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은실

맥주 한잔이라도 하면 아직도 진지하게 문학에 대해 토론하는 대학때 동아리 친구들이 있다.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없어서 침 튀겨가며 하던 젊었을 적 토론을 위챗 단체 방으로 옮겨 문자로 주고 받지만 열기는 그때에 못지 않다.
우리는 자주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서로 주고 받는다.
한때 우리는 문학은 아픔이라는 말에 공감을 표했다. 창작은 아픔의 소산이여야 하고 그렇게 나온 작품이야말로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는 문학은 문학이 아니라고도 했던 것 같다.
‘빈자의 문학’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같이 했다. 유한 마담의 부르주아틱한 문화활동으로서의 글쓰기는 말짱 허위라며 같이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다. 어떤 이는 부르주아틱한 ‘유한 마담’이 되였고 어떤 이는 자식에게 그런 삶을 물려주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제일 처음의 명제로 돌아가 “문학은 아픔이여야 한다”는 말에 질의를 던졌다. 그리고 “문학은 아름다움과 진실함”이면 족하다며 조금은 누그러진 어조로 이야기했다.
문학은 그저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만 분주했던 것 같다.
시인?
한영남 시인의 세번째 시집 ≪추억은 거기 울바자처럼 서있었네≫의 편집을 맡으며 나는 ‘문학은 아픔’일 수도 또 문학은 아름다움일 수도 있으며 그 두 명제는 크게 모순되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한영남 시의 아픔은 피 뚝뚝 떨어지는 날것의 아픔이 아니라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이게 다 뭐라구요. 근데 피빛 령롱하지 않나요?”하며 조용히 웃는 처연한 아픔이다.
<치솔이 일곱개인 사내>, <무깍지동네>, <서시장 뒤골목에 비가 내리면> 등 시에 흐르는 정서는 아픔과 무가내함, 슬픔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따뜻함이 흐른다.
명월구 큰집과
詩兄네 집에하나씩
철남 남산기슭 누님네 집과
신라호텔 뒷골목 누이네 집과
혈액센터 부근 작은 삼촌네 집에
또 하나씩
북대 文兄네 집에는 의례 하나
유수천 내가 흐르는 막바지산을 의지해 세워놓은
비뚜름한 상수조카네 집에도 하나 있었다
석줄 넉줄짜리 큰 치솔 둘과
겨우 두줄짜리 작은 치솔 셋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치솔통에
마치 그 집 식솔인 듯이 내 못난 치솔이
거드름을 빼고 있었다
……(중략)……
청포도 빛 내 치솔이 살아가는일곱통의 치솔 집들에서는
오히려 저들이 미안해
자리를 드텨가며
못난 내 치솔이 살아갈 자리를
숨통 너르게 내여주곤 했다
언제 내게도 내 치솔통이 생기는 날
일곱통의 치솔식
솔들을 한자리에 모셔
잔치라도 벌여야겠다
치약이 떨어져 맹물로 치솔질하던 이야기도
웃으며 다시 해봐야겠다
<치솔이 일곱개인 사내>에서
무가내한 궁핍이 있지만 그 기저에는 따뜻한 정이 흐른다. 시를 읽는 독자들이 그 따뜻한 정경에 녹아드는 것은 시인 본인이 그 정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시? 문학?
언젠가 필자의 글을 평한 한 지인의 글은 본 적이 있다. “서민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처지를 대변해주었다”라고 적힌 글에서 나는 허탈감과 절망을 느꼈다.
