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蘭江

해란강

시ㅣ윤해영(尹海榮)

현대어 번역ㅣ평 강

寂寞한 江이로다. 

적막한 강이로다.

거륵한 江이로다. 

거룩한 강이로다.

고원일흔 자식들 젓줄을 [ㅅ발]니기

고향잃은 자식들 젖줄을 빨리니

海蘭江 百里 언덕에 주름ㅅ살은 잡혓느니

해란강 백리 언덕에 주름살은 잡혔나니

傳說의 물ㅅ줄기 더드머 오르면

전설의 물줄기 더듬어 오르면

鈴蘭이 핀언덕에 어진사슴이

은방울꽃 핀 언덕에 어진 사슴이

호사로운 두[ㅅ불]를 빗처보든 時節

호사로운 두 뿔을 비춰보던 시절엔

亭亭한 落葉松의 아지 가지가

꼿꼿한 낙엽송의 아지 가지가

銀河의 별빗조ㅅ차 가렷다건만

은하의 별빛조차 가렸다건만

이주민의 斧鉞에 歷史가 빗날[ㅅ대]!

이주민의 도끼날에 역사가 빛날 때! 

쓸어지는 丸木의 도막도막을

쓰러지는 통나무의 토막토막을 

가삼에 안고서 흘넛는니.

가슴에 안고서 흘렀나니.

銀河長長 天心에 별이종종

긴긴 은하수 품속에 별이 총총

流域에는 아리아리 人煙이 종종!

류역에는 아리아리 인가가 총총

강낭ㅅ대 마디마디에 希望을매즌

강낭대 마디마디에 희망을 맺은

어진 族屬들이 별[ㅅ데]처럼 茂盛해서

어진 족속들이 별떼처럼 무성해서

입히 필[ㅅ대]면,

잎이 필 때면,

기럭기가 울[ㅅ대]면,

기러기가 울 때면,

懷鄕病 절믄이 들의 

향수병 젊은이들의

로맨스도 실어갓다.

로맨스도 실어갔다.

근심만흔 사나히 들의 

근심 많은 사나이들의

큰 [ㅅ듯]도 실어갓다.

큰 뜻도 실어갔다. 

한世紀 數多한 이地域의 歷史를

한 세기 수많은 이 지역의 력사를

늘근 海蘭江 白沙場에 차즈리

늙은 해란강 백사장에서 찾으리

昭和十三年五月  於 龍 井

1938년 5월   룡 정에서

※『滿洲詩人集』(1942.09.29 발행) 중에서

윤해영은 <선구자>의 작사가. 82년 묵은 시이다. 아니, 82년 동안 빚어진 한 잔의 술이다. 땅을 잃고 나라 잃고 빈털터리로 강을 건너 또 강을 찾았던 그 족속들. 그래도 호사스런 뿔 같은 지조를 머리에 이고 은방울을 울리려 찾았던 그 어진 족속들. 그 어진 이들에게 젖줄기가 되어주고 근심도 실어주고 이야기도 품어줬던 해란강.

토막토막 통나무를 날라주던 해란강은, 오늘도 토막토막 그 족속의 이야기를 실어 나른다. 두만강으로 동해바다로 현해탄으로 태평양으로, 록키산맥을 넘고 자유여신상을 지나도 멈추지 않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82년 전에 ‘늙은 백사장’을 찾아야 했던 그 강은, 오늘도 ‘늙었다’고 해야 하는걸까? 강낭대 마디마디에도 맺힐 수 있었던 희망이 오늘은 살포시 내려앉을 데도 없는걸까?

아니다. 

해란강은 흐른다. 오염에 누래져도, 실개천 같이 가냘파져도, 댐에 누그러져도 그래도 흐른다. ‘만주’와 ‘쇼와’를 적으면서도 해란강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82년 전의 어느 한 조선 시인처럼. 해란강을 마주하고 ‘늙었어도 낡지 않은’ 사색을 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울목이 깊어진다.

사진: 홍성윤

●언어 풀이


【철자나 띄어쓰기 맞춤법】당시의 표기 그대로 두었다. ‘거룩’을 ‘거륵’으로 쓴 것과 같은 것인데 오류가 아니라 우리 글의 표기법이 걸어온 자취이다. 

