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닦으면서 강의 같은 토크쇼를 들었다. 일하기 싫은 7년차 직장인이 왜 직장을 바꾸지 않는지를 얘기하길래 홀랑 넘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90분간 듣고 말았다. 어려운 취업, 90후의 여유와 허무, 중년의 안일과 초조, 내적동기, 자기애, 선택 련습, 어려운 인재뽑기 등을 다루었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곳이 있었다. 직장이 안정적이지만 일하기 싫은 7년차 직장인이, 그대로 있으면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나 나중에 본인 성장보다 ‘후대 양성’에 정성을 붓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 숙제로 싸우게 되고. 본인 성장을 멈추면 안된다는 경고인 듯하다. 헌데 이야기 중에 외국에서는 나이가 들어도 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70세에 신나게 비서일을 하는 할머니를 직접 보기도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게 아닌가. 그럼 7년차가 15년차, 50년차가 되여 70세 비서 할머니로 일하는건 어떤가. 

따지자면 이런거다.

7년차 직장인이 안정적이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한다. 하기 싫지만 그만두고 싶을 정도는 아니고 업무 수행에 지장이 없다보니 당장 변화를 시도할 원동력이 없다. 그리고 직장을 바꾼다고 하여 지금보다 나은지 확실치도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하기 더 싫어질 가능성이 높은 반면 나이가 들고 부양할 식솔이 생겨 변화를 꾀하기 어렵게 된다. 안정적이고 괜찮은 직장이라도 하는 일이 싫으면 의기소침할 수 있어 부정적으로 본다.

70세 할머니가 반복적이고 사소한 듯 보이는 비서일을 신나게 한다. 좋아하는 일이다보니 정성을 쏟게 되고 그러다보니 더 원활하고 순조롭다. 사회적지위나 비젼에 상관없이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하므로 긍정적으로 본다.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과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어디서 나올가. 몇가지 외부 요소를 우선 발라내기로 한다. 

1 과거와 미래

7년차 직장인이 10년차, 15년차가 되면 반드시 더 일하기 싫어지는 것은 아니다. 권태기가 지나 스스로 상태를 조절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여유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해 할수도 있다. 

70세 할머니가 하는 일이 늘 원활하고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도 일하기 싫은 7년차를 겪었을 수 있다.

한 사람이 오는건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떠나 한 사람을 보는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지금’ 이순간에 국한하기로 한다. 

2 경제적자유 

7년차 직장인은 육아, 주택,양로 등의 문제를 고려하여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밥줄에 매인 것 같아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에 오히려 하는 일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70세 할머니는 양로보험이나 다른 로후대비책이 있어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다보니 근무 수당을 따지지 않고 기꺼이 일한다.

1993년에 량표(粮票)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식량이 충족하게 공급되였다는 말이다. 식량난에 고생했던 어른들에 비해 90후들이 선의적인 것은 형제자매들과 음식을 빼앗아먹을 필요 없이 풍요롭게 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질적으로 결핍하면 정신적으로 자유롭기 힘들다. 잠시,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롭다는 전제를 깔기로 한다.

3 시간적자유

7년차 직장인은 시간이 늘 빠듯할 수 있다. 고객, 동료, 애인, 친구,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보면 정작 본인에게 온전히 주어진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그 중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하는 직장일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70세 할머니는 심심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 고맙고 반가울 수 있다.

한번에 한가지 일만 잘하는건 어렵지 않다. 학생시절에는 부모님이 주시는 돈을 쓰면서 주로 공부만 하고 지내다가 어른이 되면 밥벌이 하랴, 전공 공부 하랴, 아이 키우랴 요령껏 재주를 부려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지내다가 어느새 내가 닳아 떨어진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다시 여유가 생기고 자신을 돌보게 되는 것 같다. 다른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동일하게 요구하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잠시, 모두 시간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다고 전제한다.

다시 따지자면 이런거다.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신나게 일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건 왜서일가.

우선 ‘하기 싫다’와 ‘즐긴다’의 차이는 어디서 나올가.

***

일을 즐긴다는건 무얼가.

공자의 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乐之者를 우선 떠올리게 된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신영복 선생님은 고전강독 <강의>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지(), 호(), 낙(乐)의 차이입니다. 글자 그대로 지는 아는 것, 호는 좋아하는 것, 낙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 간다면 락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즐거운 마음’이 관건이다. 궁리하고 만드는 학습과 로동의 과정이 쉽지 않겠으나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 놀이가 된다는 의미다. 즐거운 마음은 어디에서 나올가.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올가? 

신영복 작가님은 락은 단순히 대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지, 호, 낙의 차이를 규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각각을 하나의 통합적 체계 속에서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낙은 어떤 판단 형식이라기보다는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 전체와 부분이 혼연한 일체를 이룬 어떤 질서와 장(场)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직장에서의 락은, 일속에 내가 있고 내속에 일이 있는 상태인가. 이런 상태는 보통 나를 잊고, 시간도 잊은채 일에 몰입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지금, 이순간’에 살 때이다. 

‘지금, 이순간’에 사는 대표적인 인물로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가 있다. 조르바는 포도주를 마실 때, 난생 처음 마시듯 감탄을 한다. 