그가 느끼기에 ‘나’는 방관자에 다름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신발 끝이라도 적실세라 사품치며 흐르는 강가를 조심스레 걷고 있는 사람이였던 것이다. 소심한 겁쟁이인 주제에 그 세찬 강줄기 밑바닥에 대해서 다 아는 척 떠드는 사람이였으리라…

한영남의 시가 감화력을 갖는 것은 그는 강가를 조심스레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찬 강물에 몸을 던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철남에서도 한참 남쪽
남산엉뎅이에 밀치닥거리며
간신히 비비고 앉은 게딱지동네
삼륜차부들과 달래장사군들이
부부랍시고 어우러져 사는
구석에서 모여와 다시 구석이 된
털터리동네
아침이면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엷은 바람벽사이 소리라도 샐가 봐
주부들은 조심스레 청국장을 끓이고
어쩌다까만 남편과 까만 안해가 다투어도
소리죽여 얼굴만 붉히고
까만 아이들도 손짓과 눈짓으로만
말하는 데 습관이 된 무성동네
펀들거리는 흑백텔레비도
소리를 한껏 낮추어 보고
제집에서 마늘쪽을 먹어도
냄새가 퍼질가 봐 입을 막고 먹는
내가 사는 동네는 동네랄 뿐
꽁꽁 여민 창 안에서오로지 귀만 토끼처럼 살구고 사는
내가 사는 동네는
사람이 살아서 동네가 아니라
연기가 피여올라서 동네이고
초저녁 일곱시부터 까막나라가 되는
소리도 냄새도 빛도 없는
메주처럼 속으로 속으로만 썩고 괴는무깍지동네
<무깍지동네> 전문
강물에 몸을 던졌대서 그의 시가 투사적인 강인함과 열렬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회오리치는 강물 속에서 조금은 헤식어보이는 웃음을 짓는 사람일 것이다. 그 웃음이 보는 사람들 마음속에 조금씩 스며들며 여운을 만든다.
아픔? 슬픔?
그의 시에 아픔과 련민만 있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싫증을 냈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그랬던가. “예술과 가난이 등식인 세상에서 예술을 선택한 시인은 자발적인 빈자”라고.
한영남은 아마 그러한 자발적인 빈자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였더라면 한영남은 세상을 원망하고 이 사회의 부조리를 까밝히는 데 온힘을 소진했을 것이다. ‘자발적’이였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같이 손잡고 출렁이며 환호할 친구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그는 아픔과 가난 그 너머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대해 썼다.
풀길에서는
여린 잎들이 서로
파란 뺨 부비며
연신 까르르 웃음을 흘리고
황금빛 해살의 휘파람에
나무잎들이
짙푸른 아우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무더기 무더기 쏟아진 꽃들이
바람 스칠 적마다
목 메이는 향기를 사방 훅훅 풍기고
담 밑에서는 봉선화가
수줍음을 기껏 들쓰고 있었다
풀과 꽃과 나무를 두고
건네줄 아무 말 없디없다
여름이였나보다
<여름이였나 보다> 전문
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는 계절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사람 사이에 찡기면서 풀이 그리워
서러운 살 몸 여미는 초라니 인생
한번 쯤이라도 꽃멀미나 시켜라
징그런 해살이 부서지는 기껏 부드러운 하늘
파겁을 못한 소녀인양
오무리고 서서 바시시 떠는 가난한 심장
순간이나마 꽃멀미나 시켜라
개나리 복사꽃 개불알꽃 노루궁둥이
우리 꽃들이 다급히 피는 계절
이슬이 싱싱해 그만두는 민들레의 아픔
양지에서는 저리 픽 웃는 달래의 쨍한 향
더도 말고 그저 꽃멀미나 시켜라
저쯤 바라보이는 저 꽃멀미나 술렁술렁 해보리
<내게 꽃멀미나 시켜라> 전문
벅찬 아름다움에 한껏 압도되여 신음처럼, 멀미하듯 아름다움을 토해내던 그는 급기야 그 아름다움을 저주하고 나선다.
꽃비가
아름다워?
저렇게 랑자하게 흐르는
꽃비가 그 진붉은 꽃피가
네 눈에는, 아름답게 보여?
꽃들의 살점이 부서져
꽃들의 피가 튀겨
꽃들의 시체가
쌓이고 넘치고 흐르는데!
꽃비가 아름다워?
저, 꽃잎, 잎잎이 생명인데
생명이 저렇게 스러져가는데
그게, 그렇게 아름다워?
