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마,
쪽진머리,
은비녀,
하얀색 한복저고리와 검정색 한복치마,
그리고 하얀 고무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이다.

김영희, 외할머니의 이름이였다. 1920년대 이름치고는 너무나 모던한 이름이였던것 같다.
외할머니는 아주 깔끔한 분이셧다.
집안이 지저분할때가 없었고, 머리도 늘 가르마에 쪽진머리에 은비녀를 하셨다.
아침이면 외할머니는 늘 거울앞에 앉아서 긴 머리를 풀어서 빗고 타래를 지어서 쪽지고 은비녀로 마무리를 하셨다.
난 그 은비녀가 항상 신기했다.
그렇게 아침에 쪽진 머리는 하루가 지나도 흩으러 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엄청난 미인이셨다. 옛날분이 키가 163센치셨고 몸매도 날씬한 분이셨는데 나이드셔서 허리가 구부러 져서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리셨다. 

근데 워낙 키가 큰 분이시니 비록 허리가 구부러 져서 서있는 140센치도 안되었지만 팔과 다리가 엄청 길었다. 그래서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외할머니 옷은 참 사기 힘들다고, 몸에 맞는 옷을 사면 팔이 짧아서 입을수 없고 팔이 긴 옷을 사면 몸에 맞지 않는다고.

외할머니는 하루에 노란색 장판을 아침, 저녁으로 닦으셨고, 이불 빨래도 자주 하셨다.

밖은 비단으로 되어있고 속은 새하얀 면으로 된 이불, 그 하얀 두꺼운 면으로 된 이불을 외할머니는 삶아서 씻고, 입쌀죽을 해서 풀을 먹이고, 마르면 당당당당 빨래 망치로 두드리기 까지 하셨다. 그렇게 이틀을 고생하여야 이불 하나 완벽하게 씻는것 같았다. 

세탁기가 없었던 시절,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도 빨래를 밖에다 널었다.
그러면 이불 빨래에 물이 떨어지면서 얼어서 고드름이 된다. 

그 고드름을 뜯으면서 놀다가 손이 붙어서 외할머니를 부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고드름을 보면 그 촉감이 느껴진다. 차갑고 반질반질 하고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넣고 싶은 충동.

저녁이면 꽛꽛 얼어든 빨래를 집에 들여온다. 집안에 널어서 하루밤 지나면 신기하게 빨래가 다 마른다. 나는 그 꽛꽛하게 언 빨래 냄새를 즐겨 맡았다. 먼가 깨끗한 냄새, 상괘한 냄새였다. 하지만, 이불빨래의 과정은 어린 나이에 보고만 있어도 고달펐고, 저렇게 까지 해야 되나 싶었다.

외할머니의 하얀 고무신은 어린 나의 발에 늘 컸고, 하지만 그 고무신을 난 밖에 잠깐 나갈때마다 신고 나갔고, 겨울에는 그 고무신이 엄청 미끌었다.밖에 나가서 놀다가도 집앞에 하얀 고무신이 있는지 없는지로 나는 외할머니가 집에 계시는지 안계시는지를 알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어릴적 외가집에서 자란 나는 외할머니가 글을 아시는줄 알았다.그림 달력에 동그라미도 치고 하시니 당연히 글자 쓸줄 아시는줄로.

초등학교때 중국어 시간에 姥姥라는 한자를 배웠다. 중국어 선생님이 집에가서 외할머니한테 써주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쓸줄 모르시는 분이 계시면 가르쳐 주라고 하셨다. 속으로 나는 나의 외할머니는 저정도는 다 쓸수 있을꺼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엄마하고 외할머니 한자 쓰실줄 아냐고 물어보니 우리글도 쓰실줄 모른다고 하셨다. 순간 가슴이 찡해났다. 전쟁년대에 태어나셔서 공부할 기회도 없으셨을걸 생각하니 외할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외할머니는 가끔 집에서 맛있는 간식을 해주셨는데 “앙꼬모찌”라고 하셨다.
“앙꼬모찌”외에도 외할머니는 엄마도 할줄 모르는 예쁜 간식거리를 많이 만들어 주셨다. 파는것도 없는 이런 간식을 어떻게 만들줄 아냐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일제 침략시, 일본집에서 도우미로 일한적 있었는데 일본집 사모님이 아주 좋은 분이셨고 여러가지로 음식 만드는 법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고 하셨다. 외할머니는 그 “앙꼬모찌”를 나중에 일본집을 떠난뒤에도 만들어서 전쟁기간 치마폭에 감추고 다니면서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하셨다. 

