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배후세계, 정말 낡은 개념일까?
“고통과 무능력, 이것이 배후세계 일체를 만들어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장에서, 서양 철학과 종교 전통을 떠받쳐 온 배후세계 개념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배후세계 – 플라톤의 이데아, 기독교의 천국, 영혼의 구원 등은 그가 보기엔 힘든 현실에 대한 회피의 장치일 뿐이다.
“가장 고통받는 자만이 경험하는 그 짧은 행복의 망상이 그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양 철학과 종교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독자들한테나 유효한 선언일 것이다. 내 주변에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그들은 하늘이나 신을 ‘미신’으로 분류한다. 이처럼 배후세계 자체가 낯선, 유물론 중심의 사회에서는 “배후세계는 없다”는 말은 새로울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한, 니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니체 이전이나 당시의 서양 철학이나 종교가 주장하는 “인간 저편에 대한 망상”인 ‘배후세계’냐, 아니면 니체가 주장하는 ‘나, 지금, 여기’냐 –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2. 언어학에서 말하는 ‘지금, 여기, 나’
니체가 말하는 핵심은 단순히 “신은 없다”가 아니라, “진리는 어디에서 오며,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라는 질문처럼 들린다.
당시 철학자들이 하늘 너머에서 진리를 찾고 있을 때, 니체는 그 진리를 ‘지금, 여기, 나’의 자리로 끌어내린다. 그에게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살아지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직업병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언어학의 ‘직시(deixis)’ 개념이 떠오른다. 니체가 말하는 ‘지금, 여기, 나’는 언어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음의 문장을 예로 살펴보자.
“우리 그때 거기서 만나자.”
위의 문장은 화자와 청자가 누구이고, 언제 어디에서 말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이 글을 읽는 이에게도 현재의 연인이나 배우자와 첫사랑의 ‘우리, 그때, 거기’는 모두 다를 것이다. ‘지금’, ‘여기’, ‘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 낱말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삶의 위치(origin)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니체의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고정된 진술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해석되는 선택이다. 니체가 말하는 진리도, 이런 직시 표현들처럼 구체적인 상황 맥락 안에서 질문하고 살아내는 과정에서 생겨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3. 배후세계는 모두 허상일까? – 할머니와의 약속
나는 3장을 읽으면서 15년 전 소천하신 할머니의 약속을 떠올렸다. 나의 할머니, 김정옥 여사는 공산당원이셨다. 소천하시기 전 10년을 할머니는 척추 골절로 누워서 지내셨는데, 그 치명적인 골절은 정기 당원 회의를 가시는 길에 어두컴컴한 계단에서 낙상을 입으신 탓이었다.
할머니는 기도 대신 행동을 선택하셨고 이웃과 가두에서 모두 존경 받는 어른이셨으며 와병 중에도 우리 가족의 정신적 기둥이셨다. 나는 종종 내가 믿는 신의 모습이나 성품을 할머니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라는 상상을 한다. 내게 할머니는 수호천사이셨다.
그런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며 손녀들은 천국에서 다시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간곡히 말씀 드렸고, 할머니는 인자하고 의연한 눈빛으로 답하셨다.
“내 어딜 가겠니? 손녀들이 가는 데로 나도 따라가야지.”
그 말씀에는 어떤 주의도, 종교도, 철학도, 논리도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손녀들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만 있었다.
니체가 말하는 배후세계는, 고정된 체계나 허위의 권위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할머니와 이른 나이에 소천한 나의 큰언니를 다시 만날 천국 – 배후세계는 그 자체로 삶을 견디게 하는 위로이고 소망이다. 그것이 근거가 있든 없든, 나는 할머니와 큰언니를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며 가끔 하루를 더 살아낸다.
왜 이런 소망이 내게 삶의 의미가 될까? 어떤 믿음이 오늘을 긍정하게 만든다면, 나는 그것 역시 하나의 진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라면, 나의 ‘배후세계’에 대한 이런 생각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4. ‘지금, 여기, 나’ — 니체가 전하고 싶은 말
그렇다면 니체는 정말 모든 배후세계를 부정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허물어 버리고자 한 것은 믿음 체계로 굳어버린 배후세계, 즉 사람을 얽매고 현실을 도피하게 만드는 거짓된 진리였을 것이다. (이것도 호의적 읽기에 해당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독교의 사후(死後) 세계 신앙 역시,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삶 – ‘지금, 여기’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는 동기이기도 하다. 인간 저 편의 세상을 바라는 마음이 꼭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니체의 일갈은 배후세계를 허물고 난 뒤의 허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 나의 삶을 긍정하라는 요청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어떠한가? 그대에게도 ‘지금, 여기’를 더 절실하게 만드는 사랑, 혹은 소망이 있는가?
5. 에필로그: 진리는 의심 또는 질문 속에 있다
우리 시대는 더 이상 천국을 기다리지 않는다. 유신론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배후세계는 애초에 없었다. 배후세계는 많은 이에게 현실 도피보다 오히려 설득되지 않는 말에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스스로 묻고 해석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과 닮은 이런 자들을… 이 자들은 … 의심이 곧 죄이기를 바란다.”
그 어떤 믿음도, 그 어떤 주의(主義)도 정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갖고 사색하자. 의심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뿌리를 더 깊게 내리게 하는 과정일 수 있다. 질문하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는 진리 가까이에 다가설 일말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 다 같이 질문하고 사색하자.
무엇이 진리인가? 나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