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과 그 배후의 진실
"마지막 수업"은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었고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과문이기도 하다. 수십년이 지난후에도 기억나는 교과서속에 수록되 문장이 있다면 아마 “마지막 수업”일 것이다. 아마 외국작가가 쓴 문장치고 우리들에게 이처럼 큰 감동을 주고 공감을 이끌어 내는 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모국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 수업"을 예로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마지막 수업"이 서양에서보다는 동양에서 환영받는 이유는 이 문장이 오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유럽역사에 대한 생소함 때문이다.

우리는 "마지막 수업"을 읽으면 알자스 지방의 학생들에게 프랑스어가 모어母语(mother tongue)이고 독일인들이 그들의 모어母语(mother tongue)를 배우지 못하게 하고 독일어를 배우게 강요했다고 오해하고 있다. 또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사실 알자스인들에게 프랑스어는 모어母语(mother tongue)가 아니다. 알자스인들의 모어母语(mother tongue)는 알자스어이다. 알자스어는 게르만어계에 속하는 독일어의 일종이다. 라틴어계에 속하는 프랑스어보다는 같은 게르만어계에 속하는 독일어가 알자스어랑 오히려 더 가깝다.다만 당시 알자스지역이 꽤나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의 통치를 받았었던 이유 때문에 알자스지역의 학교들은 프랑스어를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코 우리가 배워 왔던 것처럼 알자스의 학생들이 모어母语(mother tongue)를 잃게 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결코 독일인들의 이들의 모어母语(mother tongue)를 약탈하려 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알자스 지역의 사람들중 상류계층 사람들만 프랑스어사용이 가능했었고 대부분의 알자스인들은 알자스어만 사용가능한 것이었다.  "마지막 수업"에서의 프랑스어 선생 아렐만  프랑스인이였을 것이다.

알자스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스위스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다. 신성로마제국은 게르만인들의 제국이므로 독일제1제국이라고도 불리우니 알자스지역은 사실은 독일의 영토였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합스부르그 왕조의 통치를 한때 받다가 17세기에 프랑스와의 30년간의 전쟁을 치루고 합스부르그 왕조가 알자스지역을 프랑스에 팔아버렸다.

프랑스의 통치하에서도 알자스는 특별한 지역으로 독일어로 교육이 진행되였었다. 프랑스령이 였지만 독일의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독일의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였다.

그러다가 1833년부터 프랑스어 교육이 시작되고 1850년부터 1870년까지 20년 사이에 알자스지역에서 대한 프랑스어 보급률이 높아진다. 그래도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이 되었지 민간에 보급된 건 아니었다. 당시 알자스지역의 150만명의 주민중 프랑스어 사용자는 5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1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독일과의 전쟁을 발동하였다가 패전하게 되였다. 그래서 알자스지역은 독일에 다시 귀속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독일이 알자스지역에서 의무교육을 통하여 프랑스어를 페지하고 독일어를 보급시키기 시작한다.

이것이 "마지막 수업"의 역사적 배경이다.

다만 저자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인였던 고로 프랑스의 입장에서 사실을 왜곡해서  "마지막 수업"을 쓴 것이지 알자스인들의 입장을 대변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마지막 수업"은 지금까지 오독误读 되어 오고 있다.

어떤 문장을 읽던지 그 역사적 배경 문화적 배경 언어적 특성, 저자의 경력 등을 배제하고 읽으면 误读하기가 굉장히 쉽다. 수많은 서양문학들이 오독되는 이유가 이런 이유들 때문인 것 같다.

어쨌든 오독이든 오해이든, 그 오독으로 인하였지만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나 경험 때문에 감동을 받았던 작품이다.

진실은 가끔 감성을 자극하는 것들 앞에서는 한없이 창백해 진다.

문학작품을 읽을때 가끔 경시되는 부분이 바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이다. 그리고 번역작품은 특히 원작의 언어의 특성은 완전히 배제된 상황에서 읽혀진다. 그러나 문학작품은 결코 아름다운 단어나 구절들의 조합뿐만이 아니다. 문학작품은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의 큰 배경과 그 작품을 배출하게되는 문화적 토양이 있다. 이런 것들을 배제하고 작품을 읽으면 오독 되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수업”은 그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읽으면 참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러나 그 감동적인 문자들 뒤에 감추어진 진실은 결코 아름다운것이 아니다. 알자스 사람들에게 프랑스나 독일 모두가 그들의 언어를 빼앗아간 사람들이다. 도데는 알자스사람들의 진심을 한편의 문장으로 왜곡시켰다. 알자스사람들의 언어를 빼앗아갔던 프랑스인들을 대변해서 프랑스의 추악함을 거짓된 문장으로 덮어 버리고 심지어 미화 시킨 것이다.

성공학이 난무하고 “영혼의 치킨수프”형태의 문장들이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마지막 수업”의 진실을 밝혀 이성이 배제되고 감성만을 자극하는 문장들 배면의 것을 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들의 표면에만 심취하지 말고 그 내면도 볼수 있기를 바란다.

독서에서 중요한 것이 행간을 읽는 것이라고 한다. 쓰여지지는 않았으나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읽어내는 것이 독서의 백미이다. 그런데 행간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저자와 작품의 배경을 알아가는 것도 본문을 읽는 것 만큼 중요하다.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을 요해하고 다시 읽는 “마지막 수업”은 어떻게 읽혀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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愚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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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핏 들은 적이 있는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텍스트를 짤라다 쓰면 각자 이해하고 싶은대로 갖다 붙이고 싶은대로 쓰는 일이 비일비재니까요 ㅎㅎ 원작은 1871년 발표된 작품이니 민족(nation)을 강조하는 근대국가를 곳곳에서 내세우고 만들어가는 작업이 한창이였겠지요. 정작 알자스 로렌 사람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거시적 담론에 써먹은 이야기.

  2. 이 작품이 동아시아에서 번역된 경과를 봐도 재밌습니다. 역시 또한번 자기 나름대로 갖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식입니다.

    중국에서는 1912년에 胡适이 「割让地」란 이름으로 번역. 시국을 갖다 빗댔지요.
    일본은 1914년 동경대 불문과를 나온 後藤末雄(고토 스에오)가 도데 단편을 추려서 단행본 『普仏戦話』이란 이름으로 묶는데 제일 첫 편에 바로「最後の授業」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 일본은 1차대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조선에서는 1923년 최남선이 자신이 꾸리는 주간지 《동명(東明)》에 「萬世: 마즈막 課程」이란 이름으로 번역합니다. 만세운동으로 옥살이를 하다 금방 나왔고 1927년에 친일행각이 있기 전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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