망할!
씹할!!
<꽃비> 전문
마지막 두마디는 그의 시를 아름답다고, 그가 선택한 자발적인 그 가난마저 황홀하다고 했던 나 같은 독자에게 하는 욕이였을가? 시인의 령혼이 꽃비로 화해 철없는 독자들을 향해 일갈을 날리는 것 같이 느껴져 뜨끔해났다. 시인 자신이 겪는 아픔, 상처에 대해 누구도 낱낱이 알 수 없다. 조개 안에 들어간 이물질이 령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시인이 몸으로 겪었을 아픔과 상처들이 진주 같은 시를 품어냈을 것이다.
인생은?
철없이 그 시를 아름답기만 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독자들에게 어느 순간 시인은 환멸을 느꼈던 것일가? 그 원색적인 욕이 시인을 시인 답게 만들어주며 이름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는 조금은 누그러든 어조로 말한다.
흐르다가 그만 발을 헛디딘
물의 한낱 실수가
저토록 장엄하다니
……(중략)……
한발 잘못 디딘 한낱 실수가
인간에게는 저렇게 장쾌하다니
흐르던 물의 한낱 실족 따위가
저다지 기막힌 절경이라니
<폭포> 일부
그저 너나 없이 겪는 인생의 크고작은 아픔들이, 그저 너나 없이 주고받는 상처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비명이 되다니, 그 아름다운 비명에 보는 이들이 저렇게 감탄을 하고 있다니 내 아픔을 몰라준들 어떠리…
시의 여백에서 시인의 이런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과한 비약은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비약이면 또 어떤가. 과감히 오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를 읽고 시구의 여백을 혼자 채워가며 울고 웃는 게 아니던가.
마음껏 헛다리 짚고 마음껏 오해하기, ‘사랑’과 ‘시 읽기’는 그래서 닮았다. 나는 함부로 시인을 오해하고 함부로 시구를 리해하기로 했다.
산길 걷다가
꽃이 곱다 한마디 했기로
그게 그렇게 죄이던가
하늘 푸른데
푸른 하늘에 기대여
하얀 구름인양
하얀 꽃 한송이 피였길래
꽃이 이쁘다 한마디 했기로
그게 그렇게 사무치는 죄이던가
<꽃이 곱다> 전문
시가 좋다, 한마디 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죄이던가,
함부로 오해 좀 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사무치는 죄이던가.
이윽고 시인은 독자들을 품기로 한 듯 싶다.
“꽃들의 살점이 부서져 / 꽃들의 피가 튀겨 / 꽃들의 시체가 / 쌓이고 넘치고” 흘러 내리는 꽃비가 황홀경을 선사했듯이 그의 아픈 상처가 고름이 되고 다시 시로 화해 령롱한 진주로 빛나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지독하고 잔인한 저주인지를 안다. 그러나 좋은 시 한편 더 읽고 싶다는 바람을 넌지시 전했기로서니 그게 그렇게 사무치는 죄이던가.
문학은?
문학은 아픔이고, 아름다움이리라. 아니, 아픔만으로 문학이 될 수는 없으며 아름다움만으로도 문학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픔 그 너머의 아름다움, 거기에 시가 있었으리라.
랑자한 혈흔이 만들어낸 잔인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사람들은 문학을 추앙했을 것이다.
그랬기로서니, 그랬다고 한들 그게 무슨 그렇게나 사무치는 죄겠는가.
그의 시 안에서 나는 한껏 죄인이 되고 싶다.
2023년 2월 21일


문학은 결핍이 아닐까 생각해 봄다. 물질적인 결핍이든 정신적인 결핍이든 사랑의 결핍이든, 그게 출렁이게 하지 않을까 싶슴다…
우리 대학떄 교수님이 늘 그 얘기 하셨어요 . 문학이란 리비도의 승화이다. ㅎㅎㅎ 리비도라는게 성욕이라고 해석되지만. 전 그게 어떤 이뤄지지 못한 욕구, 결핍 아닐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