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제 8화 부터 제10화 까지의 내용은 조금 민감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일시적인 불편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로부터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주인> 퍼포먼스를 본 한 지인의 친구는 나에게 자신의 개인전시<돌아오지 않는 강> 연계 토크 <조선족 미술인과의 대화>에 초대하여, 게스트의 일원으로 함께 토론을 진행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작가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영상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그는 자신의 조선족 지인을 통해 조선족 지역과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한동안 진행했다. 수 개월 동안 연변에서 거주하고 연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체감하고 고찰한 결과를 자신의 개인전에 출품하였다.

그 당시 나는 '민족'에 관한 테제를 너무 많이 사유하고 다루어서 한참 지쳐 있었을 때였다. 따라서 토크에 관한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마음이 꽤나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제안을 받아 드렸던 계기는 나의 아래의 노트에서 반영된다.

불과 일년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민족에 대해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 쉽게 입을 열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이러한 변화 사이에서 나는 ‘매달린남자’(The hanged man,倒吊人)와 유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매달린 남자는 내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태도들을 대변 할 수 있는 코노테이션(connotation)이기도하다.
‘거꾸로 매달린 남자는’ 12번째 타로카드다.
그는 침묵, 고행, 명상, 정체, 반성, 고통 등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거꾸로 매달려 있음으로 경계를 그을 수 있는 땅에 연루되지 않는다:
"세계가 거꾸로 보이면서 그는 반성을 시도한다. 거꾸로 서 있어서 오히려 더 똑똑히 보이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입장에 서있게 되고, 어디에든 속하지 않고, 빛은 눈부시게 비춰지고, 빛에 엉켜 생각을 할 수 없게 되고,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것도 안보일 때 내가 보여진다."
경계에 대한 나의 곤혹들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그제서야 나는 황급히 침묵의 발걸음을 따라 자취를 감추려고 한다.
완벽한 침묵의 상태에 이르기 직전에 ‘불귀강’(不归江:여기서는 <돌아오지 않는 강>  전시를 뜻한다.)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른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침묵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지만 그의 선의(善意)를 회피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침묵을 향하는 발걸음은 늦춰지고 우리는 동질의 실말이를 찾아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더이상 나의 민족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애착은 일종의 거부 반응을 초해한 모양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늘 내가 멈추려고 하는 곳에서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이 전시에 관한 나의 비평글도 함께 올려 둔다. 

 
안유리 개인전 <돌아오지 않는 강> 전시 비평문

    안유리 작가의 개인전 <돌아오지 않는 강>은 12월2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렸다. 안유리 작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처신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마음 속 깊은 정서에 대해 물음을 담고 이곳저곳 떠돌며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그는 <99 °C 쇼케이스 전시>에서 조선족에 대한 작업의 일부를 먼저 선보였고 이번 개인전에 더 많은 내용들이 전시 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화가 이중섭의 동명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사용한 것이다.
    전시는 3개의 프린트 작업 과 4개의 영상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나란히 배열된 <시인의 방>과 <팔 집> 두 사진 작업은 작은 액자에 담겨져 조용하게 한쪽 벽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영상 작업들은 두 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중 하나는 음향에 나오는 말소리와 같은 글들을 검정색 바탕에 나타나게 하여 들려주고 보여주는 작업 <월강>이고, 다른 하나는 <몸>, <말>, <소리> 라고 명명된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은 시리즈 영상을 각각 3개의 모니터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시공간이 어두운 탓인지 오프닝 날인데도 전시장은 살짝 긴장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 소외감을 함께 격고 있는 듯 했다. 안유리 작가도 이러한 반응을 예상 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전시는 더욱 많은 의혹과 물음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전시 후에 진행된 <조선족 미술인과의 대화>라는 토론의 장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안유리 작가의 작업들을 보게 되면 항상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거리감은 일종의 소외감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외의 대상은 관객 뿐만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는 '나'(작가본인)라는 존재가 저 멀리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렇다고해서 그는 더 멀리 떠나지도 더욱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느낌을 가져다 준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소외감'은 사람들이 자신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었던 어떠한 존속함과 확고함에서 분리 되는 일, 이 과정에서 나오는 심리적 현상을 뜻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은 다음 내용에서 상세하게 다루도록 할 것이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자신을 배타(排他)하여 되도록 타자의 말을 원하고 전하려고 했었지만 그러한 시도 역시 타자의 입을 빌려서 자신의 말로 되돌아오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시점에서 나 또한 이번 전시를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월강>

