 있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며 그 과정에 사무침은 슴배여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의 길을 걸어가기도 달려가기도 날아가기도 아니면 주저앉거나 기여가기도 하겠지만 모두 운명을 거머쥐고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사람을 마주하면 굳이 애달픈 모습이 아니더라도 지어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했거나 눈부시게 빛나더라도 그 뒤에 감춰진 삶의 어쩔 수 없는 고단함과 쓸쓸함이 느껴져서 애잔해지고 애틋해지는 것이다. 그 작은 인간이 자기의 삶과 그 삶 속에 들어온 모두에 얼마나 사무쳐가는 존재인지를 알기에 련민이나 리해나 포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열매가 열매로 되기까지, 비가 비로 되기까지,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되기까지, 생이 생으로 되기까지…사무침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사무쳐야 온전히 그것이 된다. 

     글을 쓰다가 가끔 멈추고 어느 만큼의 진실함이 남아있는가 내 가슴에 따져물을 때가 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사소하고 하찮고 희미한 일이나 감정이라도 소중히 껴안은 글을 사랑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의 고요한 울림이며 속살 속에서 부끄러운듯 조용히 배여나온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고 참된 사무침이라 믿기 때문이다. 또 그런 글을 쓴 이들을  사랑한다. 그들은 그 작고 여린 감정들에 마음 다해 감동하며 주체할 수 없는 사무치는 정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에 사무쳐가고 세상에 사무칠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히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 믿는다. 

     점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뜨거움으로 오는 어둠이다. 그래서 이 어둠은 차겁거나 날카롭지 않다. 격렬한 불꽃으로 타오르고 타올라서 자신을 완전히 살라내며 오는 어둠이다. 일종의 존엄성마저 느끼게 해준다. 

     나, 사무쳐서 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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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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