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생의 기억 시리즈는 읽으면 아시겠지만, 어떤 장르도 아닌 그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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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만 해도 자전거는 결혼시 예물로 지참해갖고 갈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연길에도 버스선로가 몇개 없던 그때 자전거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고 거의 지금의 자가용이 하는 일들을 자전거가 도맡았다. 어른들에게 자전거는 출근에 요긴한 교통수단이었고 자녀를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 줄수도 있었다. 쌀사러 배급소에 갈때 자전거가 있으면 그저그만이었고 밤중에라도 꼭 가야할 곳이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면 되는 일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이룬 어른들의 자전거사용법이 위에 말한 것들이었다면 청년들의 자전거 사용법은 조금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기껏해야 스무살좌우나 됐을법 했던 언니오빠들은 그때의 우리 눈엔 아주 커보였는데, 종종 여자친구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신명나게 페달을 밟던 오빠들이 보였다. 아이들과는 달리 뒤안장에 가로타고 앉은 언니들은 거의 없고 다들 가볍게 살짝 몸을 날려 뒤안장에 착석한 후 조신하게 발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하고 남자친구가 앉은 자전거 안장 가장자리를 살짝 잡거나 기껏해야 상의를 살짝 잡는 정도였다. 간혹 대범하게 허리를 안은 언니들이 보이면 어르신들은 남사스럽다고 혀를 차기도 했는데,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남자친구의 자전거 앞에 앉은 언니들이 보이면  “개방됐다”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그렇게 나는 80년대의 시대의 흐름이었던 “개혁개방”이란 단어보다 “개방”이란 단어를 먼저 접했다. 

세발 자전거조차 소유하지 못했던 어린 나에게 자전거를 타는 것은 어른들의 특권으로만  여겨졌는데,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개혁”덕분인지 “개방”덕분인지는 몰라도 집집마다 소학교 자녀에게도 자전거를 사줄 수 있는 여력이 되었고 나는 먼저 자전거 배우기에 나섰다. 소위 좀 “드살이 쎈” 아이들은 하루면 배운다는 자전거를 조심조심 보름에 걸쳐 배워낸 나에게 부족한 것은 사실 “드살”이 아니라 운동신경이었다. 도대체 누가 뒤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영영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설 용기가 없었건만, 맵시있는 새 자전거를 향한 열망은 그 두려움을 넘어서면서 드디어 위태롭게나마 자전거를 다룰수 가 있었다. 

그때 사실 자전거를 타고 다닌 아이들은 이미 있었다. 주말이 되면 대다수의 남자아이들과 일부 여자아이들은 어른들이 타는 얼빠(28형)자전거도 자기 몸에 달린 신발처럼 자유자재로 타고 동네를 누볐다. 키가 작은 아이들은 그 자전거를 타면 어른들처럼 안장에 앉을수가 없어서 핸들과 안장사이를 연결한 “체대”라고 불리던 봉 밑으로 다리를 넣어 페달을 밟았다. 그 자세는 “가달빼기”라는 자기만의 이름도 갖고 있었다. 

“가달빼기”는 나는 절대로 못하거니와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원한건 오로지 가장 소형인 노란색 얼링(20형)자전거였고 소학교 3학년 때엔가 그 자전거는 내것이 되었다. 거의 어른들의 한달 월급에 맞먹는 금액으로 산 그 자전거를 나는 소중히 다뤘고 학교에 가서도 다른 자전거에 긁히지 않게 신경써서 자리를 골라서 세웠다. 동생이 커서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자 나는 동생을 아침마다 자전거 뒤안장에 앉히고 학교에 갔다. “언니허리를 꼭 붙잡아라!” 스스로를 3인칭으로까지 부르며 생색을 내며 아침마다 언니행세를 했는데, 그 언니때문에 동생이 크게 다칠번 한 일은 지금도 자전거에 관한 나의 가장 굵직한 기억이다. 

그날도 동생을 안전한 자세로 앉히고 발이 뒷바퀴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라, 언니 허리를 꼭 잡아라 등등 당부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길에 나섰다. 가는 길에 친구집 근처에서 기다려서 같이 가기로 했기에 가운데 내려야 했었는데, 동생한테 “내릴 준비를 해라” 라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내릴 준비라는 것은 허리를 잡으면 내가 내리지 못하니까, 안장을 잡거나 하라는 뜻이었는데 동생은 긴장한 나머지 내릴 태세를 취하다가 자전거에서 떨어졌던 거다. 내가 자전거에서 내려 뒤돌아 봤을때 동생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로 뒤안장을 잡고 끌려오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예쁜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내 동생이 차가운 바닥에서 그것도 내가 탄 자전거에 질질 끌려오다니!’ 대조효과가 들어가서 좀 드라마틱하게 들리지만 이는 그때 내 심정에 대한 가감없는 표현이다. 동생이 나때문에 위험했던 적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그날따라 죄책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서 말하지 말란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뒤에도 얼링자전거에 동생과 사촌동생 둘이나 나란히 앉히고 타는 등 많은 도전과 기행을 해나가던 어느날, 자전거와 영영 안녕하게 되었다. 도둑을 맞은거다. 그때는 새 자전거를 사면 복도가 아니라 집안에 들여다 놓는다 해도 전혀 과한 행동이 아닐만큼 자전거도둑이 많았다. 동생의 기억에 의하면 중학교때 방학에 복도에 세워둔 동생의 자전거는 먼지가 많이 껴서 그런지 무사했는데, 개학을 앞두고 온 가족이 동원돼서 자전거를 광이 나게 닦자마자 이튿날 아침에 자전거가 보이지 않았단다. 