총탄이 빗발치는 속에서 흰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고 치마폭에 “앙꼬모찌”를 감추고 다니면서 팔았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주 흥미진지하게 들었다.

이모는 열차 승무원 겸 안내방송원 이였다. 조양천에서 열차에 올라서 동성용진을 지나 팔도인가 그쪽으로 가는 열차였다. 정확히 터미널이 어디고 이모가 어디까지 열차를 타고 갔었는지는 나중에 이모를 만나면 다시한번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외가집이 동성용진에 있었는데 열차가 외가집 기차역에 머무르면 이모가 열차에서 내렸고 그러면 외할머니는 정성들여 준비하신 도시락을 이모한테 넘겨주고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열차장이 호루라기를 휘리릭 하고 길게 불면 이모는 외할머니와 안녕을 하고 다시 열차에 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녁시간에 기차를 타는 딸한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서 외할머니가 늘 도시락을 싸서 이모한테 기차역까지 가져갔었던것 같다.

외가집은 기차역 근처에 있었기에 열차가 오기전 10분전에 외할머니는 도시락을 가지고 집을 나섰다.  방학에 외가집에 있을때면 나는 늘 외할머니랑 같이 기차역으로 갔었는데 이모를 만나는 날이 항상 즐거웠다. 왜냐면 이모한테는 늘 맛있는 간식거리가 있었으니깐. 

이모는 도시락을 받고 나한테 아이스크림을 넘겨주거나 기차에서만 파는 빵이나 사탕을 주곤 하셨다. 기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면서 유니폼에 모자까지 쓴 이모가 내릴때면 난 항상 뿌듯했다. 네이비색 유니폼이 멋있었고 열차 승무원인 이모가 자랑스러웠다.

이모의 스케줄은 늘 바뀌였는데 전화기가 집에 없었던 시절, 기차역에 전화를 하면 기차역에서 근무하는 분이 외할머니한테 전달을 해줬다. 이번달은4,6,8 이번달은 1,3,5,7… 정확히 날짜로 하였던지 요일로 하였던지 기억이 않나지만 외할머니는 이모가 열차에서 내리는 시간과 날짜를 아주 정확히 그림달력에 표기를 해두셨다.

그리고 이모가 출근하는 날이면 오후 세시정도부터 저녁준비를 하셨다. 여러가지 반찬들을 준비하고 가끔은 큰 가마에 가지밥도 지으셨고 옥수수도 삶으셨다. 그리고 반시간 전에는 따끈따끈한 도시락을 실크 보자기에 꽁꽁 싸놓고 옷을 갈아 입으시고 나한테 기차역으로 나가자고 하셨다. 기차역으로 가는 순간이 외가집에서 방학을 보내던 나한테는 제일  즐거운 시간이였다.

여름에는 그나마 괜찮은데 겨울은 해가 일찍 지다보니 기차역으로 가는 길이 어두웠다. 

외할머니는 나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손전등을 비추면서 가로등도 없는 기차역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으셨다. 가끔은 저녁식사가 늦어져서 기차역에 도착하기전에 열차가 역으로 들어서는 칙칙폭폭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외할머니는 아주 총총총 걸음으로 나를 재촉하시면서 빨리 가자고 하신다. 

어찌되었건 한번도 지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나와 외할머니는 항상 이모가 열차에서 내리기전, 이모가 내리는 열차바곤앞에 서있었다. 

그렇게 이모는 도시락을 받아가셨고, 이튿날 아침 외할머니는 또 기차역에 빈 도시락 컨테이너를 받으러 가셨다. 이튿날 이른 새벽이면 기차가 외가집 기차역에 도착하였는데 난 그때는 이모 만나러 나가지 않았다. 이미 저녁에 맛있는 간식을 다 받았고 이모얼굴도 밨으니, 아침에는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던것 같다.개학이 되면 난 이모가 타는 열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승무원이겸 안내방송원 이셨던 이모는 열차에 작은방이 하나 따로 있었다. 

외할머니와 나는 그 방에서 이모랑 같이 앉아 있었고 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모가 우리한테 조용히 하라는 손시늉을 하고 “ 고객여러분, 다음역은 조양천 역입니다. 조양천 역에서 내리실 분들은 준비하여 주십시요.” 이렇게 안내방송을 하셨다. 그리고 이걸 중국어로 한번 더 말하셨다. 