그런데 말이요, 보스양반. 이 빨간 물은 도대체 뭐요. 말해줄 수 있겠소? 늙은 그루터기에서도 싹이 나오고, 거기에 시큼한 물체가 열려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햇볕에 잘 구워지면 꿀처럼 단내가 나는 거요. 그걸 우리가 포도라고 부르잖아요. 그걸 따다가 발로 밟아 즙을 내서 나무통에 담아요. 그 즙이 통 안에서 끓어오르다가 축제일에 통을 열어 따르면 펑펑 포도주가 나오지 뭡니까. 이 무슨 기적이란 말이오.

이걸 마시면 우리 영혼은 더 이상 구역질나는 이 가죽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부풀어 올라요. 그러면 우린 하느님께 결투를 신청하는 간 큰 짓을 하는 거죠. 도대체 이게 뭐냔 말이요. 보스 양반 어디 말해 볼 수 있겠소? 

포도주를 마실 때 포도주를 기적이라 하면서 기뻐하고, 아침에 눈을 뜰때 눈이 떠진다고 환호하고 해빛을 받고 바람을 맞고 돌을 볼 때 자연을 경이로워한다. 그것이 반복되는 일일지라도 매번 기적으로 대하고 희열을 느낀다. 온전히 그 순간을 살고 있으니.

조르바는 조르바를 사랑했다. 조르바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조르바라서. 

다시 돌아가서, 70세 할머니는 일할 때 아마 잡념 없이 온전히 그 순간에 사는 경우가 많았고 7년차 직장인은 아마 ‘지난번에도 이런 일을 했는데, 또 하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푸념하면서 과거와 미래에 사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그럼 잡념 없이 일하는 것과 푸념하면서 일하는 차이는 어디서 나올가.

‘지난번에도 이런 일을 했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의 푸념은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로 잡념 없이 일하는 할머니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 경제적자유와 시간적자유의 차이를 떠나 단순히 일의 의미를 본다면 결국 ‘내가 어떻게 보는지’의 차이일 것이다.

7년차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는 외부평가에 물젖어, 상상속 응당 큰 프로젝트를 폼나게 돌리고 있어야 할 자신이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의미가 없다고 느낄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은 즐기기 어렵다. 또는 외부에서 주입하는 의미를 기준으로 내가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오래 못가고 의기소침하게 된다. 

반면 70세 할머니는 상상속 자신과 현실의 모습이 대체로 일치하여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게 아닐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에,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삶에 비겁함과 비참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자기비하의 감정을 느끼는게 싫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정하는거지. 밖에서 의미를 찾는 대신 내가 하는 일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의미가 없을리 없다. 

어쩌면 상상속의 나로 현실의 나를 괴롭히지 않고 내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게 아닐가. 

나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존재한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시점은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에 몰두하여 이 순간을 잘 보내는 것이 나에 대한 존중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니 몰입하게 되고 몰입하니 사랑하게 되는거네.

***

그러나 살다보면 앞에서 1,2,3으로 배제한 물질, 제도, 관념 등의 제한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집세/집 대출, 양육비용, 로후자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과제가 있고 극복해야 할 곤난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자유롭지 않다고 하여 자신을 괴롭히지 말자. 자유롭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과제를 수행하고 곤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자. 이건 나를 위해 필요한 일이며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고생을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있다. 헌데 몸에 좋은건 쓴 맛이 아니라 좋은 성분이다. 몸에 좋은 성분을 달콤한 꿀과 같이 타서 먹거나 캡슐에 넣어 먹으면 쓰지도 않고 몸에도 좋다. 굳이 쓰게 먹지 않아도 된다. 쓴 맛은 부산물일뿐이니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그게 안되면 ‘어떡하겠어, 약은 필요한데 당분간 꿀도 없도 캡슐도 없으니 쓴 맛 그대로 먹자’하고 기꺼이 감내하기로 하면 덜 괴로울 것이다. 

다만 어린이들은 원래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때문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모른다고 한다. 그들에게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좋은 직장 좋은 대학을 위해 지금 고생하라는 말이 납득되지 않는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어른스럽지 못한 어른에게도 고통은 고통일뿐이다. 그러니 우선 어른이 되고, 몰입이 안되는 순간에는 ‘내가 왜 이걸 겪어야 해’ 에 사로잡혀 어린이처럼 징징대지 말고, 어른답게 꿀과 캡슐을 찾아보고, 없으면 기꺼이 감내하자. 그리고 잘하고 있는거라고 다독이자.

***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에서 <장자>에 나오는 포정해우(包丁解牛), 포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포정이 문혜군(文惠君,梁나라 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는데 그 손을 놀리는 것이나, 어깨로 받치는 것이나 발로 딛는 것이나, 무릎을 굽히는 모양니나, 쓱쓱 칼지라는 품이 음률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오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포정이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 동안이나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멈추가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7년차든 70세든 무슨 일을 하든 하는 일을 즐기고 자신을 뿌듯해하며 일과 혼연일체가 되여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겠구나 하고 끄덕이게 된다. 

강의 링크https://mp.weixin.qq.com/s/5gJK3YlfQEB0qgPXAETUnQ (문단 아래쪽 큐알코드를 스캔하면 강의 전체를 들을 수 있습니다)

신영복  <강의>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万维钢  <“苦”没有价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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