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부터 ‘작은 아씨들’을 읽고 있었다. 워낙 내용이 많이 알려진 이야기를 나는 지난해에 새로 상영된 영화로 가장 먼저 접했다. 자매가 많은 집의 시끌벅적함과, 현명한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 가난하지만 산뜻한 집안 분위기, 연극, 문학, 음악, 미술을 각각 사랑하는 딸들의 분명한 캐릭터, 영화의 화려한 복식 등이 마음을 끌었다. 기회가 되면 원작을 읽어보리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 이 책은 이미 우리집에 있는 물건이었다.

동생이 2년전에 중고거래로 사서 보내준 책이었는데 그동안 잊고 살다니. 새해에는 집에 있는 책부터 먼저 읽기로 했던 차에, 400쪽이 넘는 분량이라 두달에 나누어 1월과 2월에 나누어 공부하듯이 천천히 읽었다.

사실, 독자로서 읽는 재미만 본다면, 줄거리나 대사가 ‘빨간 머리 앤’ (소녀취향이라고 웃어도 빨간 머리 앤 덕후임을 부인하지 않겠다) 에 훨씬 못미치며 교훈적인 장면들이 들어갈 것을 출판사로부터 주문받은 듯이 어색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빨간 머리 앤’보다 40년이나 먼저 나온 책이다) 작가인 Louisa May Alcott은 원래 더 진지한 글을 쓰는 것이 그녀의 창작이념이었으나, 소녀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런 책이 잘 팔릴 거라는 출판상의 설득에 넘어가, ‘작은 아씨들’을 쓰게 된다.

배경은 미국 내 남북전쟁이 한창인 시기라서, 책의 중간 부분까지 목사인 아버지 March 선생은 전쟁 현장에서 군목으로 근무하다가 돌아온다. 아버지의 잠시동안의 부재의 이유는,  의도적으로 잠시나마 집에 없도록 설정하여, 이야기에서 종종 가정 내 권위를 상징하는 남성 역할을 배제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맨 앞의 책소개에서 나온다. (주말에 아버지가 집을 비웠을 때 맘이 편했다면, 바로 그 느낌일 것이다)

물론 March선생은 가족 모두가 그리워하는 바람직한 아버지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작가가 여자 다섯으로  밑그림을 그려놓은 후에 한참이 지나서야 이야기속으로 초청된다. (아직 여자들끼리 좀만 더 놀아야 해서.)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장면에 등장하는 소녀가 주인공인 둘째딸 조(Jo),  이름은 Josephin 조세핀이나 말괄량이인 딸은 이 번거로운 이름을 싫어하고 스스로 Jo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석자 이름에서 귀찮다고 어릴때 가운데 글자를 빼버리고 陈平으로 스스로 개명한 대만작가 三毛가 생각난다.

조가 자기가 쓴 이야기를 들고 출판사 사장을 만나, 책의 출판을 계약하고 환희에 넘쳐 거리를 뛰어가는 모습, 나는 영화 전체에서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자기가 쓴 글로 돈을 버는 일, 소녀 조가 일찌감치 청년시절에 들어서는 순간인 것 같다.

오늘 읽던 중, 글을 쓸 때의 조와 가족들 사이의 무언의 소통이 나온다.

“몇 주에 한번꼴로, Jo는 방에서 나가지 않고 ‘창작용 작업복’을 입고  그녀의 표현대로 하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마음과 영혼을 다해 소설에 매진했다. 끝내기 전에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으니까.

‘창작용 작업복’은 Jo가 원할 때마다 펜을 닦을 수 있는 검정색 피나포어 (소매 없는 상의와 치마가 연결 된 옷, 앞치마 비슷한 모양), 본격적으로 펜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거추장스러움을 덜기 위해 머리를 얹어올려  집어넣을 수 있는 발랄한 빨간색 리본이 달린, 피나포어와 동일한 소재의 모자로 구성되었다.

이 모자는 소설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한 조의 가족들—그들은 대체로 조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편이었으며 아주 가끔 방문으로 머리만 들어온채 ‘영감이 불타오르고 있는거야, 조?’라고 묻기만 했다—의 눈에는 신호를 주는 등대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대개는 이 질문도 하지 않고 대신 모자를 관찰하여 판단하곤 했다. 

만약 표현력이 풍부한 이 의류품목이 이마에 낮게 드리워져 있으면 어려운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뜻이었고, 글이 고조로 치닫는 때가 되면 모자는 삐딱하게 걸쳐져 있었고, 우리의 작가가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는 아예 벗겨져 바닥에 팽개쳐져 있었다. 

이럴 때면 가족들은 가까이 왔다가도 말없이 돌아갔고, 작가의 재능있는 이마위에 빨간 리본이 유쾌하게 오똑 서 있을 때에야만 누구든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인용한 단락이 나온 부분

조의 신경질적인 창작의 고뇌가 느껴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재작년에 리디북스에서 한달 무료 이용권으로 읽은  ‘예술하는 습관’이라는 책이 생각났다(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여기서 빌려온 것이다). 작가, 음악가, 공연예술 등 예술인들의 창작습관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이었는데, 결론은 재능도 중요하지만  혹독한 연습을 반복하는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창작행위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자신의 태만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본업 외에도 가정을 돌봐야 하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도 싸우는 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이 자료들을 정리한 작가는 비슷한 내용의 먼저번 책인 ‘리추얼’에서는 남성 예술인들을 많이 다뤘기에, 이 책에서는 특별히 전부 여성 예술인들만 수록했다.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짐작할만한 부분이긴 하지만, 백년 전의 여성 작가들은 대부분 엄청난 가사노동과 육아외의 자투리 시간에 글을 썼으며, 성공한 여성 작가들은 때론 마찬가지로 작가이지만 아내보다 재능이 떨어졌던 남편들의 질투와 방해를 받기도 했으며, 또한 아주 많은 경우는 글을 쓴다는 사실을 숨기고 비밀스럽게 썼고, 남자 이름처럼 들리는 필명으로 출판하는게 예사였다.