도둑을 맞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자전거는 닦아야 했고 또 꽤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걸레를 꼭 짜서 안장부터 시작해 구석구석 닦는다. 물을 여러번 바꿔가며 꼼꼼히 닦아주다가 마지막에 자전거 바퀴안에 있는 바퀴살까지 한가닥 한가닥 닦아준다. 조금 찌그러진 못생긴 앞바구니 또한 정성스레 닦아준다. 내일 아침 학교에 갈때 또 거기에 도시락통이 든 가방을 넣어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집근처에 있는 자전거 수리부에 가서 10전을 내고 바퀴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준다. 수리부아저씨가 나에게 자전거뽐뿌를 건네주지만 아저씨에게 부탁한다. 뽐뿌질하는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싫어서 그랬던걸 봐선 아마 그때 이미 사춘기에 들어섰나보다. 

사춘기란 참으로 특별한 시기인건지 고등학생이 되고나니 그 좋아하던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일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학교는 집에서 멀었고 삼십분 남짓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여름에는 날이 더워서, 가을에는 바람이 불어서 얼굴이 빨개져서 보기 흉했기 때문이었다. 비가오면 버스를 타고 가게 돼서 좋았고 아예 매일 버스를 탈 수 있는 겨울이 기다려졌다.  

고등학교때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택시와 부딪혀 넘어진 적도 있었다. 크게 아픈 곳이 없어서 그대로 일어나서 학교에 가긴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자전거사고가 난건 나뿐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다가 크게 다쳐서 몇주동안 깁스를 한 친구1, 한쪽 팔이 빠진 친구 2, 자전거 체인이 갑자기 빠져서 공골바닥에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 친구3도 있었다. 친구 3에게는 자전거에 얽힌 아주 특별한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었는데, 한번은 수박을 안고 어머니 자전거 뒤에 앉았는데, 내릴때 뛰어내리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를 무릅쓰고 안장에서 뛰어내리다가 그만 손에서 수박을 놓쳤다고 한다. 그 모습을 잠간 상상해보았다. 친구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수박도 박살나고, 나도 박살났다”고 했다. 

구십년대 중반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산악자전거가 인기를 끌었다. 바퀴가 굵고 핸들이 일자로 된 산악자전거는 탈때 등을 좀 굽히고 타야했는데 그 모습이 좀 멋있어보였다. 나도 타보고 싶어서 친구 자전거를 한번 타봤더니 팔에 힘이 여간 들어가는게 아니어서 매일 타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이삼년 지나서 갑자기 거리에 바퀴가 가느다란 자전거가 나타났다. 레이싱자전거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타본적이 없는 그 자전거는 산악자전거보다 등을 더 심하게 굽혀야 했었고 또 그게 더 멋있어보인 이유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가끔 팔구십년대의 북경에 관한 영상을 보면 천안문 앞으로 북경시민들의 자전거부대가 지나가는 모습이 꼭 있었다.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의 은색부분이 반짝이는 것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북경에 갔더니 지하철역 근처를 위주로 여기저기에 자전거가 줄지어 있었다. 북경을 휩쓴 공유자전거유행의 진풍경인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똑같게 생긴 공유자전거는 사용하기에 편해보이긴 했으나 예전 같은 다양한 멋은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손때묻은 자전거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기엔 부족한 신흥아이템이었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중국의 현 상황에서 대세는 아직도 자동차다. 자전거를 타기보다는 자동차를 운전하면 더 품위가 있어보이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가보지는 못했으나, 북유럽은 우리와 반대라고 한다. 환경에 대한 의식이 높은 그곳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은 일종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방식이며 환경을 위한 실천이며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인가보다. 세월이 흘러 우리도 언젠가는 자전거가 다시 생활화되고 잃어버린 은빛물결을 다시 되찾을 날이 오지 않을가 기대해본다. 그날까지 나의 몸이 자전거를 타는 법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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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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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읽는내내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리는 향수같은 글이었습니다. 얼빠 자전거, 가달빼기 ㅋㅋㅋㅋ너무 그리운 단어들이군요. 저도 초중 학교 다닐땐 매일 아침 깨끗한 물로 반짝반짝 닦고 쌩쌩 달리며 멋스레 두손을 놓고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새로사준 도시락 통 다 부셔먹고 수박도 박살나고 나도 박살나는 똑같은 신세가 종종 있군 했죠. 지금은 다 고급 외제타도 타보는 새월이 되었건만 나는 지금도 봄꽃이 흩날리즈음 바람이 솔솔 부는 바다가 인행도로로 자전거 타는걸 행복으로 간주합니다. 이번 키웨스트 여행도 매일밤 자전거투어를 동네 구석구석하면서 다녔을정도로요~ 잠시나마 90년대 추억의 감성에 젖어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1. 댓글 감사합니다. 이제야 대댓글을 다네요. 저의 추억이 저만의 것이 아닌 보편의 기억이었다니 기쁩니다. 너무 제좋은 소리만 하는건 아닌가 해서요 ㅎㅎ 그나저나 봄꽃이 오라지않음 흩날릴텐데 밖에 못 나가서 안타깝습니다. 비상시기에 여니님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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