전시장을 들어가자마자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저는 중국의 공민 입니다."
"어떻게 답변을 드릴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글은 말소리와 함께 기재되며 검정색 바탕에 한 문장 씩 엇갈리면서 눈에 띈다. 이 작업은 1분8초에 불과하지만 영상의 무한 반복과 국가, 민족에 대한 민감한 언어 "납치", "탈출"들로 인해 전시장이 한층 억압된 느낌을 형성하기도 했다. 작업에서 깜빡 거리는 글 위에 아무런 이미지도 없었다. 그래서 말소리가 유난히 잘 들렸고 살짝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에 작업은 그 자체로만 의도가 뚜렸했었기에 아주 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사람들은 들림과 보임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고 몰입된다. 그러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이것을 진실 그 자체로 받아드린다.

<몸> <말> <소리>

<몸> <말> <소리>는 이번 전시에 제일 핵심적 작업이다. 이 작업은 <월강>과 달리 우리가 직접적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 그 중 특히 연길시(옌지시)를 비롯한 이 지역의 모습들을 편집하여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었다. 동영상에서는 음성과 영상의 콜라주 형식을 사용함으로서 동영상의 흥미를 더했다.
안유리 작가는 지난 2015년 홀로 연길시에 방문을 하면서 수 많은 현지 주민들과 접하며 그들과 담화, 교류, 인터뷰 등을 하였다. 작가 본인은 그가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낯설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곳 저곳의 간판들이 전부 조선어, 한자 두 가지 언어로 함께 나열되었기 때문에 이국(异国)에 있음에도 생소하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국이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일종의 "나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동영상에서 느끼는 것과 같이, 영상에서 나온 연변(특히 연길)은 한국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띄면서도 이질적인 감각이 동시에 나타난다. 작가 본인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영상을 자세히 보게 되면 <몸>, <말>, <소리>가 비슷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작가가 인타뷰 했던 연변인들은 각자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편집으로 인해 짤막짤막 하게 잘린 목소리들은 서로 교차하며 이어지고 새로운 조합을 이룬다. 결국에는 수 많은 목소리가 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사람의 말로 이어지는 것 같았으며 그 이야기 줄기를 이해하는 데에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 작업을 보는 한국인과 중국인(조선족)은 모두 편치 않는 느낌을 받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이 바로 앞 부분에서 언급했던 소외감에 의해서이다. 이 작업에서는 수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자유로운 (상상의) 공간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한국인은 이 작업에서 자신과 조선족 공동체의 유사함과 다름을 동시에 체험하면서 그 체험 속에서 이 공동체가 입은 '몸'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중국인 조선족은 이 작업에서 자신과 연결 된 매우 유사한 일상적인 이미지들과 말투(소리)로 인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 보려고 해도 그 연관들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들에게 이들(작품 속의 말과 소리)은 그들이며, 조선족 사람들에게 이들(작품 속의 말과 소리)은 타인으로부터 그려진 자기자신이다. 따라서 보는 이의 신분에 의해 소외감은 달리 작용한다.

이 작업을 보고나서 한국인 관객과 중국 조선족 관객의 시점이 갈라진다. 한국인 관객들은 "이 전시에서 배운 것이 많다", "뒤로 가면서 어떤 곳이 한국인지 연변인지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다", "조선족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것 같았다",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등 영상에 함축된 메시지들을 지식 혹은 진실자체로 받아 드리는 분위기였다. 반면 조선족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이 지역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조선족 관객 중 한 분이 이 작업을 보고 이런 말을 했었다. "여기에 올려 진 말들은 다 '정답'이네,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없는 데…그러면 다른 사람의 말들은 어디로 갔나?" 동영상에서 말 하고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일치한 목소리로 '정답'을 외우치고, 그 확고함과 확실함 속에서 그것의 실재성이 감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선족 미술인과의 대화>에 관해