마이크를 끄고나면 나는 다시 이모랑 이야기를 할수 있었다. 난 참 말을 잘 듣는 아이였던거 같다. 지금 우리 아들이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아마도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난 이모의 그 신비로운 열차속 작은방을 좋아했고 방학마다 외가집으로 가는길은 나의 필수 코스였다.

외할아버지는 박식한 분이셨다. 밭에서 일하는 시간을 빼고 집에서 늘 책을 읽으셨다. 대중과학이라는 잡지를 주문하셔서 보셨는데 월간지였던것 같다. 일년이 지나면 그 열두권을 차곡차곡 꿔매여서 사랑방에 보관해두셨다. 내가 어릴때부터 그 잡지를 보셨기에 내가 고중 갈 쯔음, 외가집 사랑방에는 대중과학 잡지로 꽈악 넘쳐났다. 

외할아버지는 과학을 참 많이 믿으셨고, 농사일도 책에 씌여진대로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농사일지를 늘 적으셨다. 외할아버지의 큼직큼직한 글자체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마늘 심음. 비료줌. 이렇게 날짜랑 같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에서 가르쳐준 유용한 정보는 늘 노트에 적어두셨다. 생활 노하우 같은 기록이였던것 같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것도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것 같다.

건강을 엄청 챙기셨던 분이셨기에 며칠에 한번씩 28자전거를 타고 산에 가서 산천수를 받아 자전거에 싣고 오셨다.

퇴직전에는 철도 수리공으로 일하셨고 항미원조에도 참가 하셔서 어릴때 기억에 외할아버지가 쓰시는 머그컵에는  “赠给 – 最可爱的人” 이라는 빨간 글씨가 적혀있었다. 외할아버지 얘기로는 항미원조에 갔다 오실때 나눠주신거라고  하셨다. 

초등학교때 한어 교과서에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谁是最可爱的人) 이런 제목의 글이 있었는데 항미원조에 관한 일이였던것 같다. 그 글을 읽을때마다 나는 늘 외할아버지의 머크컵이 떠올랐었다.

외할아버지는 키가 엄청 크셨고 마르신 체구에 항상 중산복을 입고 다니셨다. 회색 중산복 (中山服)을 색이 바랄때까지 입으셨던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옷은 어디서 구하시는지 참 궁금히다. 

외할아버지는 매일마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집에만 계셨던것 같다. 그리고 늘 동네 할아버지들과 말이 안통한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다. 그때만 하여도 글을 알고 박식한 노인들이 드물었으니 공동화제를 나눌수 있는 말동무도 없었던것 같다. 

매년마다 조금씩 오르는 퇴직금이 외할아버지한테는 큰 위로였고, 설날 집안 식구들이 모이면 올해는 퇴직금이 얼마나 올랐고 그래서 오래오래 살아야 우리 손녀 대학가는것도 보고 시집가는것도 볼수 있다고 하셨다.

외할어버지 외할머니는 내가 대학 가는 것을 보셨고, 친척들이 모였을때 내가 집에 들어서면 첫마디가 항상 “울집 대학생이 왔소” 였다.

외가집에서는 닭을 여러마리 키우셨고 앞마당에는 포도 나무가 있었다. 근데 이 모든것은 손자손녀들을 먹이기 위한것이였다. 퇴직금이 나오고 밭일로 생계를 유지하시는 분들이 아니셨기에 닭을 키우고 채소를 심고 하는 이 모든것은 자식들한테 채소를 보내주고 손자손녀들이 오면 맛있게 먹일려고 여름땡볕에도 밭일을 하셨을것이다.

가을이 되면 옥수수가 무르익고 포도도 익는다. 외할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옥수수를 뜯어 삶아서 봉다리에 꽁꽁 싸서 이른 아침 첫 뻐스를 타고 우리집으로 오신다. 

점심에 집으로 밥먹으로 가면 외할아버지가 오신 날은 그때까지 식지 않은 따끈한 옥수수를 맛볼수 있었다.
노릇노릇하고 달콤한 연변옥수수, 외가집 옥수수 맛을 잊을수가 없다.
연변을 떠나고 나서 한번도 그런 맛의 옥수수를 맛본적이 없다.