작업실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 것은 물론이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 것은, 단지 실체로서의 ‘방’의 필요성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지만, 작업실도 없이 거실에서 글을 써야 했던 많은 동시대 여성작가들이 확실히 책에 언급되기도 했던것처럼.

아무튼 이렇게 읽다보면 다른 내용과 연결되고 하는 것도 읽는 일의 재미인것 같다. 또 가끔 책이라는 이 사물은 나의 삶과 연결되기도 하는데, 중고로 구한 이 책이 그랬다.

처음에는 못봤다가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이 첫 페이지의 스티커. 원 주인이 2000년 8월에 교보문고에서 샀나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해 여름이다. 이날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을 하다가 다시 살펴보니, 단짝친구의 생일날이었다. 대학입학이 정해진 한가로운 여름의 끝무렵에 아마 걔랑 만나서 놀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우연한 기쁨을 주는 이런 순간이 좋다. 평범한 지나간 날들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날짜를 표기해준, 손글씨를 잘 쓰는 어떤 책주인에게 감사를.

[2022.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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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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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 너무 잘 읽었고, 영화 작은 아씨들도 아주 인상깊게 봤었기에 안에 나오는 구절인용과 장면들이 속속 회상되네요. 저는 jo가 갑자기 필을 받아 온 땅바닥에 정연하게 한장씩 초고를 써내려가던 장면이랑 티모시에게 자기 꿈을 막 흥분돼서 말할때랑 마지막 책 출판계약을 마치고 해방을 맞이한 사람처럼 힘차게 달려갈 때 이 세장면이 제일 좋았어요. 게인적으로 남주 여주 모두 제가 좋아하는 배우였던거도 있고, 장면이 아름다운 영화였어요. 여 주인공이 작가가 꿈이고 또 그 시대에 드뎌 그 꿈을 실현하는 장면도 뭔가 같이 벅찼고…영어원본을 읽는 진안님 멋지고, 마지막 구절 짱 맘에 드네요. 일상의 작은 일들이 우연한 기쁨을 주는 이런 순간이 좋다… (저도 맨하탄에서 그냥 걷다가 우연히 클림트의 아델바우어의 초상이 소장된 갤러리를 발견했을때 이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게 정녕 내가 우연히 걷다가 머리를 들어 언뜻 발견 할 곳인가 싶으면서..) 책주인 손 글씨도 이 책을 선물한 동생도 다 귀엽네요

    1. 어찜 이리 조목조목 짚어가면서 답해주시는지, 감동임다 여니님. 저도 여주남주 너무 예쁘고 좋았슴다. 둘이 안돼서 아쉬운데 책에 보니 또 남주랑 에이미 사이도 개연성이 없지는 않더군요. 조에 대한 로리의 마음은 요즘 말을 빌자면 그야말로 추앙이고, 에이미는 로리를 해방시키죠. 어느게 더 좋은지 모르겠슴다. 아쉬움이 있슴다 그래서 ㅎㅎ 길가다가 막 명화를 만나는 뉴욕, 멋진 곳이고 그런 것에 감동하는 여니님은 자기가 있을 곳에 있는거 같네요.

      1. 로리랑 조, 그리고 에이미 사이의 결말이 어찌보면 더 현실적이죠. 아쉬움은 늘 좋은 겁니다. 저는 저 영화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게, 여자의 일생에 시집 잘 가는 것 빼고도 꿈이 있다는 걸 전면에 내세웠지만, 돈이 왜 독립에 필요하고 돈과 욕망 인생 그리고 더 나아가서 꿈과도 연결이 된다는 점이, 극단적으로 돈을 보면 김치녀이고 시잡가면 뭐 만사해결 된 것처럼 묘사하는 평면적인 서사보다, 훨씬 마음이 가더라구요. 결국, 어느 시대든, 결혼을 햇든 안했든, 중요한 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탐구해야지 외적인데서 갈구하는 건 큰 의미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이야기인거 같아요. 엠마왓슨이 눈에 안 들어올 정도로 조가 매력적이었고, 에이미 역시 물질적으로 보이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걸 잘 아는 선명한 캐릭터가 분명햇던 같아요.

        1. 네, 돈 얘기가 영화에도 나오고 책에도 곧잘 나와요. 조는 가정에 대한 부담감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겠지만, 또 독립된 여성으로 살고 싶은 자신의 꿈이 무의식중에 작용했겠죠. 자로 잰 듯이 똑 떨어지는게 아니라, 사람은 가끔 여러가지 마음의 소리들 중에 B가 더 크지만 나는 A를 위해서 하는거야 라고 생각하기도 하는것 같아요. / “중요한 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탐구해야지 외적인데서 갈구하는 건 큰 의미 없다”는 말에도 동의해요. 그리고 또한, 누군가에 대한 사랑보다는 내가 단단해야 되는게 중요한것 같구요.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태어나서 가족아닌 생판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조를 연기하는 배우를 저기서 처음 봤는데 정말 매력적이었어요. 네, 엠마 왓슨이 좀 안보일까 할 정도 ㅎㅎ 에이미 보면 볼수록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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