【ㅅ발, ㅅ불】 ‘ㅅ’을 하나 자음 앞에 더하는 것으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된소리 자음을 표기한 시기는 꽤나 길었다. 지금은 ㅃ, ㄸ 로 표기되는 것의 원형이다. 위챗이 옛 한글을 식별하지 못하는 터라 ‘뿔’이 ‘[ㅅ불]’과 같이 표기된 것은 양해 바람. 

【고원일흔】고원(故園). 옛 뜰. 자기가 나서 자란 곳. 그곳을 잃었으니 ‘고향’으로 바꿈.

【주름ㅅ살】주름살. 가운데 시읏이 하나 더 있는 것은 속격을 나타내는 속격 조사의 옛 표기형태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15세기의 한글문헌에 처음부터 있었다. 한국의 사잇소리 표기는 이 맥락 위에 있다. (예: 나라+님>나랏님)

【鈴蘭】령란. 우리말 ‘은방울꽃’으로 바꿈.

【호사롭다】豪奢.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면이 있음을 이름.

【亭亭】나무가 곧게 뻗어 자란 모양. 현대 중국어에 ‘亭亭玉立’라는 표현이 있는 것도 같은 맥락. 물리적인 곧음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오는 ‘이주민의 역사’ 즉 이주민의 기개도 함께  연결됨을 고려하여 ‘꼿꼿하다’로 바꿔 봄. 사실 ‘정정하다’는 연변에서 아직도 쓰이지만. ‘아매 아바이 정정함두?’

【아지 가지】아지는 새로 나온 연한 가지. ‘가지’보다 여린, ‘가지’의 작은말로 볼 수 있음. ‘가지가지’로 표현하기보다는 시어로써의 참신함이 있음.

【斧鉞】부월. 한자만 봤을 때 斧는 일반 도끼, 鉞은 사이즈가 더 크고 날이 둥근 도끼를 이르지만, 이 시에서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도끼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한자어로 쓰게 되면 단음절보다 쌍음절이 더 안정감이 있기 때문인 걸로 생각됨. ‘도끼’라는 두 음절의 우리말로 바꿔 봄.

【丸木】벌목하여 잔가지를 쳐버리고 곧고 둥근 몸통만 남은 나무. 실제 연변 지역의 림업부문에서는 ‘원목’이란 낱말이 아직 쓰이는데, 丸(환)은 圓(원)과 뜻이 통하기에 ‘원목’이라고 읽었을 가능성이 있음. ‘丸木’이란 한자표기는 일본어에서 많이 쓰이는데(‘마루키’라고 읽음), 일본어에서 丸과 圓은 새김이 똑같이 ‘마루’임. 시인(윤해영)의 일본어 지식의 영향으로 쓰인 낱말이 아닐까 생각됨. 이 시에는 이밖에도 ‘鈴蘭(すずらん)’, ‘長長(ながなが)’, ‘數多(あまた)’ 등과 같이 일본어에서 새겨 읽는 낱말을 우리말에 수입하여 한자음으로 읽은 것으로 보이는 예들이 있음.

【銀河長長 天心】위의 ‘丸木’ 조에서 말한 바와 같이, ‘長長’은 일본어 표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음. 일본어로서는 ‘은하 장장’의 어순이 어색하지 않음. 우리말 ‘긴긴 은하수’로 어순과 리듬을 정리해 봄. ‘天心’은 하늘 한복판을 가리키지만 현대어로는 이해하기 불편하고 ‘하늘 복판’의 식으로 바꾸면 원래 두 글자보다 음절수가 많이 늘어나 리듬이 깨지므로, 의역하여 ‘긴긴 은하수 품속’으로 바꿔 봄.

【강낭ㅅ대】강냉이 대. 옥수수 대.

※무단 전재, 복제 금지. 옮겨가기를 원하시면 댓글이나 회원 메시지로 문의 바람.

이 글을 공유하기:

민족문화의 숲

위챗 공식계정 , ID: kr_forest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좋아요 좋아요
11
좋아요
오~ 오~
0
오~
토닥토닥 토닥토닥
0
토닥토닥

댓글 남기기

글쓰기
작가님의 좋은 글을 기대합니다.
1.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의 초고는 "원고 보관함"에 저장하세요. 2. 원고가 다 완성되면 "발행하기"로 발행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