여름방학을 항상 외가집에서 보내서 포도가 자라는 것을 매일매일 지켜보고 있었지만, 개학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 갈때까지 포도는 항상 청포도였고, 보라색으로 무르익지 않았다. 너무 뜯어먹고 싶어서 가만히 뜯어먹으면 엄청 시고 떱다. 외할아버지는 가을이 되어야 먹을수 있다고 하셨다. 

그 가을과 개학이 같은 시즌인게 안타까웠다. 포도가 무르익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하니.

외할아버지는 무르익은 포도를 뜯어서 깨끗이 씼어 포도즙을 하셨다. 국경절에 외가집에 놀러가면 난 그 신선한 유기농 포도즙을 맛볼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외가집에서는 일년 사시절 닭을 키웠지만 그 달걀을 항상 아끼고 모아뒀다가 손자손녀들이 놀러가면 꺼내놓으셨다. 토달걀의 노란자위는 유난히 빛이 낫고 맛 또한 기가 막혔다. 한번은 아빠가 혼자서 토달걀 열개를 볶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릴때 난 닭이 다리가 두개밖에 없는것이 항상 불만이였다. 다리가 두개밖에 없으니 나하고 동생이 다리 하나씩 먹으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다른 부위를 드셔야 하니.

우리가 드려도 절때 안드시고 다리는 꼭 나와 동생한테 주셨다.
돼지나 소처럼 다리가 네개이면 한사람 하나씩 먹으면 딱 좋으련만.

외가집 앞뜰에는 닭장 이라고 하는 닭이 밤이면 들어가서 자는 곳이 있었다. 삼층으로 된 구조의 작은 Shelf였는데 신기하게도 닭들은 해가 지고 잘 시간이 되면 다들 자기 자리를 찾아서 들어가 앉는다. 참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얘네는 자기 자리를 어떻게 알고 들어가는지…

닭들이 자기 자리에 다 올라가면 외할아버지는 닭장에 열쇠를 잠그셨다. 아니면 족제비가 닭을 물어 죽인다고 하셨다. 한번은 까먹고 닭장 문을 안 잠그셔서 진짜 족제비가 닭을 여러마리 죽였던 기억이 난다.

외가집 정문 앞에는 까만 전기선 같은것으로 만든 빨래줄이 있었고, 그 빨래줄은 높이도 조절이 가능한 기능이 있었다. 나무 받침대를 비스듬이 놓으면 낮아지고 곧게 놓으면 높아졌다. 

그 빨래줄에는 늘 제비가 있었으며 아주 가끔 까치들이 보였다.그러면 외할아버지는 까치를 보면 좋은일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래서 까치를 보는 날이면 특별히 기분이 좋았다. 

캐나다에서는 제비는 몇마리 못봤는데 까치는 참으로 많은듯 하다. 북미 사람들은 까치를 보면 좋은일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어봤을까? 이제 기회가 되면 꼭 캐나다인들한테 까치를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

외가집에는 집이랑 좀 떨어진 곳에 김장움이 있었다.그안에는 김치독이 여러개 있었고 무우, 감자 배추 등 채소들이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한번 김치 가지러 갈려면 먼저 김장움 위에 눈을 쳐야 김장움안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김치 가지러 갈때는 나는 늘 손전등을 가지고 외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김장움안에는 전기가 없었기에 손전등으로 비춰줘야 보이기 때문이다.
김장움 밖에 쪼그리고 앉아서 난 손전등으로 정확히 김치독을 비췄고 혹시라고 다른곳을 비추면 외할머니가 김치를 못 꺼내실꺼 같아서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열심히 비췄다. 외할머니는 김치를 꺼내서 큰그릇에 담아 가지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셨다.
그리고 김장움 문을 닫으면 미션 클리어.

금방 김장움에서 나온 김치는 톡 쏘는 맛이 천하별미이다.
아무리 현시대 기술이 발달하여 김치냉장고가 있다고 하지만 소시적 김장움 김치맛은 다시는 맛볼수 없을듯 하다.
지금 코스트코에서 파는 김치맛은 어릴적에 아주 여러끼 묵고 묵어서 볶아 먹을수 밖에 없는 그런 정도의 김치라고 해야겠다. 그나마 멀리 고향을 떠나서 캐나다에 오니 그런 김치라도 코스트코에 파는게 있음에 늘 감사하다.

외가집에서는 선인장을 키우셨는데 외할머니는 항상 그 선인장 근처에 가지도 못하게 하셨다. 