전시와 함께 진행되는 라운드테이블 <조선족 미술인과의 대화>에서 안유리 작가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리서치를 통해 일 년 동안 자신이 연변에서 해온 작업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시간 순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이번 프로그램을 하게 된 이유와 이 작업을 하는 과정에 보고 느꼈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가 초대한 세 명의 조선족 미술인과 함께 이번 토론을 진행했다.  안유리 작가와 세 명의 게스트는 이 자리를 빌어 각자의 발표를 마친 후, 수 많은 질문들이 이어졌다. 마침내 관중석에 다른 조선족 미술인들도 있어서 함께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토론 과정에 직설적인 질문, 작품과 작가 의도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도 적지 않았다. 서로의 대화가 끝나고 나서 안유리 작가도 자신의 쇼셜미디어에 이번 담화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잡히지 않는 불확실한 말들과 오해와 불통이 낳은 이미지 사이를 횡단하며 나눈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안유리 작가는 '코리아 디아스포라'와 같은 부유하고 있는 정체성에 관심이 많았었고 그것은 작가가 자기자신의 근원을 캐묻은 과정에서 나온, 쉽사리 간과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의 이전 작업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자리에 대한 물음이 끊임 없이 제기 된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의 예전 작업에서 보여줬던 시적인 맥락과 혼잣말이 극히 줄어들었고 그는 타인의 말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이에 대해 자신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였다. 작업에서 드러나는 메시지와 작가의 의도가 일치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현대미술의 난점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유리 작가의 전시 후기글에서 쓰인 이 말은 여운이 남는다. "우리가 하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한, 타인의 말들을 섣불리 마침표를 찍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시와 작업의 반향(反响)을 떠나서 이와 같은 고민과 정서의 맹아에서 그가 위와 같은 작업들을 시도 했던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016 글/2021 수정)

소감:

한국인으로써 조선족 이야기를 다루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의 침묵과 긴장을 깨뜨리고자 무언가를 해보려는 용기와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민한 문화적 경계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이 전시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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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열을 올렸던 토론 속에서 내가 지은 표정이 아주 귀찮았던 모양이다. 그때 마침 관객석에 앉아 있던  한 질문자(후에 알고보니 유명한 비평가였다.)가 나의 이 표정을 포착하여 웃음을 지으며 나한테 질문을 하였다. 질문한 문장이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아까 얼굴을 살짝 찌그렀는데, 왜그러셨나요? 본인도 이 주제가 지긋지긋하나요?" 이 물음은 나의 숨통을 열어 준 듯 했다. "네,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그랬더니 토론자와 관람자 모두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안유리 작가 전시 및 연계 토크에 관해서 기사를 찾던 와중에 서울문화재단의 블로그가 있어서 아래 링크로 올려드립니다!

https://blog.naver.com/i_sfac/22091324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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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ean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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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차피 목소리가 작다고 라벨 하나 둘 붙여서 분류해버리기 십상이지요.. 반대로 그런 분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불려지는 그 이름으로 한데 모아지기도 합니다. 어떤 같은 잣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억누르면 그 사람들은 모여서 저항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이 내포하는 의미도 백년전부터 계속 바뀌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1. 네, 맞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한국에서 조선족에 대한 고유한 프레임을 깨뜨리는 것이든, 아니면 조선족의 현황을 비판적 시선으로 분석하는 것이든, 토크에서 ‘조선족 미술인’이라는 라벨을 달아 놓은 것 또한 미술인에게 ‘조선족’ 이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보여주는 셈이죠. 그런 점에서 처음에 저도 여기에 나가는 것을 꺼렸지만, 바로 이 지점—‘조선족 미술인’이라는 시선과 그 프레임을 이 장을 빌어 깨뜨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점에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 계속 바꾸어지는 의미를 담은 한 개념이 한국에서는 이미 고정인식으로 낙인 찍혔죠. 그것을 바꾸려고 지금 사람들이 애를 쓰지만 조선족이라는 공통체가 실제로 어떤 믿음(중심)으로 구성된 단체가 아니라 거이 이름만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특히 한국에서) 이름을 회복하는 것은 모든 조선족 분들이 노력하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조선족’이라는 ‘이름’에 어떤 성스러운 ‘의미’와 ‘믿음’이 생겨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생각입니다.

  2. 김진 작가는 “사실 정체성 문제는 지긋지긋하다. 더는 생각하기도 싫다.” 라며 조선족 미술인의 정체성을 주제로 다룬 안유리 작가의 개인전 의도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을 하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에 안유리 작가는 이런 충돌의 지점을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그래도 이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나?” 라며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함께 고민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전달했다. ////// 공유한 블로그에서 ///// 오~ 멋집니다.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도, 안유리 작가의 解围?도. 그리고 글의 마지막 부분의 정리에서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서 부딪쳐야지만 무어라도 깨뜨릴수 있는거 같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미래가 되지 않습니다.(인용 ㅋㅋ) 암튼 스토리 계속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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