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전 세상뜬 고모는 아버지의 사촌누이였다. 고모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큰아버지는 훈춘에서 항일을 하시다 두살 난 고모와 젊은 부인을 남기고 희생되셨다. 고모의 할머니, 그러니까 내 증조할머니는 짱짱한 성격의 소유자셨다고 한다. 장자를 잃으신 증조할머니는 둘째아들인 나의 할아버지댁에 오게 되였는데 젊은 며느리에게 손녀는 우리 '리씨 집' 자손이니 우리 집에 두고 너는 재가를 하라고 권고했다 한다. 

그렇게 세살에 작은아버지댁(나의 할아버지)에 맡겨진 큰고모는 아버지와 한집에서 친형제처럼 자랐다고 한다. 고모의 어머니는 그때 북으로 재가를 가셨다.

그렇게 연변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회계공부도 하신 고모는 열아홉에 고향을 떠나, 키워주신 작은아버지 집을 떠나 길림시의 어느 합금공장에 취직을 하셨다. 

거기서 고모는 자식 넷을 낳고 평생 회계일을 하시다 퇴직을 했다. 어려서 나는 그 고모를 '한족고모'라 불렀다. 한어를 더 많이 썼던 것이다. 중간중간 섞어서 쓰시는 우리말은 어린 내가 듣기에도 어눌해보였다. 

다 커서 고모에게 우리말이 더 편한지 한어가 더 편한지 물어본 적이 있다. 고모는 그래도 우리말로 해야 생각을 다 전달한 느낌이 든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물론 그 말씀도 한어로 하셨다. 

"还是朝语方便。”

고모는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네 자식 중 어느 하나가 연변에서 짝을 찾았으면 하고 바라셨다 한다. 자식을 따라 늘그막에는 고향인 연변에 오실 생각이셨던가 보다. 그러나 길림이 태여나서 자란 고향인 자식들에게는 연변이 생소한 곳이였다. 네 자식은 부모의 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들 고향에서 우리말을 쓰지 않는 그곳 조선족들을 만나 결혼하였다. 

십여년전 어느 하루, 고모가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왔더란다. 지금 집 '땐스'(텔레비죤 방송)에서 조선말이 하루 종일 '왕왕' 나온다고 그렇게 즐거워하시더란다. 연변인민방송국의 위성방송이 아마 길림에도 나왔던가보다. 그 방송은 꽤 오래동안 퇴직한 고모의 일상의 락으로 되였다. 

고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고모의 인생에 대해 막연히 생각을 해보았다. 낯선 곳에서 조선족도 없는 직장에서 고모는 얼마나 외로웠을가. 익숙치 않은 한어로 의사소통을 해가며 고모는 갑갑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가. 결국 애착을 가지던 우리말마저도 생소해지면서 고모는 얼마나 혼란을 겪었을가.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고모가 우리 집에 들른 적이 있다. 우리 집에서 하루 묵고 훈춘을 통해 조선에 간다고 하셨다. 

평생 찾아뵙고싶어했던 조선에 간 어머니를 여러가지 경로로 수소문한 끝에 겨우겨우 련락이 닿으셨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이미 '할머니'가 된 고모에게 아직 엄마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엄마를 만날 수 있어서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며칠이 지나서 고모가 다시 우리 집에 들렀다. 조선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걸음이였다. 엄마가 물었다. 

"그래 엄마를 만나 얘기를 많이 했슴둥?"

"얘기랄 게 있소. 오내르 안구 울기만 했소."

고모는 이미 팔순을 넘기신 엄마와 '오내르' 안고 울기만 하려고 그 먼 걸음을 하신 것이다. 부실한 관절 때문에 무릎 걸음을 해가며 환갑이 지난 나이에 기억도 없는 낳아준 엄마를 만나러 고모는 만사불구하고 달려간 것이다. 

81세의 어머니는 북에서 자식들을 낳고 다행히 정정한 모습으로 계시더란다. 그저 두 모녀는 목이 꺽 메인 채 울기만 했다고 한다. 세살에 두고 온 딸을 환갑이 넘은 나이에야 만나는 그 마음은 어떤 벅찬 것일가. 

그 이후 고모는 조선에 더 가지 않았다. 고모가 다녀온 이듬해 고모의 어머니는 82세로 세상을 뜨셨던 것이다. 몇십년을 그리워하던, 두고 온 딸을 만나자 생의 의미를 다하신 홀가분함으로 이세상과의 인연을 놓으신 게 아닐가 싶다. 

환갑이 넘어 기억도 없는 엄마를 찾아 먼 걸음을 하신 고모의 행위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가? 애초에 설명이 필요없는 일일 것이다. 그 맹목적이고 무가내한 애착과 그리움을 어떤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말보다 한어를 더 많이 쓰면서도 모어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하는 그 마음과 불원천리하고 기억에도 없는 엄마를 찾아 나서는 그 마음은 맹목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그저 내 안에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머리보다 내 마음이 먼저 알아서 움직이는 것…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힘 주어 설명하고 강조하려다보니 그것은 차라리 억지스럽고 공허한 말이 되여버렸다. 

피천득은 <피가지변>이라는 글에서 "로즈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로울 것이라는 말은 줄리엣 같은 소녀의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로즈라는 음향 속에는 영국 사람들의 한없는 정서가 깃들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로즈라는 어음이나 글자는 가지가지의 인연 얽힌 추억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썼다.

두만강을 '투먼쟝'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당장 두만강이 다른 강으로 변하는 게 아니지만 우리말로 두만강을 두만강이라 부를 때에는 그 음향 속에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진달래꽃'이나 '천지꽃'을 '찐다라이'라고 부른다고 그 꽃의 향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찐다라이'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중앙방송국 아나운서 동경(董卿)이 언젠가 방송에서 내가 좋아하는 중국 당대 작가 로요(路遥)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호소했다.  

"로요는 자기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세상에는 멋진 곳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황하가 있습니까? 그곳에 황산이 있습니까? 그곳에 장강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은 대체불가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를 사랑하고 우리의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매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입니다."

말을 바꿔한다면 이 넓디넓은 세계에는 풍요로운 곳이 많고도 많다. 그러나 그곳에 내 추억이 깃든 두만강 유보도가 있는가? 거기에 내가 발 부르트도록 걸어다니던 부르하통하 강변이 있는가? 거기에 어려서 내가 미역감던 석두하가 있는가? 

산해진미가 널렸지만 거기에 울엄마가 만들어주던 매콤한 옥수수온면이 있는가? 쫀득쫀득 풀기가 느껴지던 '입쌀밴새'가 있는가? 두만강 유보도의 한 로천 가게에서 먹던 그 감칠맛나던 '감자지짐'이 있는가?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은 대체불가한 것이다. 그러니 내 고향을 사랑하고 내 민족 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민족 구성원이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고 그것에 대한 사랑은 기본적인 권리인 것이다. 

기본적인 권리라고 생각해서, 공기같은 것이여서 내가 이렇게 애절하게 사랑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위기의식이 느껴지자 새삼 이 사랑을 만방에 터뜨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절제하고 절제하여 사랑한다고 나즈막이 읊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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