선인장을 키우는 이유는 아마도 약재라서 키우셨던것 같다. 아무리 경고하고 만지지 못하게 주의를 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선인장 가시는 나한테 미스테리였고 꼭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존재였다. 찔리고 나서야 울면서 다시는 근처에 않가게 되는 선인장 가시. 찔리면 독이 타서 며칠은 고생해야 했다. 

그리고 게발선인장 (蟹爪兰) 이라는 꽃이 있었는데 외가집 게발선인장은 꼭 설날이면 분홍색 꽃을 피우는게 신기하였다. 그래서 외가집에서는 설꽃이라고 했던것 같다. 설꽃이라고 찾아보니 검색이 안된다. 아마도 외가집에서 게발선인장이 설날에 핀다고 지어낸 이름인듯 하다.

티비 프로그램이 몇개 없었던 시절, 연변 티비 방송에서는 중국 드라마를 많이 번역해서 방영했다. “갈망”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무한 반복으로 방영했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는 “갈망”을 즐겨 시청 하셨고 나도 할일이 없으니 같이 볼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그 “갈망” 주제가만 들어도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도대체 왜 저런 민밋하고 재미없는 드라마를 찍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즐겨 보시니 항상 같이 드라마를 시청하곤 했다.

내가 커가면서 중국어를 많이 알게되니 가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면서 외할머니한테 설명을 해주면 너무 좋아 하셨다.

인터넷도 없고 티비프로그램도 몇개 안되고 핸드폰도 없고 심지어 전화기도 없는 시절이였지만 매일매일 외가집에서 지내는 날들이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다.

외할머니가 해주는 큰가마 가지밥도 먹을수 있었고, 외할아버지가 닭을 잡으면 가끔 그 깃털을 쥐고 놀기도 했으며, 이모가 열차타고 오는 날이면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을수 있는 날이고, 혼자서 방학숙제도 하고 외가집 동네 친구들이랑 화투도 치면서 방학을 보냈었다.

10대에 나는 고향을 떠났고, 20대에는 연변을 떠났고, 30대에 중국을 떠났고, 40대가 된 지금은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중국어와 영어밖에 할줄 모르지만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은 항상 명기시킨다. 

외가집에 대한 기억 조각들도 애들한테 가끔 이야기 해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애들한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엄마의 외가집은 하우스 였고 Garage가  집앞이나 뒤에 붙은것이 아니고 옆에 붙어있는 집이 였고 앞뜰에는 포도나무가 우거졌고 뒷뜰에는 깻잎이 자라고 있었다고… 엄마의 외할머니는 집에서도 검정치마를 즐겨 입으셨고, 외가집 바닦은 노란색 장판이였으며 우리는 그 바닦 위에서 새하얀 비단이불을 덮고 잤었다고… 가마솥에 한 가지밥은 유난히 맛있었으며, 가지밥을 떠내고 남은 가지밥 누룽지는 먹어본 사람만이 알수 있는 신비로운 맛이라고.

오늘도 집을 나서는데 까치가 파다닥 이쁜 날개를 펼치면서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까치를 볼때마다 오늘은 무슨 좋은일이 생길까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다.

외가집은 사랑이 었고, 편안함 이였고, 그리움이였으며 나의 어린 시절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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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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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늘 추억 포텐 터졌네요 🙂 오늘밤은 보라님 꿈에 외할머니 오실것 같아요. 이모한테 벤또 가져다주는 장면은 드라마 같아요. 호각소리 음성지원돼요. 아, 저도 외할머니가 보고싶네요.

    1. 벤또 가져다 주는 일이 추억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중 하나입니다.
      특히 이모가 아이스크림 갖고 내려올때면 제일 기뻣어요. 호각소리 나면 이모가 “엄마, 이젠 들어가우” 이러고 열차에 올라서 문을 닫았어요.ㅋㅋ

  2. 한겨울 추위에 말리는 이불빨래, 집에 들여오면 꽛꽛하게 얼어든 그 이불냄새를 제 코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달콤하다, 아니 연변에서는 배배하다고 그랬던 삶은 찰옥수수, 오른자가 샛노란 토달걀, 알이 작아도 달콤새콤이 제격인 집포도, 김치움에서 막 꺼내 톡쏘는 포기김치… 제 혀끝도 기억하고 있네요..
    진짜 소중한 추억의 글 적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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